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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Nov 02. 2023

자존감에 대한 고찰_2

k 장녀들의 좋은 의미론 책임감, 나쁜 의미론 죄책감


 나는 남편과는 아주 많은 대화를 벌겨벗겨 나눈다. 물론 서로 준비되지 않은 날 것이 들켜보임적도 있지만, 7년 연애와 4년 부부 생활을 경험하면서 서로의 감정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면 본인이 수면 아래에 무엇이 있었노라 발견한 걸 나눈다. 대화는 아주 깊고 깊어 저 밑바닥까지 나누게 된다.


동생이랑 다툰 뒤 이틀정도 지난 밤, 조심스레 남편에게 물었다.

- 누구나 상대와 비교하거나 주변 사람들로 영향을 받아서 자존감을 채우잖아, 그런 편에서 난 자존감이 낮은 것 같아

- 그래? 근데 사실 난 자존감이 되게 높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자존감은 주변에 영향을 받지 않아

-??? 응?? 그럼 어떻게 자존감이 높아져?


정말 응??스러웠다. 남편의 말은 한방 맞은것 같았다. 그리고 남편이 최근에 있었던 일을 나누며 자신이 자존감이 높아진 경험을 말해주었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다른 팀에서 고객 몇 천명에게 각자 다른 코드를 이메일로 보내야하는 상황에 일손이 부족해 남편의 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남편은 전체적인 내용은 비슷하나, 고유의 코드만 다르게 받기 위해서라면 그에 맞는 코드를 짜서 작업하는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고, 인터넷을 찾아 코드를 완성해 요청한 팀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팀에서도 그런 방법이 있는지는 알지만 실수의 위험성이 있으니 그냥 노가다(?)를 하자고 했고, 남편음 실수없이 보내짐을 테스트를 통해 확인시켰단다. 여기서 노가다를 요청한 팀은 빼죽댔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결국 본인의 의견대로 자신의 팀이 일을 하지 않아도됨에 뿌듯함을 느끼고 참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했단다.


남편과 대화하면서 자존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흔히들 자존감은 자아 존중 감각이지만, 그것을 넘어 자기효능감-자신감-사랑받는 느낌등을 모두 대표하는 것처럼 쓰인다. 하지만 자존감은 정말 있는 그대로의 나, 자아를 존중하는 감각이다. 난 나라는 존재를 스스로 존중하지 못하고 남의 손을 빌리려 하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이 딸의 역할에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부모님에게 손벌리지 않으며, 가족을 잘 챙기고, 동생을 잘 돌보는 것. 그것이 나의 역할이었고 난 그 역할에서 성인이 된 지금까지 자유롭지 못하다. 나로써 존재하는 역할은 때때마다 바꿔있는 옷처럼 다 다르고 고유한 것을, 난 고집스레 계절이 바뀌어도 한 옷을 유독히 집착했나보다. 좋은 의미론 책임감, 나쁜 의미론 죄책감. 이 역할에서 벗어나면 안될 것 같은 죄책감이 날 자유롭게 갈아입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옷이 나의 잠옷도 되고 외출복도 되고 계절이 지나도 입는 옷이라고 착각했나보다. 아마 k 장녀들이라면 다들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이 역할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더욱더 강력해진다. k 장녀들에게 역할을 수행치 않으면, 마치 엄마들이 못누리고 못 느끼며 살것 같기 때문이다. 엄격히 엄마의 삶은 엄마의 것, 내 삶은 내 것인데 나의 삶을 떼어 주어야할 것 같은 책임감을 느낀다.


가을이다 가을, 여름옷을 고집할 때가 아니란 말이다.


상대와의 의사소통을 일종의 심리게임으로 풀어낸 교류분석이론의 ‘카프만’은 심리게임이 일어나는 3개의 구도를 소개했는데 이는 구원자, 박해자, 희생자이다. 전에 금쪽상담소에 홍석천씨의 이야기를 들은 오은영박사가 구원자 컴플렉스가 있음을 소개한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자외에 박해자, 희생자가 익숙친 않겠지만, 이름 그대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앞서 설명했던대로 k 장녀란 프레임의 구원자역할을 자초했고, 아마 내가 더욱 못났더라면 그걸 이용해 박해자도 됐다가 희생자도 됐을 것이다(됐던 적도 있었을수도…). 구원자의 역할이 의미없게 만든 상황을 빌미로 박해해 내 역할을 인정받거나, 날 더 갈아넣고 희생해서 결국 나의 희생에 물을 뿌린 셈을 만들거나. 그렇게 심리게임은 교묘하고 자신조차 모르게 일어난다.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 내가 그토록 화가 난 것은 내 역할- 나아가 내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에서 오는 일종의 생존본능과 같은 울부짖음이었다. 동생이 좀 부족하고 엉성하게 행동하고 반응한것도 사실이나(당시엔 싸가지도 없었다), 그건 그 아이 그대로인 걸 인정치 못했다. 동생도 엄마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난 인정치 못했다. 그저 나의 역할에 반기를 드는 반란군같을 뿐, 마음속으로 몇 번을 없애 내가 외동이었어야 했다는 생각을 몇 번을 했는지.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 이런 고약한 버릇을. 고치려 들어도 익숙해서 그만 다시 찾게 되는 젓가락 질같은 버릇. 상담공부하면서, 상담하면서 많이 덜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올해에도 여전히 난 모질렀구나- 멀었구나 다시 알게 된 요근래였다.


남편의 자존감을 무용담처럼 들은 다음날, 난 나의 모지람을 나누었다. 그럼에도 남편은 외동보단 형제자매가 있는 경험이 오히려 나에게 좋은 것이라며 격려했지만 크게 와닿진 않았다. 다시 내가 스스로를 존중하기 위해 했던 방법이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정리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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