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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 Level Up 좀 시켜주세요!!

계절, 눈물, 행복

by 소소라미

학원의 학기는 3개월 단위로 바뀐다. 봄학기, 여름학기 이런 식으로 계절의 변화에 맞춰 학기명이 달라진다.


우리네 계절은 슬며시 찾아와 모두가 잠든 사이에 천천히 세상을 물들여가지만, 학원의 그것은 다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동의 물결이 일렁인다.


학기말 정기평가가 시행되면 성적 상담 주간이 한여름밤의 폭풍우처럼 몰아친다. 평가에 기반해 레벨이 결정되고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은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나간다. 퇴원생으로 구멍 난 학생 관리 대장에는 찬바람이 쌩쌩 분다. 한 명이라도 더 들이기 위해 매주 토요일마다 입학테스트가 진행되고, 새 학기에 들어오는 신규생들이 새싹처럼 여기저기 돋아나면서 각별한 관심을 달라 아우성친다.


그리고, 이 가운데 가장 변화무쌍하고 대응이 힘든 건 - 한여름밤의 폭풍우 - 성적 상담 주간이다.


각 레벨은 6개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학부모들에게는 입학테스트 때부터 이 부분을 누누이 강조한다.


하지만 객관적인 원칙도 '내 아이'의 상황과 결부되면 망각해 버리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보다. 성적 상담 주간부터 학기말의 마지막날까지 '내 아이'만큼은 3개월 만에 Early Level Up을 시켜줄 수는 없는지를 묻는 전화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물론 3개월 만에 레벨이 올라가는 경우가 있긴 하다. 아주 특출 난 성적을 거둬서 상위 레벨에서도 무리 없이 수업을 따라갈 수 있다는 판단이 설 때 원장 재량으로 레벨업을 결정한다. 소수의 학생들만 올려줌으로써, 열심히 하는 학생들에게는 보상을 제공하고 나머지 아이들도 동기부여를 받아 전체적인 학업 역량을 끌어올리겠다는 취지라고 한다.


여기에서 문제는 '재량'이라는 점이다. 성적 상담 때마다 학부모들은 Early Level Up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캐묻는다. 몇 점 이상이 나와야 하는지, 내 아이와의 차이는 몇 점인지, 그 사이에 몇 명의 학생이 있는지를 말이다. 재량인 만큼 나조차 그 기준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니, 정황을 통해 유추하여 논리를 껴 맞출 뿐이다. 그러다 보니 좀 더 곤란한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1점 차는 너무 억울하니
내 아이까지만 올려주실 수는 없나요?


나라도 1점 차라는 걸 알게 되면 못 먹는 감 찔러라도 보는 심정으로 한마디 해볼 것 같다. 말하는데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실랑이할 생각은 더더욱 아니고, 그냥 안 될 확률이 99% 인지 100% 인지만 확인해 보는 것이다.


물론 나는 결정권이 없기 때문에 그건 어렵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되면 동점자 학생들을 다 올려줘야 한다는 하얀 거짓말과 함께, 유난히 동점자가 많았다는 허구를 곁들이며 말이다.


대개는 수긍한다. 아이가 실망하겠지만,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배움의 한 과정이라고 말하는 학부모도 있다. 그러나, 들의 일부는 퇴원을 요청한다. 이런 이유로 퇴원하는 학부모는 이미 러 차례 학원에 대한 불만을 제기함으로서 까다롭다고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언젠가는 떠날 사람으로 분류하였기에 퇴원 방어에 소극적으로 임한다. 붙잡지 않는 나의 태도가 야속했는지 학부모는 마지막까지 학원에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모든 이별이 아쉬운 건 아닐 수 있다는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다.

그리고 가장 곤란한 질문에도 맞닥뜨리게 된다.


아이가 레벨 업 못해서 학원 안 가겠다고 울고 불고 난리인데, 이번 한 번만 올려주시면 안 될까요?


차점자는커녕, 평균에도 못 미치는 점수를 받고도 레벨 하나 달라며 떼를 쓰는 형국이다. 열 살 남짓한 아이에게 경쟁의 세계는 원래 이리도 냉정한 법이라고 가르치는 건 가혹하지만, 그런 세상에 내몬 만큼 이치를 조금씩 알려주는 것 또한 부모의 역할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원장에게 보고하니 별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그냥 올려주라" 한다. 그동안 차점자들을 얼르고 달래며 연거푸 죄송하다는 말을 쏟아냈던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허탈감이 스며온다.


떼를 써서 레벨을 따낸 아이는 다음 학기에도 똑같은 행동을 되풀이한다. 부모 역시 변하지 않는다. 3학기 째 반복되었을 때 원장은 결국 'No'를 선언했고, 학생은 학원을 그만두었다.


여름의 끝자락. 어김없이 레벨 업 문제로 학부모들과 씨름을 하던 어느 날, 한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우리 아이 레벨 Stay 해도 될까요?

그 학생은 해당 레벨에서 6개월 과정을 마쳤기에 자동 승반 대상이었다. 정기 평가 성적도 잘 나온 편이어서 상위 레벨에서 학습해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나는 오히려 학생이 레벨업을 해야 동기부여받고 실력도 강화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부드럽고도 단호했다.

이번에 친한 친구들이 그 반으로 올라와서 같이 수업 들을 수 있는 기회인데, 우리 애가 한 단계 올라가면 친구들과 또 헤어져서 슬프대요. 저는 레벨보다 제 아이가 행복하게 학원을 다니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세상이 규정하는 경쟁의 궤도를 벗어나 아이의 진정한 행복을 빌어주는 부모의 마음이 느껴지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다.

어머니, 제가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모르겠지만 같은 학부모로서 정말 존경스럽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좋은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선생님이라도 같은 결정 하셨을 거예요. 계속해서 잘 부탁드립니다.


가을 학기 들어 그 학생의 표정이 부쩍 밝아진 것 같다. 친구들과 함께 하니 다소 목소리가 커져서 자못 당황스럽긴 하지만, 확실한 행복감이 느껴진다. 좀 더 많이 학생들이 가끔은 경쟁이라는 중력을 벗어나 마음껏 유영하며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꿔보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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