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기나 의욕이 솟아나도록 북돋워 줌.
나는 유치원 교사로 일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매일 수업을 준비했는데, 목표를 설정하거나 예상되는 효과를 서술하는 것이 필요했다. 목표를 서술할 때 나는 '지지하고 격려한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사실 처음에는 '효과를 높인다' 내지는 '할 수 있도록 한다'등의 단정적인 언어를 썼다가 유아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혼난 기억이 있다. 그런데 상담사가 되어 다시 '지지하고 격려한다'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상담에도 목표가 필요하기 때문이고, 나는 이 단어를 아주 자주 사용하곤 했다.
나는 요즘 우울하다. 요 며칠 새 가슴이 조여 오는 것처럼 답답하기도 하고, 먼 산을 보며 한숨을 쉬곤 한다. 재밌는 예능을 보면서 맥주 한 캔 따는 것이 유일한 낙인 남편이 얄궂어 보였다. 밤이면 캄캄한 풍경 때문에 우울함이 느껴졌고, 낮이면 밖에 나가지 못하는 현실이 슬펐다. 내게는 자주 소통하는 카카오톡 채팅방이 몇 군데 있는데, 그중 한 군데는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있는 채팅방이다. 방에 참여하는 동료들은 나와 나이 차이가 꽤 나고, 아이를 키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시콜콜 나누었다. 그중 몇몇은 둘째를 임신하여 출산을 임박했다. 우리는 자주(거의 매일) 요즘 필요한 아이템, 쿠팡에서 세일해서 살만한 목록, 오늘 저녁거리 등을 나누었다. 그 방에 들어가 있으면 내가 고민하고 있는 거리들이 생각나지 않아 좋았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 방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내 지독한 우울함을 나누지 않은 채 웃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자리에 들 때 남편은 어줍지 않은 위로를 하려 했다. 잘하고 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 길이 생길 것이다. 너는 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알았어, 그만 얘기하자" 질문 없는 질문에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뾰족한 수가 없다는 대답을 스스로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강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는 요 며칠 새, 남편은 휴가를 내고 나의 기분을 헤아렸다. 화분을 키우기 위해 화훼 카페를 방문하여 '차이니즈 자스민'이란 식물을 데려왔다.(중국 자스민이라는 게 이름이 촌스럽기 그지없다) 그리고 협탁을 사기 위해 이케아를 방문했고, 거기서 새로 나온 아이스크림도 맛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여러 번 포장해와 식사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니, 이 우울한 기분을 다스릴 에너지가 조금 생겼다. 충전 바의 색이 빨강에서 노랑으로 바뀌는 듯했다.(아이폰 참고) 그러니 이 브런치도 쓸 힘이 생겼을 것이다. 무언가라도 해보려는 마음에 노트북을 열었다.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창밖을 바라보니 밤새 내린 눈이 새 하얗다. 나중에 딸을 낳으면 이름을 설(雪)로 지으면 어떨까 잠깐 상상해보았다. 로딩되던 노트북이 켜졌고, 바탕화면에 내가 적어놓았던 포스트 잇이 보였다. LG 노트북은(모든 노트북이 그런지 모르겠으나) 포스트잇 기능이 있어서 메모를 해놓고 바탕화면에 띄어놓을 수 있다. 나는 종종 내가 해야 할 목록을 적어놓곤 했다. 그런데 하나 개수가 많아 읽어보니 남편의 짓이었다.
사랑하는 00야. 너무 잘해가고 있으니, 지금처럼 한 걸음씩 차곡차곡 걸어가자. 예쁘고 사랑스러운 나의 00. 내가 항상 응원할게
그는 종종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잘한다. 레퍼토리는 늘 비슷해서 감동의 타격이 연애초보다 크진 않지만(연애 8년, 결혼 2년 차), 그 날은 유독 눈물이 금방 차올랐다. 맞은편에서 컴퓨터로 일하는 남편이 눈치채지 못하게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척하였다. 눈구멍이 눈물을 다 마실 때까지 최대한 표정관리를 했다. 고마웠다. 이해가지 못하는 마음을 이해해보려고 휴가를 내면서 맞추려는 그의 노력을 보아왔기 때문에 이 격려가 형식적이고 낯간지러운 말을 넘어섰다 여겼다. 최근에 읽은 '삐삐 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책을 저필한 이주현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자신의 조울증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준 것은 식상하게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격려였다고 밝혔다. 재작년(2021년이 실감 난다),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에서 노 규태 역을 맡은 오정세는 그 해 kbs 연기대상에서 남자 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20년 백상 예술대상에서도 남자 조연상을 수상했다. 그의 수상소감은 당시 꽤나 화재되었다.
나는 100편 넘게 작품 하면서 어느 때와 똑같이 해왔다. 결과는 다 달랐지만, 나는 100편 모두 똑같이 일을 해왔다. -중략- 일을 하다 보니 동백이라는 작품을 만났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계속했으면 좋겠다. 그 일의 결과는 여러분의 탓이 아니니 자책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냥 계속하다 보면 평소와 똑같이 했는데, 그동안 받지 못했던 위로와 보상이 여러분에게 찾아올 날이 분명 있을 것이다. 여러분 삶에 여러분만의 동백이가 찾아올 것이다.
라고 대중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만약 격려라는 것이 사람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농구장에서 농구를 하는 선수들 뒤에 응원하는 치어리더를 그려본다. 아니 그의 이름이 쓰여있는 플래카드를 들고 힘껏 외치는 친구들을 떠올려본다. 이건 정말 응원일 것이다. 구덩이에 빠져나오지 못하는 나의 손을 붙잡아 끌어주며 온 힘을 다 쓰는 모습을 그려진다. 아니 이끌기보다는 북돋아주는 느낌이어야 할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위에서 끌어주기보다 밑에서 받쳐줄 것이다. 비슷하게 자전거를 막 배우는 자녀의 뒤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곤 이렇게 말하겠지 "그래, 잘하고 있어". 넘어지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괜찮아 괜찮아 잘했어" 생각해보면 격려는 그와 같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해줄 때 강력한 효과를 얻는다. 그러기에 상담을 할 때에도 내담자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귀를 잘 기울여야 한다. 최근 나는 만나보지도 못했지만 내 마음을 다 아는 것 같은 어른과 내 곁에서 쉼 없이 토닥이는 어른에게 격려를 받은 듯하다. 격려는 받는 순간보다 갖고 있을 때 그리고 곱씹을 때 '받았구나' 느낀다. 이 글을 적으면서도 벌써 몇 번을 곱씹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