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용건, 마법
"감사합니다. OO학원입니다."
Desk Team 소속이기에 학원 대표번호로 오는 모든 전화는 내 자리로 통한다. 그러다 보니 때에 따라 하루 40~50통의 전화를 받는 날도 있다. 전화 상담을 주 업무로 하시는 분들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일반 회사원으로만 일했던 나에게는 낯선 경험일 수밖에 없다.
무심한 성격 탓에 양가 부모님들께 안부 전화조차 자주 드리지 않는 데다, 말보다는 글이 편해서 전화보다는 카톡을 선호하는 타입이다. 그런 내가 하루 종일 수화기를 붙들고 있다니. 나는 물론 내 주변의 누구도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모습일 것이다.
"아, OO이 어머니~ 안녕하세요~"
수화기 너머 상대방이 자녀 이름을 밝히면 한껏 반가운 인사를 건넨다. 솔직히 말해 진정성은 잘 모르겠다. 제발 용건만 간단히 하고 빨리 끊어줬으면 싶은 마음뿐.
그러나 그들이 굳이 학원에 전화할 땐 "용건만 간단히"를 의도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결석 연락이나 셔틀버스 미탑승, 숙제 문의, 담당 교사 연결 등 깔끔하게 끝나는 전화만 온다면 좋으련만, 학생 선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 학원에 대한 바람이나 불만, 입학 및 커리큘럼 문의, 휴원 또는 퇴원 요청과 같은 골치아픈 이슈들이 불청객처럼 찾아온다. 그리고 이는 좀 더 수화기를 붙들고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반응할 때 "네, 그렇죠"로 끝나기엔 조금 밋밋한 감이 있어, 말 끝마다 "네, 어머니"를 붙이게 된다. 대면으로 이야기한다면 굳이 호칭을 붙이지 않아도 자연스러울 테지만, 유선의 경우엔 다른 것 같다. 나는 서비스 제공자로서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걸 계속 알려줘야 할 것 같은 강박이 생기고, 그 생각은 "어머니"라는 말로 발현된다.
40통의 전화를 받는 날이라 가정할 때, 그중 50%를 용건이 간단하지 않은 경우라 치자. 20명과 대화를 나누는 꼴이고, 10번은 듣고 답할 테니 하루에 200번은 어머니를 부르는 셈이 된다. 여기에 상담 주간이 겹치면 내가 직접 전화해야 하는 인원수가 생기는데 이땐 대략 하루에 10통을 돌려야 한다. 10x10이니 100번이 추가된다. 상담 시즌엔 총 300번까지 어머니를 목 놓아 부르는 날들이 이어진다.
상담 주간이 한창이던 어느 날, 둘째 아이 학원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ㅁㅁ 어머니 안녕하세요. 잠깐 통화되실까요?"
"아, 네 선생님."
이날 만은 내가 학부모로서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이 된다.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성심을 다해 상냥하게 상담에 임해주신다. 그녀의 말에 집중하다가도 문득 "나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응대하고 있나?"라고 자문하게 된다. 그녀의 속내는 진심으로 내 아이를 생각하거나 프로페셔널 마인드로 무장되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반면, 상담 전화가 익숙하지도, 반갑지도 않은 나는 아직 갈길이 멀어 보인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질문할 거리가 생긴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나도 짧게 끊어야 하는데, 아이에 관한 문제이니만큼 그게 잘 안된다. 선생님을 부른다.
저기. 어머니!
아차 하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른다. 선생님이라 불러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어머니라는 말이 튀어나와 버린 것이다.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충분히 이해한다 하신다. 동종업계라 다행이다.
그렇게 수화기 너머의 그녀들은 모두 어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학생 아버지가 수강료 결제차 방문하셨다. 수납을 마친 옆자리 실장이 영수증과 카드를 건네며 인사한다.
네 어머니, 안녕히 가세요.
아차 싶은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 빨게 진다.
학원 경력 12년 차인 그녀는 아버지마저 어머니로 만드는 마법을 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