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아노, 짝사랑
대학 시절 일본어를 전공했고 일본 교환학생 1년의 경험이 있다. 한 때 일본 문화에 심취했던 만큼 일본어를 매우 좋아했다.
이력에 비해 그리 잘하지는 못하지만. 종종 드라마나 영화, 음악을 들으며 끈을 놓지 않고 살아왔다.
운 좋게도 그동안 일본어를 활용해서 일할 기회가 많았다. 내가 몸 담았던 회사들에는 이상하리 많지 일본어 구사자가 별로 없었다. 일본어 전공자라는 이유만으로 번역과 통역, 일본사업부 관련 업무를 맡게 되었고, 늘 그랬듯 처음에는 지지부진하다가 그 업무나 업계에 익숙해지는 데에 비례해 일본어 실력이 일취월장하곤 했다. 그러다 그 일을 그만두면 다시 그저 그런 수준이 되는 패턴이 반복.
잊힐만하면 생각나고 설레는 마음에 푹 빠졌다가 다시 잊히다, 영원히 잊지는 않기 위해 들춰보게 되는 일본어는 마치 첫사랑을 닮았다.
핑계지만,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영어 공부는 등한시해 왔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멋지고 부럽다고 느꼈으나, 거기까지였다.
언젠가는 잘하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뿐, 본격적으로 달려들어본 적은 없다.
그런 내가 덜컥 원어민 영어학원에 취직해 버렸다.
다행히 처음 며칠은 원어민들이 굳이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은 데다 업무 파악에 몰두했기 때문에 실전 영어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이후에도 복사 또는 잠시 교실 지도 해달라는 간단한 부탁정도가 다였으니 뭐 이 정도는 대응할 수 있겠지 싶었다.
하지만, 그날이 오고 말았다.
내가 부탁을 하고 해결을 해야 할 이슈가 생긴 것이다. 학부모가 전화로 숙제를 문의했는데 교실 안에서 강사가 내준 숙제였기에 알 길이 없었다.
실장은 내게 해당 원어민에게 직접 물어봐야 한다고 했다.
조건반사적으로 챗GPT를 켰다.
네가 담당하는 클래스의 OO이가 쓰기 숙제가 있는지 물어봤어, 주제가 무엇인지 언제까지 해와야 하는지 알려줄래?를 영어로 바꿔줘
똘똘한 녀석은 바로 응답해 주었다. 그러나 말로 해보려니 당최 입에 붙지를 않았다. 쌓여있는 일이 산더미라 미루고만 있을 수도 없어, 무작정 외워보기로 했다.
주저리주저리 몇 번을 반복한 끝에 도전!!을 (속으로) 외치고는 원어민 강사를 찾아갔다.
Would you do me a faver?
호기심으로 가득 찬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곧 수업이 있으니 빨리 말해줬으면 하는 표정도 읽혔다.
야속하게도 외웠던 문장들은 그새 증발해 버렸다.
순간, 내 입에서 나온 한마디
아노(あの)...
(저… / 저기…라는 의미로, 말을 시작할 때 상대방의 주의를 끌거나 말문을 열 때 사용하며, 영어로는 “um…”에 가까운 말)
'아놔, 왜 여기에서 일본어가 튀어나와!'
그녀의 눈이 한층 더 커졌다. 엄동설한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쩔 수 없이 적어 간 종이를 건넸다. 만약을 대비해 챗GPT가 알려준 문장을 적어갔더랬다.
이윽고 그녀의 눈가에 웃음이 번졌고, 숙제 토픽과 제출 기한은 수업 후에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의 뜬금없는 일본어에도 당황하지 않고 친절히 대응해 준 그녀. 이날부터 그녀는 나의 최애 강사가 되었다.
그리고 "아노"를 내 입에서 잠시 떠나보내기로 했다. 첫사랑인 일본어와 잠시 떨어져 그 자리를 영어로 채우는 것이다. 그러려면 영어와 사랑에 빠져야 한다. 아직은 낯선 너. 일단 너를 알아가는 단계부터 밟아나가기로 하자.
휴대폰에 저장된 일드를 모조리 삭제하고 몇 날 며칠을 미드 검색에 몰입했다. 이것저것 찍먹해보며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만난 드라마는 "영 쉘던". 다행히 수준이 아주 어렵지 않았고 러닝 타임이 짧아 반복 재생하기에도 부담이 없었다. 내용도 흥미로운데다 웃음 포인트도 절묘했다. 덕분에 금세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영어가 쉬이 내게 다가오지를 않으니 아직은 짝사랑 중이다. 조금은 외롭고도 웃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