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내게 있어 이별이란 질척거리는 남녀 사이에서 더이상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에나 입에 올리던 말이었다(그조차 약 20년 가까이 된 일들이다). 그래서일까? 사랑이라는 단어가 입가에만 맴돌았던 아빠와의 마지막은 너무도 낯설고 생소했다.
내 나이 이제 40대 중반이니 앞으로도 이와 같은 생경한 이별을 몇 번쯤은 더 마주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마다느낌은 새로고침하 듯 새로울 것만 같다. 지구인에게 이 감정의 공기는 마치 외계에서 온 것처럼 영원히 낯설 테니까.
몇 년 전부터 아빠의 몸은 서서히 나쁜 병으로 잠식되어 갔다. 입원 주기도 점점 짧아져서 처음에는 1년 반이던 것이, 1년, 반년, 그리고 2달로 줄었다. 입원할 때마다 퇴원하는 모습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당신 발로 걸어서 병원 문을 나섰지만, 그다음에는 작은 가방조차 들지 못했고,이어 누군가의 부축을 필요로 했으며, 마지막에는 휠체어에 앉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삶에 대한 의지를 저버리지는 않았다. 의학 기술이 발전해서 이런 몹쓸 병도 호전될 수 있음에 감탄했고, 정성껏 진료하는 의료진에도 무한한 신뢰를 보였다.
투병 기간 동안 아빠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감히 알 수 없다. 아빠가 그만큼 잘 견뎌냈고 잘 참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덕분에 가족들은 난치병인 걸 알면서도 아빠는 의지력으로 극복하거나 수명 기록을 갈아치울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나역시 통계적인 기대 수명 따위는 먼 나라 이야기로 취급하며 아빠는 유병장수할 양반이라 생각해 버렸으니까.
응급실에 실려가기 전날, 아빠는 평소처럼 엄마와 화투놀이를 했다(부모님은 노년에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화투나 오목, 알까기 등의 소소한 놀이를 즐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마이날도 아빠는 상대방의 수를 내다보는 특유의 얄미움으로 엄마를 약 올렸을 거다. 아빠는 올 설날, 딸들 내외와 둘러앉아쓰리고와 흔들기 등등을 연발하며 내리 13판을 휩쓸어버리기도 했다. 씩씩거리는 나를 향해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웃기만 하던 그날의 표정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이별 이틀 전, 아빠는 더 악화될 경우 연명 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서명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연신 눈물을 흘리는 엄마와 달리 아빠는 의연하고 덤덤한 모습이었다. 의료진들이 내민 종이 쪼가리에 떨리는 손으로 사인을 하면서 삶의 끝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목숨이 붙어있는 한 저버리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빠는 마지막까지 한 번이라도 더 숨을 쉬고 싶어 했으니까. 살길 바랬지만, 살고 싶었지만 살려달라고 아우성치지 않았던 아빠의 고독한 마음을 가늠할 수가 없어 더 가슴이 아프다.
그날 오후, 아빠는 엄마와 태연히 텃밭 이야기를 나눴다. 계절 따라 심을 씨앗과 올해 김장 거리를 말하며 삶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아니, 희망이라는 거창함은 아니었다. 삶을 굳이 희망과 절망으로 쪼개지 않고 이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물론 중간중간 호흡이 힘들어져서 고통스러운 순간들은 있었지만 말이다.
이별 전날 밤, 아빠는 평소대로 야구 경기를 봤단다. 그날은 마침 아빠가(그리고 내가) 응원하는 팀이 10회 말에 통쾌한 역전승을 거두던 날이기도 했다. 아빠는 평소처럼 더럽게 못한다고 비난하다가도 동점홈런에, 그리고 역전 적시타에 "앗싸 이겼다~ 와 짜릿하네~!"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볼을 씰룩댔을 것이다. 안 봐도 뻔한 아빠의 표정이 눈앞에 선하다.
그리고 자정이 넘은 시각, 평범하게 기뻐하고 화를 내고 환호하는 하루를 보냈던 아빠는 거짓말같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우리에게 더 이상 벌름거리는 콧구멍을, 씰룩거리는 볼살을 보여주지 못한 채 먼 여행을 떠났다.
마지막 순간 아빠의 고통은 짧고 강렬했다. 고통의 순간을 붙잡자니 아빠가 너무 고통스러웠고, 빨리 지나가길 바라자니 이별은 가까워졌다. 끝까지 의연했던 아빠는 빠른 이별을 선택했다.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아빠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해 보였다.
아빠와의 이별을 마주하며 한없이 슬프고 무기력하다가도 한편으로는 한없이 초연하고 강한 마음이 생기기를 반복했다. 죽음이라는 것은 원래 이리도 모순적인 것일까? 살아있는 나는 그 심오함을 잘 모르겠다. 아마 끝까지 모를 수 있다.
다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이런 모순이 소름 끼칠 만큼 삶과도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아빠라는 단어만 봐도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가도 하찮은 것에 웃음을 터뜨리는 나를 발견할 때면 삶이란 원래 이리도 모순적인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마치 어제를 살 듯 오늘을 살다 떠나버린 아빠의 그날 역시 모순이었다. 하지만 삶의 끝까지 좋아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보고 즐기며 현재를 살았던 아빠의 그날은 지극히 평범하고 평온했기에 더없이 가치 있고 아름답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