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특강, 질문금지, 의자
입사 3일 차. 이곳에서의 첫 금요일, 퇴근 시간을 2시간 앞두고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월요일부터 방학 특강 시작인데, 어떻게 근무할 건지 시간표는 짰어요?"
잠깐. 방학 특강은 뭐고 시간표는 또 뭐야?
전혀 어렵지 않은 단어들의 나열이었으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기도 했다.
"네 원장님, 일단 첫날에는 다 같이 9시에 출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셔틀 탑승이 9시 20분부터 시작되니까 이슈 생기면 바로 대응해야 해서요. 원어민 선생님 중에 방학 특강 처음 하시는 분들도 계시니 지원할 일도 생길 거고요. 학생 수가 꽤 되어서 11시부터는 급식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런 부분들 다 고려해서 스케줄 의논 후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 학원에서 가장 오래 근무한 Amy의 대답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명쾌했다. (원어민 영어학원이기에 직원 모두 영어 이름을 사용한다. 다만, 앞으로 등장하는 이름은 모두 실제 사용하는 이름이 아님을 밝혀둔다)
"좋아요. 나머지 준비 사항은 아까 Jane 부장이 보고해서 내가 다 알고 있으니, 근무 스케줄만 바로 의논하고 보고하세요."
Desk Team 멤버들은 곧바로 원장실을 나와 라운지 테이블에 둘러서서 서로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고 일사천리로 합의에 이른 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첫날은 다 같이 9시에 출근하고, 둘째 날부터는 수업이 일찍 끝나는 A관은 9 to 8, 고학년 및 중학생 위주의 B관(10시에 수업 종료, 내가 소속된 곳)은 11 to 10으로 근무한다.
물론 나는 합의한 바 없다. 방학 특강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니 이 모든 대화의 현실성에 대한 의문만 제기되는 상황이었다.
보고가 올라가고, 원장의 승인이 떨어졌다.
얼떨떨했지만, 그날 안에 해결해야 할 일들이 여전히 산더미었기에 이들부터 처리한 후 자초지종을 알아보기로 했다.
퇴근 30분 전, 옆자리 사수 - 실장이라 불리는 그녀 - 에게 넌지시 물었다.
"방학 특강이라는 게 있었어요? 그리고 제 근무 시간은 1시부터 10시로 되어 있는데 11시에 출근하면 시간 외 근무수당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연봉에 포함된 시간 외 근무 수당이 설마 이거였을까요?"
"다음 주부터 4주간 방학 특강이 있고, 오버타임 수당 같은 거 없어요. 여긴. 그리고 매니저님은 월요일에 9시에 나오지 말고 11시에 와요. 일찍 와봤자 별로 도움도 안 될 테니까."
그렇다면 4주간 11시까지 나와서 2시간 무료 봉사를 하란 의미란 말인가? 앞서 의문을 제기했던 현실성은 리얼리즘 그 자체였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이는 순간 실장의 발언이 이어졌다.
"그리고 매니저님, 업무 태도가 왜 그래요? 뭐 하나를 가르쳐주면 '네' 대답만 하고 하면 되는데 왜 자꾸 질문을 하냔 말이에요. 그리고 도대체 왜 의자는 바짝 당겨서 안 앉는 거예요? 내가 지나다닐 수가 없잖아(그녀의 자리는 나보다 안쪽에 있음). 그동안 어디에서 뭘 하다 왔는지 몰라도 여긴 특별한 곳이에요. 학원 일 모르면 잠자코 그냥 배워요. 시간 외 근무 수당 이런 거나 따지지 말고."
"실장님, 제가 미숙한 건 맞아요. 하지만 맥락이 이해되어야 일을 할 수 있어서 자꾸 질문하게 되나 봐요. 죄송합니다."
이후 퇴근 시간까지 우리는 어떤 대화도 섞지 않았다.
원투펀치에 마무리 스트레이트까지 제대로 맞은 상황. 빨리 퇴근 시간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데다 모두가 당연시 여기는 시간 외 근무. 그리고 일에 대한 선후 관계 설명도 없이 질문도 하지 말라는 사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게다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지 않았던 건 급한 거 마무리 짓고 바로 일어나기 위함이었으며, 심지어 당겨 앉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 지적을 하기 전에 본인이 왜 쉽게 지나다닐 수 없는지를 돌아본다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근로 계약서를 다시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연봉에 포함된 각종 수당 설명 아래에 "갑은 을에게 근로 시간 외의 근무를 요청할 수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내가 놓친 부분이 또 있었던 것이다. 명백히.
불합리한 근로 조건과 멸시가 동반된 상황에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입사 3일 차, 퇴사의 기로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