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삼류작자 Nov 04. 2024

우리말에 대한 궤변

한글은 훌륭한 문자이지만 언어는 글쎄.


외국어를 잘은 모르지만, 우리말은 원어민처럼 쓴다.


뭔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겠지만 우리말에 대해 딴지를 걸기 전에 시동 좀 걸어보는 거다.


한글은 분명 쉽고 뛰어난 것 같다. 어느 소국에서 한글을 자기 언어에 맞게 사용한다는 뉴스도 본 기억도 있으니 분명 뛰어난 걸 거다.


하지만, 문자와 달리 우리말의 존댓말이란 부분은 우리 사회의 크나큰 문제점과 같다.


언어라면 소통을 위한 도구로 충실하면 될 텐데 거기에 쓰잘대기 없는 격을 뒀다.



가끔 미국 영화를 보면 열몇 살 아이랑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우정을 나눈다. 이런 모습은 존대하대가 없으니 가능한 것이 아닐까?


존대는 권위와 일맥상통하지 않은가?



사회생활 속에서도 간혹 어린 사람이 저 보다 나이 많은 이에게 갑을의 관계로 반말을 한다. 혹은 반대의 경우도 다반사다. 그리고는 상처받거나 화낸다.



또 어떤 문제가 불거졌다가 시시비비의 본질을 벗어나 '너 이 새끼 왜 반말이야~' 라며  언어가 소통 중 또 다른  문제로 불거지곤 한다.


애초에 존댓말이 없었다면~어떨까?


문제의 본질, 소통의 도구로써만 충분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싸움 혹은 죽음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짚어 생각해 보면 조선시대까지 가게 된다.  철저하게 신분을 나눈 계급사회의 잔재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머리를 땋은 십 여살 남짓 먹은 아이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아이고 도련님. 소인이 한 짓이 아닙니다요.'



누구나 위화감 없이 상상해 볼 수 있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언어에서부터 평등부터 뺏어간 것 아닌가?


이 장면에선 얼어 죽을 '동방예의지국' 따윈 환상에 불과하다.


머리를 조아리는데 익숙하고 다양한 형식으로 굴종하는 것을 본 외국인들 눈에는 '격식'이나 '예절'로 비쳤을 것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가축만큼이나 잘 길들여진다.


온 사회가 갓 따위를 쓴 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게 만들고 다른 옷을 입고 그들에게 사용하는 말을 다르게 사용하는 룰을 만들어 철저한 계급사회를 500년간 유지했을 것이다.



또한 신분에 따른 다른 복장 관혼상제 예절등이 겉치레적 규칙이 복잡해질수록 사람 간의 신분을 나누고 길들이는 방법으로 유용했을 것이다.



지위가 높은 자가 지나갈 때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땅에 코를 박고.


죽은 후에도 그가 묻힌 곳에서 조차 머리를 조아린다.


그것을 '예'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점차 더욱 복잡해져 가며 죽은 자에게도 '예'를 다한다는 명목으로 가족 간의 상제문화로까지 변모했을 것이다.



그렇게 길들였지만 몇몇의 마음속에서 부당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나, 그런 마음조차 잠재울 수 있던 것은 어릴 적부터 사용하고 학습해 온 언어 일 것이다.



그렇게 뼛속 깊숙이 각인되어있는 철저한 계급사회의 룰은 현재에도 언어의 방식으로 남아있다.



태어나 자라며 말을 배우고 배꼽인사를 배우며 계급을 나누는 법을 배운다.


저보다 한 살이 어리면 친구가 아닌 아랫계급으로 인식되어 '친구'가 되기 힘들다.


여기서 말하는 친구는 완전한 평등이다.



그렇게 성장하며 더 많은 사람을 동등하게 사귈 기회를 잃어버리고 '친구'는 같은 해에 태어난 인간들로 한정해 버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언어를 사용하며 학습된 계급나누기는 사회에서 또 다르게 통용된다.



고용인과 피고용인 고객과 판매자 덜 가진 자와 더 가진 자.



처음 만나 몇 살이냐 물으며 계급을 나눈다.


나아가선 직업을 뭐 나면 어렴풋이 위치를 나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남과 자신의 고하부터 나누고 관계가 시작되는 게 익숙히 다.


그렇다 보니  높은 계급으로 인정받기 위해 GDP대비 가장 큰 차를 선호하며 실용보단 남에게 보이는 겉치레가 중요시되는 사회가 형성된다.



GDP 3만 불이지만 소셜네트워크 속 내 나라는 10만 불 국가보다 더 사치스럽다고들 한다. 그리고 누군가들은 더욱 큰 박탈감에 쓰잘대기 없는 불행감 느끼며 자살률 1위를 차지한다.



존댓말과 반말.



말에 격이 없다면 살아가며 이래저래 스치는 사람에게 미소 짓고 가볍게 말을 건네기가 쉬운 사회로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회는 신분제, 계급사회가 유지되기 힘들다.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부당함이 터져 나와 결국 동등한 권리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 어떤 억압보다 언어의 억압은 무서운 도구가 될 수 있다.




굳이 존댓말의 단 하나의 장점은 서열과 수직구조의 집단에서 복종시켜 하나의 점을 향해 나아가는 집단체제 유용하다.


현대 사회에 그런 집단은 군대뿐이다.



유독 아시아권 정치인들은 더욱 권위적이다.


도포 입고 갓 쓴 자와 다를 바 없는 주변 상황이 아닐까 싶다.


그런 '처지'로 지낸다면 권위가 몸에 벨테고 지위가 낮은 보통 사람과의 친밀한 행위는 마음 한편에 자신의 '자비'라는 오만함이 자리할 것이다.



생각해 본다.



굳이 반말과 존댓말 둘 중 하나를 쓰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면 반말로 택하겠다.


어디선가 봤던 이야기들이 생각난다.


과거 히딩크가 선후배 간에 서로 반말하라 한 것에 대하여 그의 통찰력을 느낀다.


항공기 블랙박스기록에서 기장에게 존댓말을 하는 부기장이 언어의 권위에 짓눌려 제대로 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해 추락사고가 난 적도 있다.


그 후 대한항공의 조종실에서는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지침이 내려졌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언어의 부작용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는 것도 같다.


하지만 반말이 아닌 존댓말을 택했다.


이젠 다 같이 미묘한 격을 차리고 서로를 더 멀리하는 존댓말 쓰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경직된 사회 분위기. 말 한마디에 온갖 의미를 찾고 가벼운 농담조차 정제되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 사회는 과거에 비해 입을 다물어버렸다. 



누군가에게는 그럴싸할지도 혹은 '궤변'

작가의 이전글 스토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