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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Jul 30. 2022

이직하시는 거예요? 아니요. 놀고먹으려고요.

퇴사 후 쉼에 대한 저마다의 시선

퇴사 소식을 전하자 동료들은 한결같이 "다른 좋은 곳"으로 옮기는 거냐고 물었다. 


"아니요. 집에서 놀고먹으려고요"

나의 대답 또한 한결같았다.


(근데 생각해 보면 프로 집순이로서, 가장 사랑하는 공간인 내 집이 "다른 좋은 곳"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퇴사를 고민해온 지난 1년 중에 잠시 "지금의 힘듦이 환경 탓"이라면 회사를 옮겨봐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마음에 귀를 기울일수록 회사 인간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시키니까 하는 일은 더 이상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가만가만, 그렇다면 주도적으로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곳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기회를 찾아보지 않는 것은 소심하게, 혹은 너무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장에 나가려면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따져봐야 했다. 경력이 중구난방이기에 관리자로는 이동할 수 없었고, 일반 운영 인력이 되기엔 사회적 통념상 나이가 많았다. 이제는 잠재력이 아닌 결과를 보여줘야 하는 연차 그리고 나이였다.


이대로 이직한다면 어디든 비슷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담스럽고 가성비가 떨어지는 인력이었다. 운 좋게 들어간다고 해도 살아남기 위해 챗바퀴를 돌리며 일에 치여 소외되는 생활이 또 시작될 것 같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나이만큼 명료하고 간편한 기준 또한 없을 것이다. 조직 운영 차원에서는 관리하기 수월한 연차와 나이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평가되는 자신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력서를 쓰는 자체가 귀찮기도 했다. 미룬다는 것은 하기 싫음을 의미했다. 적어도 현재는 내키지 않는 것이었다. 40년 이상 살다 보니 내 성격에 대해서는 빠삭히 알고 있다. 하고 싶거나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기면 나도 놀랄 만큼 에너지가 폭발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아마 이직을 원했다면 이 또한 그랬을 것이다. 일단은 마음 가는 대로 놔두는 중이다. 아직은 애쓰지 않기로 했다.


결론은 이직이 아닌, 충전의 시간을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멋대로,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잘 살아보고 싶어졌다. "잘"이란 경제적인 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단타로 소모되지 않는, 지속적인 성취를 통해 가치를 만들어가는 삶이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요가를 하다 보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다. 마음의 소리가 들리면서 원하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고 다시 실행으로 옮긴다. 현재 그 과정을 반복하고 있으며 느리지만 제 속도로 나아가는 중이다. 그러니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이쯤 되니 놀고먹겠다는 말이 무책임하게 보일 것 같기도 하다. 인생 2막을 찾아 떠난다는 말이, 망상으로 들리려나 싶기도 하다. 직장인들의 상당수가 퇴사를 곧 이직으로 생각하는 것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긴 나도 그랬다. 지금까지 총 4곳의 회사를 거쳐오면서 옮길 때마다 갈 곳을 정해두고 떠났다. 공백이 생기면 가치가 떨어질까 봐 두려왔다. 끝은 시작이어야 했다. 이어나가지 않으면 도태되는 것이라는 생각에 새 둥지를 찾지 못할까 봐 무서웠다. 그 불안을 겪느니 기존 회사에 머무는 삶을 택했다.


일부는 회사가 싫어서 떠난 것이 아니었기에 기회가 올 때까지 남아 있는 것 또한 나쁘지 않았다. 직장인 신분 또한 만족스러워서 굳이 버릴 생각도 없었다.


이제야, 이직하는 거냐고 물어온 동료들의 반응이 이해가 된다. 그들은 아직 만족하고 있는 거구나. 혹은 싫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쉼을 위해 떠나는 건 두려울 수도 있겠구나.


나에게 직장은 멍에와 같은 곳이겠으나 누군가에게는 버팀목이요 울타리일 수 있다. 저마다 더 소중히 여기는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를 응원한다.




퇴사를 며칠 앞두고는 대놓고 놀고먹는 생활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했다.


이에 어떤 이들은 놀고먹으면 심심하지 않겠냐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집에만 있는 시간엔 뭘 해야 할지 모를 것 같다는 반응도 있었다. 유튜브 보는 것도 한계가 있고, 여행이나 쇼핑을 매일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냐며.


이들과 내가 현저한 온도차를 보이는 건, 아마도 놀고먹음에 대한 정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 거다. 


나 역시 동영상 시청과 여행, 쇼핑은 놀고먹는 생활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이 행위들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할 일이 없어서 손가락으로 볼거리를 검색하는 쉼은 재미도 없고 무료하다. 정말 보고 싶은 드라마나 영화가 있을 때만 신나게 즐긴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집순이인 만큼 내 에너지 보존을 위해 자주 가지는 않는다. 쇼핑은 필수품 구매를 제외하고는 진작에 끊었다. 미니멀리즘을 지향하기 시작하면서 쇼핑할 때 드는 시간과 돈이 아까워졌다. 무엇보다도 내게 맞는 스타일을 찾은 이후로는 새 옷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나의 놀고먹음은 고요한 아침 내 다리 위에서 곤히 자는 강아지의 체온을 느끼며 일기를 써 내려가는 지금과 같은 순간이다. 책을 펼쳐 멋지고 아름다운 문장에 스티커를 붙이고 필사해두는 그 시간이 휴식이며, 요가 수련을 통해 호흡에 집중하고 땀 흘리는 때가 쉼이다.


가족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고 수다를 떠는 느긋한 저녁 역시 더 없이 소중한 충전의 시간이다.


지난 1년간 거의 매일 이 일들을 즐기는 중이다. 단조롭지만 할 때마다 마냥 즐겁고 행복하다.


이만하면 놀고먹을 것은 차고 넘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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