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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May 30. 2023

아빠 없는 아빠 생일

내가 이별하는 방식

아빠는 팔순을 불과 20일 앞두고 세상과 영원히 이별했다. 그리고 오늘이 아빠의 팔순일이다.


이달 초 아빠가 응급실에 실려가자마자 "팔순"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마침 언니와 팔순 잔치에 대해 의논하던 무렵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거동이 불편했기에 식구들끼리 친정에 모여 밥을 해 먹고, 기념 수건이라도 제작해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로 이야기가 되었다.


수건은 생신 열흘 전쯤 제작하는 걸로 계획했지만 하루하루 아빠의 상황이 악화되자 마음이 급해졌다. 미리 수건을 만들어 놓기로 했다. 아빠가 꼭 퇴원해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셨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았다. 아빠가 반드시 병을 이겨냈으면 하는 희망도 담았다.


의뢰하자마자 업체에서 시안을 보내줬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자꾸만 아빠가 팔순을 함께 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이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언니와 통화하다 전화기를 붙잡고 울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자매는 비슷한 꿈을 꾸었고, 함께 아빠의 절망어린 목소리를 들었다. 기적은 멀어져 가고 있었다.


"멋진 울 아빠 사랑해요!"라는 말이 새겨진 수건은 끝내 아빠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수건에 새겨진 말은 영원히 슬픔으로 남았다.




지난 일요일, 아빠가 쉬고 계신 추모원에 다녀왔다. 손주들이 "HAPPY BIRTHDAY"라 적힌 카드에 손 편지를 써서 아빠의 생신을 축하드렸다.


우리는 애써 웃음을 지었지만, 우중충한 날씨가 더해져 미소는 가늘게 떨렸다.


추적추적한 날씨 탓에 상실은 더욱 선명한 현실로 다가왔다. 아빠가 눈을 감던 날, 육신의 몸을 하고 우리와 마지막 이별을 하던 날, 그리고 영원히 하늘로 올라간 날 3일 내내 날씨가 너무 좋아서 믿기 힘든 현실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었던 것과 대비되어 기분이 묘했다.


엄마는 며칠 전부터 아빠가 없어도 다 같이 밥을 지어먹고 싶다며 음식을 준비했다. 반찬은 주로 엄마가 아빠와 도란도란 앉아서 먹고 싶었을지 모를 평범한 것들이었다(손주들을 위한 갈비구이는 있었지만). 아빠를 떠올리며 먹을 수 있는 이날의 밥상이 한없이 소중했다. 늘 입이 짧아 타박을 듣던 내가 평소 같지 않게 두 공기를 싹싹 비워냈다.


밥상을 치우고 난 후 엄마는 아빠 시계를 들고 나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이거 줄만 바꿔서 내가 차 보려 하는데..."


수십 년간 보아온 시계였다. 집안에 걸린 가족 사진마다 아빠는 이 시계를 차고 있었다. 환한 웃음과 함께.


"어, 근데 시계가 멈춰있네요."


중학생인 둘째가 말했다. 시계와 함께 아빠의 시간도 멈춘 것 같아 서글퍼졌다. 엄마가 시계를 멈추지 않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엄마. 조금 남자 거 같긴 하지만 줄 바꿔서 써봐요. 이거 아빠가 좋아했던 거잖아."




친정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기에 이불과 베개를 꺼냈다. 언젠가 아빠가 사용했을지도 모를 이불을 깔고 베개를 베고 누워 있자니 아빠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애써 냄새를 맡지는 않았다. 당신의 향기가 슬픔으로 돌아오는 건 두려웠다. 내가 이별하는 방식은 애써 추억하는 것도, 애써 외면하는 것도 아닌 잔잔한 밀려듦이었다. 마치 파도가 왔다가 물러가다반복하는 것처럼.


이튿날 아침에는 아빠가 쓰던 샴푸로 머리를 감았다. 시니어 전용 샴푸라서 향기나 텍스처가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쓸만했다.


주방 팬트리에는 아빠가 드시던 보틀형 선식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엄마, 이거 맛있어요?"

"아니, 아빠가 맛이 없다면서 안 드시더라고."

"그럼 내가 가져갈게."


음식이나 물건들에 아빠의 흔적이 남아서 애써 먹거나 사용하려는 건 아니었다. 당신이 없는 허전함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지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일 뿐이다.


당신이 드셨을 반찬을 아무렇지 않게 먹고, 수 십 년간 차고 다니던 시계를 눈물 없이 마주하고, 마지막까지 사용하던 샴푸도 한번 써 보고, 맛없다고 투덜대던 간식도 그냥 한번 먹어보는 거다.


하지만 아직 수건은 제대로 꺼내보지도 못하고 있다. 언젠가 무뎌질 날이 오겠지.


덧) 아빠! 그렇다고 해서 아빠를 잊는 건 아니니까 너무 섭섭해하지는 말아요!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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