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는 일요일에는 늘 성당에 간다.
주일미사에 성가대로 이십여 년이 넘게 함께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고만고만한 나이의 아이 셋을 낳아 기르면서 아내는 소프라노 나는 베이스로 화음을 맞추어 왔다.
지금은 어엿한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성가대 연습이 있는 날에는 어린 막내딸을 집에 혼자 둘 수 없어서 성가대 구석 자리 한쪽에 놀잇감을 주고 성가 연습을 했었다.
그러다가 막내딸은 놀잇감에 흥미를 잃고 지쳤을 때 성가대 연습 소리를 자장가 삼아 엎드려 스르륵 잠에 떨어지곤 했었다. 나 또한 성가대원들과 화음에 맞추어 성가를 부르다 보면 딸아이처럼 어느새 일상에서 가장 평온한 시간 속으로 빠져들곤 했었다.
어느 날 주일미사에서 신부님이 강론 중에 하느님 돈과 내 돈을 구분하는 에피소드를 소개해 주었다.
『신자 셋이 모여서 하느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A 신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하느님께 헌금을 얼마만큼 바칠 것인가에 대한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먼저 땅에 줄을 긋고 내가 가진 돈 전부를 공중에 던져서 줄 오른편에 떨어진 돈은 하느님께 바치고 왼편에 떨어지면 내 주머니에 넣습니다."
그러자 썩 좋은 방법이 못 된다며 B 신자가 말했다.
"나는 땅에 원을 그려놓고 내 돈을 공중에 던져서 원 안으로 떨어진 돈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원 바깥에 떨어진 것은 내 것으로 간주합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C 신자가 길게 한숨을 쉬고는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하느님께 바칩니다."라고 말했다.
모든 것을 다 헌금한다는 말에 의아해하는 두 사람에게 자신의 방법을 말했다.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돈 전부를 던집니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공중에 머무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돈입니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것은 모두 제 돈입니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돈이란 우리에게 하느님의 돈과 내 돈이라는 이분법으로까지 구분하여 요령껏 더 많이 가지고 싶은 욕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존재임은 틀림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돈이 많으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얼마만큼의 돈을 가져야 만족할 것인지는 사람마다 삶의 가치를 돈으로만 환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삶의 가치를 행복의 척도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 행복은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 있어서 어떤 기준으로 정해 놓을 수는 없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부딪혀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스스로 규정짓는 삶의 가치에 따라 상대적으로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고 반대로 불행하다고도 생각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미래에 대한 기대감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은 미래로 불안감도 지니고 살아간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현실로 다가서면서 기대치가 작아지면 삶에 위험을 느끼고 이를 피하려고 돈을 모아서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만들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순탄치 않은 환경에서 외롭게 살아왔던 나는 직장을 얻고 아내와 결혼하면서 본격적으로 행복한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게 되었다.
나는 값싼 신혼 방을 구했고 아내는 혼숫감을 줄여 집을 마련하는데 보탰다. 우리의 신혼생활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한 푼 두 푼 저축하면서 미래를 향한 안전망을 만들어갔다.
지금의 불편함을 미래를 위해 참아가면서 살아가던 아내와 나만의 공간에 마침내 생명의 축복이 찾아왔다.
첫아이가 태어난 기쁨과 행복함을 지키려는 책임감이 함께 밀려왔다.
내 집 마련을 위해 만들어 놓은 주택청약예금으로 청약 자격을 얻어 몇 번을 떨어지고서 나서야 당첨된 아파트는 은행 빚을 겨우 내어 마련했다.
쥐꼬리만 한 월급으로 생활비와 대출금을 갚아가느라 아내는 무척이나 힘들었다.
그렇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돈에 쫓기어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가족의 보금자리를 만들어가는 달콤함에 빠져 잘 견디었던 것 같다.
삶의 기본적인 가치가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라면 가족이 함께하는 공간을 마련하는 내 집 마련의 수단인 돈의 가치는 욕심이 아니라 필요만큼 채워져야 할 삶의 가치인 것 같다.
신혼의 생활은 부부만의 즐거운 삶이지만 아이를 낳게 되면 부부생활의 무게중심이 아이에게 기울어져 간다.
아이가 성장하여 부모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되면 그때 다시 부부 중심의 생활로 돌아온다.
그때는 노후 생활로 접어들어 젊은 날의 준비 여하에 따라 노후의 흡족한 생활과 덜 만족스러운 최소한의 생활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가 결혼으로 삶을 시작하면서 행복의 가치를 더해줄 돈을 모으게 된다.
그래서 돈의 가치가 미래를 준비하는 삶의 가치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계획대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더욱이 나와 같은 베이버부머 세대들은 노후 생활에 필요한 돈이 현금이 아닌 부동산으로 딸랑 집 한 채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가끔 드라마를 보면 정년퇴직으로 집안에서만 생활하면서 삼식이라 불리며 삼시 세끼를 아내에게 요구하다가 서로 감정이 상해서 부부 싸움으로 이어지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노후 생활에 접어들면서 남편은 점점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반면에 아내는 주변의 지인 관계가 크게 변화가 없는 삶을 유지해 나간다. 노후 생활에 접어들면서 부부간에 공감으로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서로 존중하며 노력해야 한다.
아내와 내가 성당에서 성가연습에 집중하고 있을 때 성가대석 한쪽 구석에 잠들어 있던 막내딸도 이제 대학을 졸업했다. 직장인인 언니와 개인사업을 하는 오빠하고는 달리 아직 아빠의 용돈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취준생인 막내딸이 식탁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보고 “바닥 쳤네” 라며 종알거렸다.
내가 준 용돈 몇 푼으로 주식 프로그램 앱을 통해 기껏해야 두서너 주식을 거래하면서 경제 지식을 쌓아가며 돈을 알아가고 있었다.
요즈음 젊은이들 사이에 40대 초반까지는 조기 은퇴하겠다는 목표로 직장 생활을 하며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여서 은퇴자금을 마련하는 파이어족이 유행한다고 한다.
그들은 실제로 은퇴보다 재정적 자립을 중요시하며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은퇴 생활에서도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생활보다는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돈에 얽매이지 않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 워-라벨을 추구하는 것이다.
막내딸도 그런 직업을 찾으려는지 어젯밤에 밤새도록 컴퓨터 디자인에 몰두하다가 아침을 맞은 것 같다.
내가 몇십 년을 살아오면서 준비하는 노후 생활을 젊은이들은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얘들아 언제 철들래’라는 말은 이제 옛말 사전에서나 찾아보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