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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Sep 22. 2022

퇴사한 개미, "배짱"이라도 부려볼까?

몸이 아파봐야 정신을 차린다. 무리하지 말자고.

"먹기만 해도 배출되는 상황"

(식사 중이라면 송구합니다)


한 이틀은 별일 아닌 아닌 배탈이겠거니 싶어 상비약으로 버텼다. 하지만 차도가 없었다. 결국 병원 문을 두드렸다. 장염이라고 했다. 약을 먹어도 쉬이 낫지 않았다. 아니 낫지 않고 있다.


단단히 탈이 난 것이다.


특별히 이상한 음식을 먹거나 무리한 신체 활동을 한 기억은 없다. 함께 식사를 한 가족들이 멀쩡한 것으로로 보아 음식 탓은 아닌 듯했다. 이틀 정도 야심한 새벽까지 넷플릭스 일드 삼매경에 빠진 날은 있지만 백수의 특권인 낮잠으로 때울 수 있는 정도의 부족이었다. 평소에 하지 않았던 운동이나 육체노동을 한 적 또한 없기에 몸을 혹사시킨 죄도 아니었다.


이제 수십 년째 불량인, 그러니까 소화불량인으로서 체득해온 진리에 주목해본다. 몸, 특히 소화기관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신과 육체는 하나다. 둘을 별개로 취급하면 안 된다"


플라톤 선생의 이 말을 빗대어 생각해보니, 몸이 마음을 못 따라온 것임이 분명했다. 아니 마음이 몸을 기다려주지 않고 또 혼자 달려 나갔다. 몸과 마음의 2인 3각 경기는 늘 이렇게 마음의 배신으로 파탄이 나곤 했다.


자유로워진 시간에 책임을 지고 싶다는 마음, 꾸준히 노력하고 싶은 마음, 다음 스텝으로 빨리 이동하고 싶은 마음, 해내지 못했을 때 자책하는 마음,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하루를 망쳐버린 것 같은 마음에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이 마음들이 매일 악순환하고 있다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해로운 마음들의 되풀이는 나이를 더 먹기 전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면서 시작되었다.


심지어 계절도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낙엽이 떨어지고 첫눈이 오고 그렇게 또 한 살 먹어버릴 것이라 생각하니 오싹해졌다. 이 가을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시간에 구멍이 생기는 것이 두려웠다. 구멍이 성성 난 시간들이 흘러 나이만 먹어버리는 것이 무서웠다.


시간을 잘 보내고 있다는 이미지를 떠올릴 때면 촘촘하고 밀도 높게 짜인 편직물이 연상되곤 한다. 바느질은 봐줄 만 하나 뜨개질에는 영 소질이 없는 내가 뜨개바늘로 한 땀 한 땀 짜 나가는 그림을 그리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생각을 거두라 해서 장면을 쉽게 바꿀 만큼 쿨하지 않다. 어쨌든 누구의 손인지는 모르겠으나 열심히 뜨개질을 해나간다. 하루에 한 "단"을 떠내며 주어진 시간은 24시간이다.




데일 카네기는 자기관리론을 통해 "내일을 맞이하는 최선의 방법은 지성과 열정을 집중해 오늘 해야 할 일을 잘하는 데에 있다"라며 오늘의 충실한 삶을 강조했다. 포인트는 오늘을 잘 살아내기 위한 "집중"을 꾸준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행적 관점에서 봉착하는 문제는 오늘의 충실한 삶이 "오늘만 충실한 삶"이 되지 않도록 완급 조절을 해야 한다는 점인데, 내게 있어 이는 미래 걱정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걱정은 현재에 집중하면 일단 미뤄 놓을 수도 있겠지만(이럴 땐 나의 뇌가 멀티를 하지 못한다는 점에 감사하게 된다) 현재의 페이스 조절은 이게 현재라서 미뤄놓을 수도 덮어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시간 부자의 자가당착이 시작된다.


책을 읽다 보면 끼니를 거르기도 하고 글을 쓰다가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지기도 하다. 밀린 빨래나 가족들 식사 준비에 허둥 대고 밤이 다가오니 마음은 더 바빠진다. 빨리 마무리하고 영어 공부해야지. 책을 더 읽고 싶었는데 자기 전에 꼭 봐야겠다 등 결국 밤늦게까지 To Do를 마치고 나서야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는 뿌듯함이 생긴다. 그 전에도 이미 많은 걸 했음에도 다하지 못하면 듬성듬성 짜인 "단"이라 인식하는 것이다. 오늘의 "단"에 구멍이 나서 전체적으로 모양새가 예쁘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다 할 일을 다 마치고 나서야 보기 좋다고 자화자찬하는 꼴이다.




"충실한 하루"를 보내겠다는 명목으로 만성 개미 증후군이 소생해버렸다.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다 정작 해야 할 일은 야근으로 꾸역꾸역 해내던 개미.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퇴근했을 땐 마음의 짐을 감당하지 못해 체하고 탈 나고 했던 개미. 좋아하는 일과 해야 할 일을 모두 끌어안고 살다 지쳐 차라리 배짱 있게 다 튕겨내는 베짱이를 꿈꿨던 개미. 다 내려놓고 퇴사하는 마당이니 베짱이처럼 늘어지게 쉬어보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개미.

 

하지만 나는 나였다. 퇴사한 들 개미는 베짱이가 되지 못했다.


개미는 곤충분류학적 단계의 강> 목>과> 속>종> 변종에서 곤충강>벌목>개미과다. 반면 베짱이는 곤충강> 메뚜기목>여치과에 속한다고 하니, 개미가 베짱이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고릴라도 생물학적으로는 함께 포유강>영장 >사람과에 포함된다고 하니 개미와 베짱이는 이들보다도 더 먼 사이인 것이다.  


그렇다면 퇴사할 당시의 초심처럼 최소한 배짱은 부려야 하지 않았을까?


그 시작은 "될 대로 돼라" 마음으로 시간을 놓아주는 것이었다. 나이 먹기 전에 뭘 해야 한다는 마음 대신, 더 나이 먹기 전에 나를 되돌아보게 된 걸 행운이라고 여기는 걸로도 충분했다. "보기 좋은 하루"를 만들어가는 대신, 느슨할지언정 꾸준히 나아가고 있는 자신을 응원하는 넉넉함이 필요했다. 올해 안에 목표로 한 것을 1월 1일, 혹은 이 이후에 성취했다 해서 그 간의 과정이 헛되고, 시간이 아까운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몸에 탈이 난 건 결국 촘촘하게 짜내야 한다는 강박이 좀 더 쉬고 싶다는 배짱을 밀어내고 마음의 안방을 차지해버렸기 때문이었나 보다. 안방마님 강박증은 "완벽한 하루"를 보낼 것을 강요하며 이를 "충실한 하루"로 보기 좋게 포장했다. 여기에 깜빡 속아 넘어가는 찰나에, 몸은 배짱에게 "이의 신청할" 기회를 준 것이려나?


완벽에 대한 갈급이 갉아먹은 몸은 이제라도 진짜 쉬어보자고 아우성치는 중이다. 그래서 장염이 쉬이 낫지 않고 있다. 강박이 항복할 때까지.


자, 이제 완벽을 버려보자. 완결, 완성, 완료로 대체해볼까?

아니다.

그냥 "완"을 없애야겠다.

위 문장에서 "완을 없애야겠다"를 없애보니 "그냥"이 남았다.


그럼, "그냥"이 좋겠다.

그냥 하자. 하다 말아도 구멍이 성성 나도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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