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녀의 유니크한 회의 방식

ASAP과 DETAIL

by 소소라미

교육업. 학원. Desk 업무.


새로운 커리어의 시작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을 둘렀지만, 솔직히 이 중 어느 것 하나에도 익숙해지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유독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이 하나 있었니.


이곳의 회의 방식은 상당히 독특했다. 카톡방에 "지금 모이세요"라는 지령이 떨어지면 즉시 답글로 "네! 알겠습니다"라는 워딩을 남기고, 곧바로 수첩을 챙겨 원장실로 향한다. 그리고 전원이 모일 때까지 그 앞에서 대기한다. Desk Team 멤버는 총 4명. 대표가 2개의 학원을 함께 운영하기 때문에 Desk Team 역시 두 곳이며, 정규직은 각각 2명씩이다.


팀원들이 모이면 줄지어 원장실로 들어가서는 그녀의 책상 앞에 다닥다닥 선 채로 한 손에 수첩을 들고 그녀가 속사포처럼 쏟아붓는 말을 빠르게 적어나간다. 그 짧은 시간에 20개가 넘는 지령이 이어질 때도 있고, 말을 받아 적는 것이기에 내 글씨를 내가 알아보지 못해 짜증이 나는 경우도 왕왕 생긴다. 내용을 전달하기 바쁜 원장은 우리가 적어나가는 속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일단, 기립 상태로 불안정하게 수첩을 받치고 메모하는 방식에 자못 놀랐다. 물론 이전에도 상사의 호출에 간단히 업무 지시를 받아 적은 적은 있지만 한 번에 20개가 넘는 to do list를 전달받은 기억은 없다. 따로 일정을 정하지 않고 "지금 모이세요"라는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팀원들의 태도 역시 어메이징 했다. 어느 날은 막 화장실에 가려는 찰나에 긴급회의가 소집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빌어먹을 '긴급회의'가 하루에 서너 번이 넘는 날도 있더랬다.


회의 마무리 멘트는 늘 한결같다.


"그런 줄 아시고, 신속 디테일하게 보고 하세요."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신속과 디테일이 이렇게나 조화로울 수 있는 말들이었나? 나의 경험으로는 충돌 개념에 가까웠단 말이다. 둘 중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기에 기회비용이라는 것이 생성되어 버리는...


게다가 기존에 내가 경험했던 것들은 미팅 시간을 사전에 함께 정하거나 상사가 일방적으로 일정을 통보하다라도 스케줄이 충돌하지 않도록 최소한의 배려는 해주는 방식이었다. 지정된 회의실이 있었으며 참가지 들은 회의 5분 전부터 노트북이나 수첩을 지참하여 착석한다. 회의에 앞서 급한 용무를 해결하고 최소한 화장실에 다녀올 시간은 있었거늘.


과거는 돌아보지 말자, 모두 내 선택이었고, 지금 맞닥뜨린 - 그러니까 화장실을 참고 수첩에 미친 속도로 심지어 개발새발 받아 적고 있는 - 현실 역시 나의 과거들이 쌓아 올린 결과물인 것이다. 누구 탓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내 탓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 또한 내 미래를 위한 한 줌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회의가 끝나면 각 지시 사항에 대해 수행 후 보고를 하라는 카톡 메시지가 온다. 그리고 팀원들의 완료보고들이 이어진다. 갑자기 소름이 돋기 시작한다.


헉, 오늘 안에 다 하라는 소리였어?


당황하는 사이에도 전화는 자비 없이 빗발친다. 숙제 문의, 결석 연락, 특강 신청 등 밀려드는 전화에 대응하고 통화 기록을 남기고 Follow Up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와중에 원장의 독촉은 계속된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날이었다. 퇴근 후 약 1시간이 지났을 때, 카톡 알림이 왔다.


"아까 말했던 거 왜 다들 보고 안 하고 퇴근했어요?

내일 오자마자 보고하세요"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답글이 달린다.


"네! 알겠습니다."


순간 다시 소름이 돋는다. 호흡을 가다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막(하릴없이 소극적이지만)을 선택하기로 한다. 카톡 방해금지 시간을 좀 더 당겨서 설정해 놓는 것. 알림이 울리지 않는다면 굳이 보지 않을테니 대답할 필요 또한 없어니까.


마음이 한결 편안해는 기분이었다.

keyword
이전 01화나, 블랙기업에 취업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