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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Jul 22. 2022

화가 나는 본질에 주목하니,  "퇴사"가 보였다.

진짜 이유를 찾으면 진짜 마음을 알 수 있어

화가 난다는 건 내가 비이성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현재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신호예요. 내가 화가 났을 때 화가 나는 이유에 주목해 보세요.

퇴사합니다. 독립하려고요 (김시내 & 최수현)


약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출근하자마자 해외 사업부의 카운터 파트너로부터 메신저가 왔다.

"안녕하세요. 혹시 OO 건은 오늘 입력해주시는 거예요?"


그 전날 분명 시스템에 정보를 등록하고 퇴근했는데 이건 무슨 소리인가?? 바로 확인해보니 입력했던 내용의 일부가 저장이 안 되어 있었다.


그는 이미 어제도 정보 등록 완료 시점을 물어왔고, 나는 어제 퇴근 전에 모두 다 해주겠노라고 호언장담한 바 있으니, 명백한 나의 업무 누락이었다. 출근하자마자 이 일을 해치우고 싶었던 그로서는 출근하자마자 나를 찾는 것이 당연했다.


순간, 약속을 안 지킨 사람이라는 사실에 낯이 뜨거워졌다.  


별 거 아닌 일 때문에 야근까지 했건만, 깔끔하게 완료되지 않은 별 일이 되어 상대방의 업무에 지장을 초래한데다 귀한 오전 시간을 잡아먹는 시간 도둑으로 변모하다니. 가슴에도 불이 나기 시작했다.


"우리 시스템 꾸진 건 알았지만, 욕이 나올 정도로 화가 나요."라고 필터링도 없이 뱉어버렸다. 솔직을 넘어 발칙하게 또라이 같이 화를 냈다.


사실, 이 사람한테 화가 난 건 아니었는데, 욱하는 감정에 상대방을 쓰레기통 삼은 것 같아 다시 낯이 뜨거워졌다. 이내 사과를 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업무에 많이 지쳤나 봐요. 꾸역꾸역 해놨는데 저장이 안 되어 있어서 너무 화가 났어요. 죄송합니다."



누락된 정보를 모두 등록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카페에 들어가 요즘 최애 메뉴(디카페인 오트 화이트 라테, 휴~ 이름도 참 길구나)를 주문하고는 빈 테이블에 앉았다. 마침 비가 오락가락하면서 날씨조차 아무렇게나 구겨져서 막 던져진 느낌이었다. 무턱대고 화를 던져버리고는 그런 내가 싫어져서 더 쭈굴쭈굴해진 나와 닮아 있었다.


멍 때리고 앉아 있다 보니 아까보다는 차분해진 듯했다. 주섬주섬 마음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음의 화살표는 왜 화가 났을까라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조금 전 그에게 사과했던 말 중에, "내가 하고 있는 업무에 지쳤다"라는 대목이 떠올랐다. 화가 났던 건 상대방이 나에게 아직 완료가 안되었냐고 재촉한 것도, 저장이 안 되었던 상황 자체도 아닌 것 같았다.


화를 낸 본질적인 이유는 일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귀찮고 하기 싫고, 하면 할수록 내 시간만 소모되는 이 일을 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었다.


지금 직무는 단지 회사 생활을 연명하기 위해 팀을 옮기면서 선택한 결과였다. 나름 적응도 잘하고 업무 능력도 향상되었지만, 거기까지가 나의 한계였다. 잘 해내고 싶은 의지를 갖고 잘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끼며 일을 하고 싶었으나 회사와 내가 함께 발전하고 싶다는 마인드는 아니었다.


회사에서 나를 보는 시각도 마찬가지였다. 난이도 있는 일을 해낼 때마다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우면서도 막상 미래를 이끌어갈 멤버에서는 배제되었다.


어쩌면 이미 오래갈 수 없는 사이라는 걸 전제로 깔고 서로를 이용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져보기엔 너무 멀리 온 것 같았다. 꼬인 실타래를 풀어보겠다는 열의도 애정도 식어버렸다. 밋밋하고 메마른 섭섭함만 남았다.


그날의 화는, 미래의 빛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저 하루하루 사용되고 있는 삶에 지쳤다는 신호였다. 애착도 기쁨도 없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 애를 쓰는 내가 싫어서 견딜 수 없다는 아우성이었다. 몸 담고 있는 환경이나 관리자들의 인식 또한 변할 수 없으니 애꿎은 곳에 화를 돌렸다는 것도 깨달았다. 근본적인 이유를 찾자 진짜 마음이 보였다.


"화의 본질"에 맞닿으니 다음 스텝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명료해졌다.  1년간 고민과 고찰이라는 핑계로 미루어 온 퇴사의 수순을 밟기로 했다.


도망은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다.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감정에 KO승을 당하지 않기 위해, 회피를 위한 포기 카드를 꺼내지 않기 위해 나를 붙들고 질문해 온 지난 1년의 시간이 이를 증명하고 있으므로.


막상 결정하고 나니 후련하고 홀가분했다. 조직을 벗어나는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상쾌해졌다.

꼬깃해진 마음이 하나씩 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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