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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Dec 02. 2022

4년에 한 번은 미쳐도 좋아

현망진창 월드컵

완전히 무너졌다

자랑스러운 우리 축구 대표팀의 경기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월드컵에 온 시간과 정신을 내어주고 완전히 내려앉아버린 나의 일상을 의미한다.


포백이건 쓰리백이건 최후의 방어선은 구축했어야 하는데 생활이 균형을 잃고 뻥뻥 뚫리고 있다.


대표팀의 경기는 물론 준비 과정, 프리뷰나 후토크 등 전문가들의 분석, 훈련 모습과 해외 이적 시장에서의 가치, 그리고 다른 나라 대표팀의 경기력이나 결과까지 하나하나 챙겨보다 보니 어설프게나마 지탱해온 루틴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백수가 된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국제 스포츠 대회였기에 오롯이 즐길 수 있겠다며 내심 기대하긴 했다. 솔직히 벼르고 벼렀다. 직장인 시절 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스포츠 축제를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건 늘 아쉬운 일이었으니까. 이제는 남는 게 시간이기에 새벽 4시 경기도 볼 수 있게 되었단 말이다!


하지만 생활 리듬을 완전히 빼앗길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도 훈련해왔고,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을 구분하는 힘도 길렀으며, 나의 선택과 결정이 낳는 계획과 실천, 행동에 대한 책임감이 커졌기에 일상을 견고하게 지킬 자신이 있었다. 물론 흥분과 설렘을 감출 수는 없겠으나(좋아하는 것을 할 때면 흥을 주체하지 못하는 타입), 평소보다 조금 더 기사를 검색하고 영상을 시청하는 정도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완전한 착각이었다.


1990년 월드컵부터 국가대표의 모든 본선 경기를 챙겨본 만큼 해당 기간 나의 심경 변화에 대한 데이터 베이스를 돌려보자면, 대개의 패턴은 1차전 전의 설렘 -> 1차전 후의 아쉬움 -> 2차전의 실망 (참고로, 2차전에서는 우리가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으로 이어지곤 했다. 따라서 시작은 늘 설레지만 미리미리 수비벽을 쌓고 실망할 태세를 갖추게 된다. (물론, 2002년 월드컵은 제외한다. 심지어 이 때는 일본 유학 시절로 매일매일 가슴이 웅장해지곤 했다) 2차전 종료 후에는 현실로 돌아올 채비를 하고, 3차전의 아름다운 마무리로 나 역시 완전히 일상으로 복귀하는 수순이었다.


우리나라의 탈락 이후 남은 기간에도 경기 결과나 응원하는 선수의 활약에 주목하긴 하지만, 틈틈이 확인하는 정도이기에 일상에 방해를 받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이미 2차전이 끝난 지금과 같은 시점에는 관심은 두되, 열기는 빠진 상태여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오히려 2차전이 끝난 이후 응원하는 마음은 더욱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과정은 좋았으나 결과가 아쉬운 경기들이었던 만큼 미련과 희망이 뒤섞여 1승 혹은 16강에 대한 간절함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새벽 3시까지 영상을 보다 잠에 든 날도 있었다. 당연히 다음날은 피곤하고 졸려서 맥을 못 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에 또 영상을 보거나 기사를 검색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현망진창


덕분에 요가는 하루 10분 스트레칭으로 마무리하고 일기는 이틀에 한번 꾸역꾸역 쓰고 있으며 독서모임의 책은 아직 다 읽지도 못했다. 서평은 이미 지난주 일요일이 마감일이었으나, 한참 지난 지금도 마무리하지 못한 상태다. 오늘처럼 시간이 많은 날에라도 책을 읽어야 하는데 솔직히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책을 몇 장 넘기지 못한 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머리로는 충분히 알겠는데, "월드컵을 향한" 마음이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모양새다.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던 와중에, "이게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죄책감을 가질 일이야?"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고작 1~2주 일탈했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은 이성이 GG를 외쳤다. 마음의 승리다.


축제를 오롯이 즐기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인정하고 나에게 통 크게 휴가를 줘버리기로 했다. 밤을 새워가며 유튜브를 보거나 알고리즘에 이끌려 무한 탐닉하는 것만 자제한다면 이 추운 겨울날 따뜻한 방구석에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멋진 휴가"를 보낼 수도 있는 것이다.


퇴사 이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요즘, "행복"이라는 감정이 선명하게 다가오고 있다. 대충 보고 지나치거나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소소한 것들에 눈을 뜨며 작은 것 하나에도 활력을 느낀다. 예전에 좋아했거나 새롭게 흥미를 느꼈던 것들에 본격적으로 도전하며 밝게 웃고 있는 나 자신이 꽤나 마음에 든다. 월드컵은 그 행복감을 더욱 증폭시키는 멋진 이벤트인 만큼, 잠시 흠뻑 빠져드는 것쯤은 너그러이 봐주기로 하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도 아닌, 4년에 한 번인데 굳이 자제할 필요는 없다. 평소에 해외 축구를 즐겨보는 나로서, 일부러 거리를 두고 흔들림 없이 살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게다가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만끽하며 푹 빠졌을 때 에너지를 얻는 유형이니, 애써 억제해 봤자 능률도 안 오르고 마음만 불편하지 않겠는가?


결론은 죄책감 따위 갖지 않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즐겨보자는 것!


다만, 축제가 끝난 후 원래 제자리로 조속히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부터 자기 암시를 해보려 한다.

나는 나를 믿는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ㅋㅋㅋ


P.S. 오늘 밤 16강의 기적이 일어나길 기원합니다!!


) 이겼어요 이겼어!!

크~ 대박입니다 ^^

이로써 저의 현망진창 일상은 좀 더 연장이 되겠네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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