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랑

3-3장 슬픈 밤

by 삼류작자



뿌연 안갯속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정적이 침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부인의 목소리는 안개를 뚫고 나오듯 혹은, 남자의 귀에 물이라도 찬 듯 먹먹하게 들려온다. 조금은 늙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창백한 얼굴은 무언가에 갇힌 사람처럼 절망감과 무기력으로 얼룩져 있었다.


“아무것도 안 먹고 있다니까 걱정이 돼요.” 그녀의 목소리에서 오랜 슬픔과 불행함이 묻어났다.

“당신이 좀 어떻게 해봐요. 이렇게 두면 안 될 것 같아. 애 얼굴 못 본 지가 얼마나 됐는지 알아요? 매일 우리가 출근하면 그제야 나와서 밥 조금 먹는 게 다라니까. 기다려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아...”

그녀의 말은 점점 더 걱정스러운 울림을 가졌다. 그 걱정은 그녀의 몸짓에서도 묻어났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모습, 계속해서 눈을 깜빡이며 침묵하는 남편을 응시하는 모습.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무거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는 거예요?” 여자는 반사적으로 그의 소매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 대꾸도 없이 침실을 나섰다.

여자는 그의 뒤를 조심스레 따르며 그를 멀찍이 바라봤다. 걱정스럽고 불안한 눈길로,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아이의 방문 앞에 섰다. 잠시 멈칫하더니 문을 두드렸다.


쿵! 쿵!


“게임 꺼. 나와.”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강했다. 화가 섞인 듯하지만, 그 속에는 걱정과 안타까움도 분명히 담겨 있었다.

안에서 아무 반응도 없자 남자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잠겨 있는 문인 걸 알면서도 손잡이를 비틀어보았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문을 두들기고 손잡이를 비틀기를 반복했다. “너 당장 문 안 열어!!” 그의 목소리는 이번엔 더 거칠고 단호했다.

몇 초의 침묵 끝에, 문이 천천히 열렸다. 컴컴한 방 안에서 어둠이 밀려 나오는 듯했다. 남자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무언가 쇠뭉치 같은 것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딱!

쇠뭉치가 남자의 머리를 강타했다.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그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의식이 흐릿해지며, 갑작스러운 고통이 순식간에 지나가자 혼란 속에서 자신이 쓰러져 있는 모습을 낯선 시점에서 내려다보았다.

공간 어딘가에서 자신이 쓰러진 모습을 지켜보는 또 다른 그‘무엇’의 시선으로 볼 수 있었다. 자신을 공격한 남자가 보였다. 방 안의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성장한 자신의 아들이었다.

승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다시금 쇠뭉치를 들어 올렸다.


퍽!!


둔탁한 충격음이 무거운 공기를 울리며 잔인하게 들려왔다. 쓰러진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은 승호의 움직임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부인을 발견했다. 그녀는 안방 문 앞에서 두려움과 충격에 사로잡혀 있었다.

“미쳤구나, 승호야!” 그녀의 비명이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하지만 승호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그는 구릿빛 트로피를 내려놓고 연습이라도 한 듯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주방에 칼을 집어 들고 뒷걸음치는 어미를 쫒는다.

남자는 움직일 수 없었다. 무력하게 자신의 아들이 부인을 향해 다가가고, 그녀가 뒤로 물러나며 비명을 지르다가 결국 벽에 몰리는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칼이 그녀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그는 믿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광경이 현실일 리 없었다. 자신의 아들이, 그렇게 착하고 똑똑했던 아들이, 이토록 무자비한 괴물로 변할 리 없었다.

그러나 방 안에 가득 찬 피비린내와 부인의 마지막 외침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선명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도대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순간 안개에 갇혀 있던 듯한 무거운 공기가 순식간에 걷혔다. 눈앞의 세계가 갑작스레 생기를 되찾으며, 마치 오래된 흑백 사진이 컬러로 변하는 듯했다. 온통 회색빛이던 장면이 선명한 색감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식탁 너머에 앉아 있는 아내가 보였다. 그녀 역시 절망을 마주한 듯 텅 빈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 11화사 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