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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블랙기업에 취업한 거야?

45세, 열정페이, 영어학원

by 소소라미 Sep 7. 2025

지난 1월, 영어학원에 취직했다. 뜬금없이.


간단히 나의 이력을 소개하자면 공기업 몇 년과 스타트업 몇 년을 거쳐 나름 유명하다는 식품기업에 몸을 담았던 있다.


마지막 회사에서 극심한 번아웃을 겪고 이에 수반된 불면증과 소화장애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제 발로 사문을 열고 나왔다. 다시는 조직이라는 곳에 소속되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과 함께.


영어학원이 뜬금없는 이유는 그간 나의 인생과는 어떤 접점도 없는 데다 이곳도 나름의 조직이라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영어를 잘 못한다는 사실 때문일 테다.


교육업이라는 넓은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희미한 연결고리가 있긴 하다. 회사를 그만두고 몇 달간 일본어와 역사 과외 해본 적이 있으니.


입사일, 실장은 내게 붉은색 목줄을 하나 건넸다(사원증이라 불리는 그것). Desk Team Manager. 새로 맞이한 소속과 직함이 반가울 법도 했건만, '일자목이라 목줄은 좀 불편한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색 듯 목줄을 어루만지며 근로계약서를 쓰기 위해 원장실로 들어갔다.


연봉은 면접 자리에서 이미 구두합의한 바 있기에 그 숫자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다만, 그 아래에 조악하게 쓰인 상세 내역들 - 기본급 시간당 10,030원과 연봉에 포함된 각종 수당-에 시선을 빼앗겨버렸다. 찰나인지 엉겁인지 모를 그 시간 동안 원장의 식상한 조언 - 직장 내에서는 소통이 중요하다는 둥, 디테일과 속도가 생명이라는 둥-은 귓등을 스쳐갈 뿐이었다.


연봉에는 시간 외 근무수당과 연차수당, 휴일근무 수당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는데 20년 직장 역사에서 연봉에 연차와 휴일근무 수당이 들어가 있는 것은 처음 목도하는 광경이었다. 시간 외 근무수당을 따로 주지 않는다는 것 역시 21세기 초반에 잠시 몸담았던 회사에서나 보았던 듯했다.


그리고, 이는 45세 열정페이 시대의 서막을 미했다.


덧붙여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이곳에서는 내 전임자들이 근속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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