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아침

삼류작자 단편선 III

by 삼류작자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와 식탁 위를 부드럽게 감쌌다.
창밖에선 참새 두어 마리가 처마 밑을 쪼아대며 재잘거렸고, 전기포트의 잔열이 가끔 ‘딱’ 하고 소리를 냈다.

남자는 평화롭게 하얀 머그잔을 들어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혀에 닿아 있던 씁쓸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눈꺼풀이 자연스럽게 느슨해졌다.


어제부로 회사에서 해고되어 더 이상 무엇에도 서두를 이유가 없 아침.

식탁 맞은편 무언가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내의 뒷모습을 무심히 바라본다.


한 달 전,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남자는 그 사실을 아내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수없이 고민했다.

말할 기회를 잡을 때마다, 입 끝까지 올라왔던 말들은 돌아올 비난이 두려워 번번이 삼켜졌다.


그러다 전날 밤, 그는 마음을 다잡고 결국 털어놓자 결심했지만 막상 입에서 나온 말은 "며칠간 휴가를 받았어"라는 거짓뿐이었다.

해고통보를 받은 이후 오늘까지, 남자에게 하루하루는 숨 막히는 고통이었고 쉴 틈 없는 스트레스였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아내가 알면 또 뭐라고 나를 몰아붙일까?’
‘지금에 와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소심하고 내성적인 그는 스스로 만든 그 모든 불안과 압박을 그저 속으로 삼키며 견뎌야만 했다.

마음속에서 생각들은 현실보다 더 암울해졌고 부정적으로 커져만 갔다.

하지만 막상 더 이상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아침이 되자 이상하게도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정신에는 더는 스트레스를 담을 자리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감정의 그릇은 이미 오래전에 넘쳐버렸다.


남자는 천천히 포크를 들어 식탁 위 과일 접시에 놓인 복숭아 한 조각을 무심히 찍어 입에 넣었다.

부드럽고, 달고, 물컹한 식감이 입안을 채웠다.

그동안 그를 짓누르던 모든 생각과 불안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짧은 순간이지만 남자는 이 모든 것이 정말 완벽하게 평화로운 아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눈에 식탁의 작은 흠이 눈에 들어왔다. 평온, 평화 그 모든 것들이 어색한지 손을 뻗어 가장자리의

흠집을 손끝으로 괜스레 문질러본다.

정말 아무것도 해야 할 것이 없는 아침,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할 필요가 없었다.

'무념무상'이란, 아마 이런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남자의 눈빛은 평온했고, 심신이 나른해진 그에게 세상이 멈출 듯이 조용하고 느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순간 그 모든 평화를 깨어버리듯

유리컵이 신경질적으로 ‘탁’ 소리를 내며 식탁 위에 내려앉았다.


잔잔했던 물결에 돌을 던진 듯, 그 소리는 작았지만 남자의 평화롭던 공간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당신, 내가 뭐 하나 제대로 부탁한 적 있어? 이거 하나 못 해줘? 도대체 왜 맨날 이런 식이야 정말!”

문 옆 청소기를 옮겨놓고는 아내의 미묘하게 짜증 섞인 목소리가 이어진다.

“정말, 내가 말 안 했으면 또 며칠을 그렇게 문 앞에 방치해 뒀겠지? 당신은 이게 보기 좋은 줄 아는 거야? 애라도 걸려 넘어지면 어쩌려고?”

그렇게 시작된 아내의 말은 이내 물결처럼 이어졌다. 조곤조곤 이어진 어투는 그렇다고 부드럽지도 않았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당신이 애 숙제 검사 좀 해줬어야지. 당신 휴가라길래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친구들 만나고 왔는데 그거 하나를 못해줘. 내가 혹시 몰라서 확인했는데, 철자 다 틀려놓고선 당신은 그냥 ‘잘했어’라고만 적어놨더라? 그런 식으로 애 교육이 되겠어? 애는 나 혼자 키우는 거냐고?”

남자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앞에 놓인 식탁보의 자잘한 무늬를 바라봤다. 눈동자에는 아무런 초점이 없었다.

“아 정말,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그냥 무반응이지. 아 진짜! 속에서 열불이 나도 당신 얼굴만 보면 그게 다 허무해져. 이런 식으로 사는 게 맞는 거야? 부부는 같이 고민하고 같이 사는 게 부부가 아니냐고!”

본격적으로 남자의 앞에 자리 잡은 그녀의 말은 중단되지 않았다.
생각나는 대로, 오래된 기억을 꺼내 들추듯, 크고 작은 불만들이 줄지어 터져 나왔다.
가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도, 그녀의 입은 그녀의 말은 쉬지 않았다.

“응! 그리고, 다음 주에 우리 집에 가자는 말도 내가 꺼내야 해. 나 정말 섭섭해. 어머님 생신은 당신이 먼저 챙기면서, 왜 우리 엄마 생신은 내가 얘기해야만 기억을 하냐고. 그건 공평한 게 아니잖아. 결혼은 둘이 같이 해놓고, 나 혼자 당신 가족에만 맞추는 게 아니잖아!”

그녀의 말은 말을 낳았고, 말 사이에 쉬어야 할 틈은 점점 사라졌다.
여자의 목소리는 때론 높아졌고, 손짓은 격해졌으며, 그 눈빛은 수 없이 말을 하고 있음에도 대화를 원하듯 간절해 보였다.




.... 하지만 남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주 정확히는 그의 평화를 깨뜨린 그 유리컵의 소음이 ‘덜컥’하고 그의 가슴에 내려앉던 그 순간부터 남자의 귀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그의 귀는 다가올 스트레스로부터 방어하듯 스스로 작동을 멈춰버렸고 그때부터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 먹먹한 고요가 찾아왔다.

한동안 짤막한 식탁보의 무늬를 바라보던 남자의 시선이 흐릿해지자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입은 멈추지 않았고,

귀는 전혀 듣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 고요 속에서 아내의 입과 얼굴 근육들은 격렬하게 움직이며 그저 '뻐끔'거리고 있었다.

분노에 찬 손짓과 섞여 때론 예상밖의 표정으로 때론 격정적인 표정으로 쉼 없이 변하며 '뻐끔'거린다.

먹먹한 고요 속에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금붕어처럼 연신 '뻐끔'거리고 있는 그녀를 유리창 너머 세상에서 평화롭게 바라보는 구경꾼이 된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미세하게 씰룩 거리는 입술을 간신히 참아내느라 애를 먹는다.


무조건 참아내야 한다.


웃음이 터져버리면 그녀가 펼치는 이 감정적이고 변화무쌍한 쑈가 끝나버리고 말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평화롭게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아내의 입술이 계속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속에서 보는 듯한, 왜곡된 움직임.

그렇게 자세히 바라보다 보니 그녀의 피부아래 얼굴 근육의 연속적이면서도 미세한 움직임들이 생판 처음 보는 것처럼 이색적으로 보인다.

살짝 둥글게 튀어나온 이마. 눈썹을 지나 살짝 들어간 눈두덩이. 눈밑의 연하디 연한 살점들. 살짝 도드라진 광대가 입체감을 살린다.

그녀의 뻐끔거림에 윗니가 슬쩍 보이고 그 아래턱을 부지런히 움직이게끔 하는 근육들의 작동방식이 보인다.


살아오며 이렇게까지나 누군가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본 적이 있던가?


그렇게 관찰하듯 천천히 피부아래 근육조직을 떠올리며 바라보자. 그녀의 피부 아래 그리고 또 근육아래 숨겨진 두개골까지 꿰뚫어 보인다.

그 모양과 크기. 모든 것이 영화나 결혼 전 취미로 보아오던 해부학서적에서 본 모양과 딱 들어맞다. --




그렇게 여자의 말에 경청이라도 하듯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남자의 표정이 점차 미세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어느새부턴가 남자의 눈앞에는 피부도 근육도 없는 백골만이 연신 '뻐끔'거리고 있다.

복숭아를 찍어 먹던 포크를 쥔 남자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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