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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Jul 23. 2022

출근길,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 봤다

가보지 않은 길에서 길을 찾다

우리 집은 역세권과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 전철을 타려면 버스로 적게는 4 정거장, 많게는 8 정거장을 나가야 한다. 그러다 보니 역세권에 살던 시절에 비해 출근길의 변수가 많아졌다.


처음에는 회사까지 환승 없이 갈 수 있는 버스를 애용했다.


노선이 최적화되어 있어 정거장 수는 9개뿐이고, 회사 바로 앞까지 모셔다 주니 그야말로 축복받은 출근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집을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상습 정체 구간들로 인해 지각 위기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회사 앞 정류장을 코앞에 두고 속절없이 시간만 갈 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버스가 야속하기도 했다. 확실히 편하지만 확실히 불안한 방법이었다.


맘 편히 가려면 5분이라도 일찍 집을 나서야 하는데 이 역시 배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1년 정도 마음을 졸이며 출근하다 이 옵션은 버리기로 했다.


이후에는 버스 + 지하철 옵션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버스를 타고 다양한 지하철 역으로 이동할 수 있으며,  회사 앞까지 가는 지하철 노선이 2개이기에 경로 또한 여러 개였다. 무엇보다 지하철 출도착 시간이 확실하니 정체 구간이 있어도 일단 전철역까지만 가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러나 아침마다 여러 정류장의 버스 출도착 시간을 검색하여 최적의 루트를 선택하는 출근 길이 한편으로는 피곤했다. 그간 숱하게 겪어온 지각 위기 database를 돌려 시간을 계산하고 머릿속에 입력된 열차 출발시간까지 생각해야 했다. 아침부터 선택의 기로라니, 어수선하고 분주하고 불안정하며 초조했다.


이 역시 5분만 일찍 출발해 최적의 경로로만 출근한다면 클리어 될 문제였지만, 비단 출발 시간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최단 경로에는 항상 막히는 구간이 있었고, 거기에서 1분이 지체되냐 아니냐에 따라 지하철 탑승 시간의 운명이 달라졌다. 게다가 발 디딜 틈도 없는 지옥행 열차였다.


정체 없는 길을 선택한다면 버스 정류장까지 꽤 걸어가야 했다. 어느 방법이 나에게 더 유리한지 판단이 서지 않으니 아침마다 망설임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봤다.


훨씬 더 돌아가는 길이라 생각해 아예 옵션에도 넣지 않았던 경로였다.


그날 왜 그 방향으로 버스를 탔는지는 나조차도 의문이다. 이것저것 생각하기 귀찮아서 "지각하면 지각하지 뭐"라고 배짱을 부리기로 한 날이었나 보다.


결론적으로, 코스가 비효율적이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버스 정거장 사이가 짧고 사람도 많지 않아 쾌적했으며, 정체구간 없이 슝슝 달렸다. 심지어 집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이었고, 빠듯하게 출발해도 회사에 도착해 잠깐 산책할 여유가 생길 만큼 소요 시간도 짧았다.


그날 이후는 다른 옵션을 생각하느라 애써 피곤해할 필요가 없어졌다.




퇴직을 결심하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특출 나게 잘하는 분야도, 꾸준히 갈고닦아온 기술이나 능력도 없는 듯했다. 하고 싶은 일의 경우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배우고 터득해야 하니 20년 가까이 보낸 직장 생활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30대 초반이라면 망설임 없이 도전할 텐데"라며 나이만 먹어버린 세월이 야속하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질문하면 할수록,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익숙한 범위 안에서 익숙한 것들만 떠올리며 나를 또 다른 울타리 안에 가두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 지긋지긋한 울타리가 싫어서 뛰쳐나가려는 것이었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일단 머릿속을 비우기로 했다. 그저 루틴을 실천하고, 책을 읽고, 해야 할 것들을 하면서 퇴사하지 않을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보냈다.


그러다 문득, 익숙한 것들에만 초점을 두다 보니 낯설어도 해볼 만한 것은 생각조차 못했던  아닐까?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반대 방향으로 버스를 타본 이후가 아니었을까 싶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연결해보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돈벌이는 그 이후 혹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감사하게도 남편이 경제활동을 하고 있고, 당분간 생활이 가능한 퇴직금이 있기에 경제 활동에 대한 부담감을 지운다면 해볼 만한 일들은 넘쳐났다. 3개월, 6개월 이런 식으로 직업 탐색의 기한을 정하는 것 또한 도전 범위에 한계를 긋는 고착화된 사고 방식일지 모른다.


(설사 반대로 가는 쪽이라도) 나에게 맞는 방향만 제대로 설정한다면 느리게 가더라도, 혹은 돈벌이가 시원치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알아? 오히려 더 최적이고 쾌적할지. 그리고 생각보다 빠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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