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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Oct 19. 2023

발레를 다시 배울 날이 올까?

비움이란 완전히 과거로 흘려보내는 것

드레스룸 한편에서 잠자고 있던 가방을 발견했다.


'OO 무용 스튜디오'라고 인쇄된 에코백에는 레오타드 스커트, 발레 슈즈들어 있었다. 오랜 시간 가방 안에만 있었던 탓에 텁텁한 냄새가 났지만, 레오타드의 보들보들한 촉감은 예전 그대로였다. 구멍이 날 만큼 닳고 닳은 슈즈에는 그때의 열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8년 전 가을. 학원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30대 중반에게 발레 피트니스나 필라테스와는 한 차원 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지금 막 초등부 수업이 끝난 참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여는 순간, 하얀 레오타드를 입은 요정들이 내 쪽을 향해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반짝였다.


그날부터 아무튼 발레가 시작되었다. 왜 하필 발레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발레가 몹시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몸뚱이는 이미 삐걱거리는 30대인 데다 댄스를 비롯한 몸 쓰기에는 영 소질이 없던 나는 첫날부터 하염없이 흐르는 좌절의 피땀눈물을 마주하게 된다.


발레 학원에 갈 때마다 거울 속에는 사람 모양을 한 막대기가 하나 서 있었고, 때로는 각설이가 되어 흐느적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꾸준한 노력은 배신을 모른다 했던가?


한 두 달 고비를 넘으니 조금씩 안되던 동작이 되기 시작했다. 희미하나마 배에는 11자 복근이 생겼고, 웬만한 발레 용어에도 익숙해졌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출근길 발걸음부터 달랐다. 하루 종일 발레 학원에 가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거울 속의 낯선 내가 점점 더 사랑스러워졌다.


3년 차쯤 되었을 무렵. 원장 선생님으로부터 공연을 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내 실력에 언감생심이었지만 이때가 아니면 언제 무대에 설 일이 있을까 싶어 냉큼 도전을 결심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지못했으나,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긴장한 탓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부드럽게 이어져야 할 동작이 맥없이 끊기는 등 실수야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무사히 하나의 작품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자체만으로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그 밑바닥에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의 시간을 쌓아 올렸던 내가 있었다. 서른 이후에, 맨 땅에 헤딩하고 부딪혀서 이 정도의 결과를 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적이 있었을까?


여전히 발레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드레스룸에서 발레 가방을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던 것은 이 기억들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는 소망과 맞닿아 있는 듯 하다. 수 년간 발레와 함께한 시간들, 꾸준한 노력이 만들어 낸 기쁨, 무대에서의 희열은 평생 나를 춤추게 할 것이다. 그러니 발레 널 잃을 수 없어.


하지만 추억에 대한 회상도 잠시, 현실로 돌아오자 문득 나의 양면성을 겨냥하는 질문에 봉착하게 되었다. 발레를 그렇게나 사랑한다면서 왜 가방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 방치한 걸까? 왜 그 안의 레오타드와 슈즈는 매캐한 냄새가 날 때까지 내버려 둔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질문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 발레를 다시 시작할 것인가?'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발레를 그만두었고, 뭐라도 운동을 해야 하지 싶어 홈 요가를 시작했다.


발레와 마찬가지로 요가의 기본은 스트레칭과 바른 자세이기에 어렵지 않게 입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요가는 내 삶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매일의 일과로 자리하고 있다. 발레의 기억은 여전히 찬란하지만 지금 당장 요가를 그만두고 발레를 할 만큼 절실하지는 않다. 현재의 나에게 요가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잃고 싶지 않다.


과거 나는 열정과 도전을 갈망했을지 모르겠으, 지금의 모토는 균형과 자유다. 내게 있어 발레가 열정과 도전의 상징이었다면 요가는 균형과 자유를 표방한다. 그러므로 요가와 발레 중에 무얼 선택하겠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요가라고 대답할 것이다.


더욱이 발레의 지향점은 외면의 아름다움이다. 손 끝에서 발끝까지 내 몸이 아름다운 곡선이 되도록 완성도를 더해야 비로소 가치를 발한다. 반면, 요가의 경우는 오히려 나의 한계를 인식하고 거기에서 멈춘다. 애쓰지 않고 욕심부리지 않는다. 그저 여기까지 다다른 나를 수용하고, 무리하지 않으며 온전히 받아들인다. 요가야 말로 내가 걸어가려는 삶에 가깝다.


둘 중에 무엇이 더 우월하거나 옳음을 논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지금의 나에게 더 어울리는 쪽을 찾아가려는 것일 뿐.


내가 소중히 하는 건, 발레에 진심이었던 지난날의 나였지 레오타드와 슈즈가 아니었다. 게다가 당장 사용할 계획이 없다면 물건의 의미는 이미 퇴색된 것이다. 좋은 기억과 그 안에 숨 쉬고 있던 나 자신을 영원히 간직하는 건 물건이 아닌 스스로의 마음이다.


발레 가방과 그 안의 물건들을 비워내기로 했다. 그 결심에는 현재의 나에게 있어 더 가치로운 것을 분별하고, 지금을 더 잘 살아내고 싶다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야 만날 수 있는 것들을 완전히 과거로 흘려보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꼭 물건이 존재해야만 추억이 가치로운 것은 아니다. 기억만으로도 과거 충분히 빛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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