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 편을 들어줄 사람이 되기로 했다
브런치에 오래도록 글을 쓰지 못할 만큼,
그동안 나는 이상한 시간을 보냈다.
파트 타임으로 일하는 나에게는 새로운 일터를 늘리는 것이 필요했다.
새로운 일터를 늘리기 위하여 전전긍긍하였고, 마침내 한달에 4곳을 번갈아 일하게 되었었다(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 시간동안 정말 정신없이 일만 했다. 체력과 정신 에너지 소모가 상당했고, 이를 다시 채울 시간적 정신적 여력이 없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이 보냈는데, 시간을 '보냈다'라고 하기보다는 '버텼다'가 적합할정도로 힘이 들었다.
그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마치 삶의 중턱이지만 끝에 아스라히 서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곤 때때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살지'
이 일이 재밌어서 그리고 재미있어서 시작하였지만, 막상 일을 하면서 괴로운 나에게 물었었다.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아마 나는 아슬 아슬하게 서 있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나보다. 그렇게 이상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나는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나는 내 삶에 '편'이 정말로 중요했다.
내 편에 서서 같은 조망을 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내가 타당하다고 느꼈다. 물론 부모와 남편이 이러한 역할을 해주었지만, 진정으로 그 타당성에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존재는 스스로였다. 나는 20대를 내 편에서 바라보고 있는 방향에 대해 '적절하다' '타당하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다가 허덕이는 시간으로 보냈다. 그 당시에는 자기혐오도 있었고, 반대로 타인혐오도 느꼈다. 내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상황들이 너무 아프다고 느꼈다. 그러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되기 위해 상담을 공부하게 되었다(지금은 상담이 편을 들어주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게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되면서, 나는 나를 하늘에서 내려다보지 않고 내 편에서 바라보는 경험을 자주 했다.
그 때마다 내 편에 선다는 것이 승패를 나누는 것도 저울로 판단하는 것도 아님을 알고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이 이상한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느끼는 느낌에 성실했다. 힘이 들어 종종 침대에 엎어져 있었고, 자주 멍을 때렸으며, 까닭없이 나는 눈물을 반가워했다. '안되겠다'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이 현실을 개탄하면서 '일터를 여기저기 벌려놓은 나'를 채찍질하지 않으려고 했다. 마침내 이상한 시간 속에 나는 나를 두둔하였고, 일을 차차 정리하면서 다시 평정심을 찾았다. 평정심을 찾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일상에 돌아왔다. 책을 읽고 읽다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노트북을 열었다.
불교 용어에서 유래되었고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자기 돌봄'은 자기 스스로를 돌보는 행위를 말한다. 나는 나를 돌보면서 소란스럽게 즐겁진 않지만, 담담한 위로를 느꼈다. 풍선을 입으로 불면 풍선 모양이 어떠하던지 전체가 숨이 채워지는 것처럼, 내 내면도 무언가 채워지는 느낌이 드는데 거북하지 않아 만족스러웠다. 나는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