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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Jul 15. 2022

프로 퇴사러의 우아한 갈등 우회법

눈에는 눈이 아닌, 그 눈에 더 잘 보이는 안경을 씌워주자

"인수인계 파일을 PPT로 포맷에 맞춰 작성해주시기 바랍니다"


후임자가 정해지자 팀장은 기다렸다는 듯 건조하고 군더더기 없는 어조의 메일을 보내왔다. 비록 팀장과 나 사이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관계는 소원하고 회복은 요원했지만, 고락을 함께 나누어온 3년 이라는 시간을 대입하니 기계적인 말투가 괜스레 섭섭해졌다.


와중에 섭섭한 감정을 느끼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미운 정도 정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 나갈 사람은 나갈 사람이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업무 공백을 메울 수 있도록 정비하는 것도 팀장 역할이겠지. 각자의 입장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무정한 말투는 그렇다 쳐도,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PPT로 포맷에 맞춰'라는 말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전날 인수인계 항목 및 계획서를 엑셀로 정리하고 공유 파일 목록까지 작성하여 제출했기에 새롭게 PPT를 작성하라는 것은 과욕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포맷이라는 게, 얼마 전 팀 내 두 명의 직원이 상호 대무 혹은 업무 순환을 위해 밤새워 만들어야 했던 보고서 수준의 자료였기 때문이다. 소상하게 텍스트 박스를 만들고 일일이 설명을 달아서 친절하게 주의사항까지 알려주는 완벽한 업무 가이드였다. 더군다나 업무와는 성격이 달라, 그대로 응용해서 업데이트할 수도 없으니 포맷이라기보다는 잘 만들어진 샘플에 가까웠다.


이미 나갈 날이 정해져서 기존 업무를 마무리하기에도 분주한, 심지어 이 마저 꾸역꾸역 하고 있는 퇴사 예정자에게는 부당한 디렉션으로 여겨졌다. 물론 시간이 많이 엄청 많이 남는다면 그 보고서 까짓 거 써줄 수도 있겠으나, 나가는 날까지 뒤치닥 거리를 해야 할 업무가 쌓여 있으며 실무 인수인계도 진행해야 하기에 그처럼 좋은 품질의 매뉴얼 작성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등에 빨대 꽂아서 대대손손 물려줄 자료를 손에 쥐고는 유능한 매니저를 자처하려는 것 같아 욱하는 감정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분은 내 전임자로서 당시 인수인계라고는 달랑 파일 하나를 손에 쥐어준 인수인계 분야의 미니멀리스트가 아니었던가? 시스템 사용법에 대해서도 "해보면 돼요"라는 대답으로 일관하며, 나를 강하게 키워준 장본인이었다.


성질 세포가 삐죽삐죽 돋아나 분출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확 박아버릴까. 끝까지 내로남불의 태도인 것 같아 저항하고 싶어졌다. 건강한 상사와 부하의 관계로 남고 싶을 뿐이니, 끝까지 갑을 관계를 요구하지 말라고 당당히 말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운이 좋은 것인지 내가 운이 좋았던 것인지, 곧 퇴근 시간이 되어 씩씩 거리면서 회사를 나와버렸다. 마침 금요일이었기에 주말에 생각해보기로 했다. 남편에게서도 조언을 얻었다.


"싸우지 마. 여태까지 잘 참고 견뎠는데 분란을 만들어서 불편하고 찝찝하게 나오지 마. 내가 아는 당신은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


그의 말이 팀장한테 져주라는 의미는 아니었을 거다. 평소 갈등이나 다툼을 우회하려는 내 성격을 잘 알기에 해줄 수 있는 조언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뾰족했던 감정이 누그러지면서 이성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PPT 작성은 내가 좋아하는 업무 중 하나였으니, 그 자체가 싫은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다만  "본인도 실무자 시절에 인수인계 파일 하나 없었으면서 관리자가 되니 이런 것들을 시스템화해서 날로 먹을까 봐 꺼려졌던 것"이다. 한마디로 반항심이었다.


스스로가 아마추어 같은 감정에 사로잡힌 듯했다. 내 생애 마지막 직장일 수도 있기에 퇴사만큼은 성숙하게 하고 싶어졌다. 여전히 기꺼이 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어차피 떠나면 그만인데 그 이후에 그가 홀랑 다 자기 밥상 위에 올려 배부르게 먹던 말던, 앞으로 내 인생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으니 경 쓸 일도 화가 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기존 포맷은 너무 장황하고 글밥이 많아, 결코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내 방식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내가 후임자 또는 신규 입사자로서 이 일은 처음 맡는다면 어떤 방식의 설명이 필요할까?


멘토가 없어도 마치 옆에서 시범을 보여주는 것처럼 친절한 자료를 만들면 될 것 같았다. 단, 내용이 너무 많아서 읽기에 부담스러운 자료는 피하고 싶었다. 나는 언제나 심플한 자료를 선호했다. 시스템이나 엑셀 활용 화면을 동영상으로 찍어보자. 화면 촬영 앱을 이용하면 손쉽게 제작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왕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이니 내가 즐거운 방식으로 접근해보았다.


덕분에 장표수나 텍스트가 많지 않은 깔끔한 매뉴얼이 완성되었다. 맨 앞에는 업무 흐름도를 도식화하여 어떤 프로세스에 관한 설명을 하고자 하는가를 가독성 있게 보여주었다. 과정과 결과 모두 내 마음에 쏙 들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관리자가 정한 방식대로 따르는 것은 종종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묵묵히 해내는 동료들에 비해 튀는 행동으로 비칠까 봐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떤 효용이 있는지, 확장성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조차 하지 못한 채, 간혹 도저히 못 참아서 질문하더라도 명쾌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해치우고 나면 내 시간이 증발해버린 것 같아 허무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일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주도권도 없이 해야 하니까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못마땅했다.


일은 일일 뿐이었으나, 일일 뿐인 일로 인해 소중한 하루들이 내 것이 아닌 그렇다고 남의 것도 아닌 상태로 흔적 없이 증발되어 갔다. 사라진 하루들이 모여 월급날이 되면 소고기나 사 먹으며 소비로써 내 가치를 증명해 보이기도 했으나, 텅 빈 것 같은 마음까지 채워주지는 못했다.


일하는 마지막 날까지 월급은 나오지만, 마지막까지 시간과 월급의 교환이라는 단순한 등가 법칙의 메커니즘에 순응하기는 싫었다. 더 이상 주도권 없이 시간을 팔고 싶지는 않았기에 인수인계를 포맷대로 하라는 지시에 그토록 부르르 떨며 분노했던 것이로구나. 이제야 아마추어 같은 감정에 매몰되었던 원인을 찾게 되었다.


인수인계용 매뉴얼을 공유하니, 팀장은 동영상까지 촬영했냐며, 좋은 방법이라고 반색했다. 꽤나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싸우지 않고 우아하게 승리하는 방법은 "눈에는 눈"이 아닌, 그 눈에 더 잘 보이는 안경을 씌워주는 것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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