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단표, 금값, 일류
지난해 10월, 문득 마이너스 통장 잔액이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솔직히 말해, 어렴풋이 재무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건 눈치채고 있었으나 굳이 들춰내지 않은 채 피해왔다고 하는 쪽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어려운 문제나 힘든 상황에 직면할 때 일단은 도망치고 싶어 지곤 하니까.
그 당시 나는 소득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남편의 소득이 늘어난 것도 아닌 상황에서 아이들의 사교육비는 이미 오래전부터 급증하고 있었다. 여기에 카르페디엠(Carpe Diem)을 외치며 해외여행을 남발하고, 예상치 못한 의료비 이벤트들이 겹친 영향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소득 변화 없이 마이너스만 더해졌기에 잔고가 수직선의 좌측으로 이동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가 절약할 수 있는 항목의 우선순위를 정해 보기로 했다. 사교육비를 갑자기 줄일 수는 없으니, 결론은 식비였다.
월단위 예산을 짜서 외식 횟수를 급감시키고 주 단위 식단표를 만들고 실천했다.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것은 스스로도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야인 만큼 그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식비를 엄격히 통제한 덕분에 악화일로의 가계 상태는 잠시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이벤트들이 다시 발생할 경우(물론 해외여행은 당분간 가지 않기로 합의했음) 그땐 무엇으로 방어할 것인가?
때 마침 미 대선 여파로 갑자기 금값이 치솟기 시작했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금시세를 검색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무언가에 홀린 듯 돌반지와 금붙이 몇 개를 싸들고 금은방에 찾아갔다가 "이 또한 임시방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번뜩 들어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오기도 했다. 팔지 않았다는,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로 팔고 나올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쿠팡 단기 계약직을 비롯해 공기업 계약직, 경력 관련 직무 등에 지원하며 재취업에 나섰으나 줄줄이 낙방이었다. 좌절할 틈은 없었다. 문은 반드시 열리게 되어 있다는 신념 하나로 살아온 인생 아니던가? 문이 어디에 있는지만 찾으면 된다. 심지어 문이 아니라고 생각한 곳에 문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학원 차량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내용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래, 학원!
도보 10분 거리에 학원가가 있고, 어쩌면 그중 어느 한 곳에 내가 앉을 수 있는 책상이 있을지도 모른다.
다짜고짜 채용 중인 동네 모든 학원에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이력서 작성 과정에서 그간 해왔던 일들과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억지로 논리를 만들어 끼워 맞추는 것은 나의 두 번째 재능이었다. 운 좋게도 2곳에서 연락이 왔고, 원어민 영어 학원이라는 것에 이끌려 지금 이곳을 선택했다. 영어라고는 토익 공부를 한 기억밖에 없는 주제에 원어민들과 함께 일을 한다는 자체가 신선했던 것이다. 나의 세 번째 재능은 새로운 도전을 즐기며 반드시 성취를 얻어내고 만다는 점 아니었던가?
입사 3일 차, 퇴사의 기로에 섰을 때 내가 찾은 해답은 이것이었다. 아이들 학원비를 벌기 위해 학원에 취업한 꼴이지만, 돈을 받으면서 실전 영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환상적인 기회라 생각하자.
그리고, 99% 정도 다시 마음을 돌렸을 때 아들의 한마디가 나를 완전히 일으켜 세웠다.
엄마, 힘들 때 웃는 사람이 일류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