최선을 다해 팔을 벌리면 가슴도 열린다.
비행기 창가에 앉아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다가 깜박 잠이 든 사이에 ‘쿵’ 하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기내 선반에서 짐을 챙겨 ‘제주도 푸른 밤’이란 노래를 읊조리며 공항 출구로 걸어 나갔다.
공항 로비에 마중 나온 인파로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제주 입도 환영'이란 손 글씨 팻말을 들고 제주도가 고향인 입사 동기가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다.
이렇게 직장의 인사발령으로 낯선 동네인 제주도에 첫발을 내디뎠다.
직장에 입사하여 인천에 초임발령 되어 결혼도 하고 내 집도 마련하고 딸, 아들 낳고 재미있게 살다가 서울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몇 년 동안 서울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 직장에서 승진 인사가 있던 해에 인사과에서 호출이 왔다.
그때 나는 승진시험에 합격하고 승진대상자로 인사평가를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과장은 이번에 승진하면 지방으로 인사이동을 해야 한다며 가정 상황을 물어왔다.
부모를 모시고 살고 있나?
맞벌이하고 있나?
나는 두 가지 모두 해당이 안 되었다.
인사과장은 “딱이네” 하고 쾌재를 불렀다.
그때만 해도 제주도는 생활권이 육지와 떨어져 있어서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제주도가 고향인 사람이 주로 근무했었고 직원의 인사이동은 거의 없었었다.
1995년 봄, 내동댕이쳐지듯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제주도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동안 방을 구하지 못해서 제주도가 고향인 동기네 집 방 하나에 짐을 풀고 전셋집을 구하기까지 두 달여 동안을 염치없이 불편을 끼쳤다.
제주도에는 ‘신구간’이란 특유의 세시풍습이 있다.
대한 절기 이후부터 입춘 전까지 약 1주일 동안의 짧은 기간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사행렬이 이어진다.
신구간에는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내려온 신들의 임기가 다 끝나면 구관과 신관이 바뀌는데 이 기간에 구관은 하늘로 올라가고 신관은 아직 지상에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신이 두려워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해도 아무런 탈이 없다고 하여 이 기간에 이사가 집중적으로 이뤄져 왔다.
내가 제주로 발령받은 90년 중반에도 신구간 풍습이 많이 남아있었고 하필이면 신구간이 지난 시점이어서 집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집을 구하던 중 다행히도 나처럼 직장 근무지 이동으로 이사하는 집을 소개받아 집을 살필 여유도 없이 전세 계약을 해야만 했다.
인천에 내 집을 마련해서 한 창 재미있게 살다 보니 서운한 마음이 컸지만 그나마 아이들 어릴 적에 제주도에서 살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신혼여행의 일그러진 추억이 있는 제주도를 아내에게 잠깐의 여행이 아닌 삶의 여정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니 제주도 생활이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해서 아내와 여섯 살짜리 딸과 네 살짜리 아들 네 식구의 제주살이가 시작되었다.
휴일이면 아이들과 제주도 구석구석을 헤매며 돌아다니고 여름에는 퇴근길에 가까운 바닷가에 가서 일몰을 감상하는 낭만적인 삶이 일상이 되었다.
새로운 제주도 생활에 익숙해 갈 무렵에 아내가 임신했다.
이미 딸과 아들이 있어서 셋째 아이를 가질 계획은 없었다.
더욱이 아내가 그동안 제주도로 이사하면서 생활환경의 변화로 신경성 위염 증세가 나타나 약을 먹기도 해서 임신한 태아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또한 그 당시 우리나라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란 표어로
인구억제 정책의 여운이 남아있었다.
그렇지만 나의 이런 고민이 무색할 정도로 가톨릭 신앙이 철저했던 아내의 결심은 단호했다.
가톨릭에서는 ‘태아도 생명이다.’라는 논리로 낙태를 반대한다.
아내가 임신했음을 느끼고 산부인과를 찾았을 때 간호사는...
“임신입니다. 낳으실 거예요”라며 물었다고 했다.
아내는 순간 말문이 막혀서 떨리는 목소리로
“예 낳을 거예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아내와 나는 태아의 건강이 걱정되었지만 하느님이 주신 생명에 감사하며 출산까지 잘 견디어 보자고 서로를 보듬었다. 마침내 출산 날이 다가왔고 셋째 아이는 건강한 공주님의 모습으로 우리 품에 안겨졌다.
지금은 출산율 감소로 인구절벽을 걱정할 정도로 인구가 줄어드는 형국이 되어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출산장려금과 아동수당에 양육수당까지 주면서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셋째 아이가 태어난 90년대 중반에는 인구억제 정책으로 의료보험이나 부양가족 수당에 셋째 아이는 혜택을 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마침 출산 두 달 전에 의료보험법이 개정되어 출산비용이 의료보험 적용을 받게 되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제도 도입이 늦은 나의 직장에서는 부양가족 수당은 두 자녀까지 규정되어 있어서 셋째 아이는 여전히 가족에서 제외되었다.
염려 속에서 셋째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난 것은 축복이었지만 아내의 산후조리가 문제였다.
지금처럼 산후조리원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시절에 누구도 산후조리원을 만들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보니 장모님이 한 동안 계시다가 가신 뒤로는 아내 혼자서 갓난아이와 함께 두 아이를 돌봐야 했다.
그때 아내는 산후 회복이 덜 된 상태여서 말이 힘들어했다.
큰 딸아이는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던 해에 그곳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둘째 아들은 유치원 등원으로 갓난아이를 업고 초등학생이 된 딸과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의 뒷바라지에 아내는 날이 갈수록 몸과 마음이 힘들게 되었다.
친척이나 아무 연고도 없는 제주도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 수 없어서 결국 아내와 아이들을 처갓집으로 보내고 나는 제주도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외로움이 커갔다.
더욱이 가족이 있는 인천을 오가는 것은 이동 교통 비용이 만만치 않아 특별한 날이 아니고는 자주 갈 수가 없었다. 셋째 아이가 한 살이 되었을 때 인천에 집을 찾아가면 막내딸은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고 나를 보자마자 낯설어 울어대서 안아 주지도 못했다.
게다가 아내는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아이 셋을 키우다 보니 산후풍으로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다.
한 이틀 함께 지내다가 제주도로 돌아오는 날은 늘 마음이 먹먹했었다.
그냥 놔두면 아내는 물론 아이들에게도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될 것 같아서 인사부서에 전보 요청을 했다.
그러나 인사이동이 개인 사정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기도 하지만 그해 가을 인사철에 전국적인 인사이동이 다음 해로 연기되었다.
사정을 전하고 전보인사 요청을 하고 내심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지금은 제주도 근무를 원하는 직원들도 많이 있다고 하지만 그 당시 제주도로의 인사이동은 고려해야 할 일들이 많기도 하고 지원자도 거의 없어서 더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나 또한 아내의 마음에 동조하듯이 우울감이 쌓이고 꿈만 같은 제주 생활에 부담이 커갔다.
그럭저럭 어렵게 한 해를 보내고 다음 해 봄 인사에서 서울로 전보 발령이 되어 삼 년 남짓의 제주 생활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할 수 있었다.
혼자 살던 이삿짐을 제주항에서 배로 부치고 제주공항 벤치에 멍하니 앉았다.
해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제주도를 막상 떠나려고 하니 그동안의 제주 생활의 여운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처음 와서 집을 구하고 큰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아들 녀석을 잃어버려 경찰에 신고하고 찾았던 일이며 무엇보다도 생각지도 못한 셋째 막내딸을 제주도 생활에서 축하 선물처럼 받았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상념 끝에 비행기 트랙을 올랐다.
창가에 앉아 내려다보며 제주도의 땅끝이 보일락 말락 멀어져 갈 때 마음속으로
“잘 있거라 제주야 고맙다 제주야 다시 오마 제주야”라고 외쳤다.
어쩌다 제주살이에 얻은 막내딸이 이제 아빠와 마주 앉아 와인잔을 기울일 수 있는 건강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내 마음속에는 마냥 아이의 모습이었는데 어느새 훌쩍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