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는 숨이 멎을 듯한 공포와 고통의 기억 속에서 눈을 떴다. 방금까지 자신의 몸이 무너져 내리고, 추락하고, 깨어지는 고통을 생생히 느꼈던 그 기억... 아니, 그 사건의 단편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얼어붙은 체 서서 그녀에게 전해주려 들고 있던 음료가 담긴 비닐봉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방금 본 것들이 단순한 환상이 아님을 확신했다. 그의 옆에는 흑백의 거대한 존재들이 희미하게 서 있었고, 그들은 침묵 속에서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여주고 있었다. 현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 어떤 설명도 없었지만, 그들은 그의 의식 속에 지식을 흘려보내며 그 어떤 울림처럼 묻고 있었다.
그녀를 용서할 것인가?
만약 용서한다면, 지금의 통찰력은 흩어지고, 이미 겪은 일들이 그대로 흘러가리라는 것도 알았다. 반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오직 그녀의 생명을 끊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라는 사실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움과 름의 차가운 시선은 무거운 압박처럼 그의 내면을 짓눌렀다.
불과 몇 초전까지 현수는 우상이자 별이었던 에이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자, 지독한 증오의 감정과 함께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 손길과 차갑던 시선만이 떠올랐다.그러자, 곧자신이 저지를 짓에 대한변명 같은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그 어떤 사람이, 조금 전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를 용서할 수 있을까?’
에이지가 고작 몇십 걸음 앞에서 차로 향하고 있었다. 현수는 거칠게 심호흡을 내뱉으며 전력으로 달렸다. 이제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절박함에 온몸이 뜨거워졌다. 그녀가 차에 다가가려는 그 순간, 그는 무작정 그녀를 밀어 넘어뜨렸다. 그녀가 바닥에 쓰러지며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그녀가 소리쳤지만, 현수는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손에 든 에이지 얼굴이 프린트된 캔 음료를 힘껏 내리쳤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지만, 그의 손은 더 세게, 더 많이 내려쳤다. 숨이 가빠지고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죽음을 경험한 공포가 더욱더 그를 밀어붙였다.
그러다가도 순간 마음 한 구석에서 이제 멈출 수 있지 않을까, 용서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녀가 그를 마지막으로 쳐다보던, 그 차가운 시선이 떠오르자 산산이 부서졌다.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현수는 목청이 터질 듯 소리치며 비닐봉지를 힘껏 그녀의 머리 위에 씌웠다.
비닐로 얼굴을 꽉 조였다. 그녀의 호흡이 격해졌고, 현수는 멈추지 않고 시멘트 바닥으로 그녀의 머리를 내리쳤다. 고통에 찬 그녀의 비명이 조금씩 희미해져 갔지만, 그의 손은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차가운 공기 속에 그의 절박한 외침과 함께 비닐봉지가 일그러지며 점점 그녀의 가냘픈 몸은 축 처져갔다. 눈앞의 이 상황을 끝내야만 한다는 본능이 더 거세게 그의 몸을 몰아붙였다.
저 멀리서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현수는 들리지 않았다. 이미 생명 없는 그녀의 머리를 바닥에 내리치고 있는 자신의 손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의 모든 분노와 원망을 마지막까지 쏟아내는 듯, 그는 무너질 듯이 그녀를 붙들고 있었다. 마침내 사람들이 달려와 그의 팔을 붙들고 억지로 떼어냈다.
움 름이 그의 양 귀 속에 주입한 기억들은 한순간에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현수는 멍한 시선으로 주위 사람들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의 모든 감각과 기억이 희미하게 지워진 듯,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바닥에 힘없이 엎드린 채로 사람들에게 제압당하며, 현수는 혼란에 빠져 머릿속을 헤매었다. 쥐어짠 듯 떨리던 손끝과 온몸에 흐르는 피의 감각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는 왜 이토록 잔인하게 누군가에게 폭주했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얼핏 보이는 시야 너머로 에이지처럼 보이는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에이지...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안돼..'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의 머릿속엔 그저 아릿한 통증과 허공에 떠 있는 파편 같은 감정들만 맴돌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와 날카롭고 싸늘한 공기 속에서, 현수는 몇몇 남성들에게 짓눌려 그 모든 혼란을 체념하며 바닥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이내 모든 걸 외면하려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