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네요
연구수업, 웃음, 연기
연구 수업 공지
1. 대상 : Bilingual Teacher
2. 일시 : O월 O일 O시
3. 장소 : 대회의실
연구 수업은 문법 등 특별한 영역을 제외하면 대개 영어로 진행된다. 강사들이 순번대로 약 10분에 걸쳐 모의 수업을 진행하고 나머지는 평가지를 작성하며 점수를 매긴다. 나를 포함한 Desk Team 멤버들은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청강생으로 참여한다.
스마트보드를 보면서 수업을 따라가기에 대략적인 내용은 파악할 수 있다. 다만 때때로 강사들은 듣는 이들을 학생이라 가정하여 실제 수업과 유사하게 지목(cold call)하는 방식을 취하곤 하는데, 이 경우엔 진짜 학생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게 된다. 그들 앞에서 나의 보잘것없는 영어 실력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몸부림이다. 제발 내 이름을 부르지 말아 주오.
연구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별다른 호응을 하거나 강사와 눈을 마주치지도 웃지도 않는다. 최대한 존재감을 희미하게 만들어 그 시간을 버텨내는 것. 내 목표는 오직 그뿐이다.
이들 중에는 유독 유머러스한 부류도 있는데, 영어를 말할 때도 특유의 장난기가 발동하는 건지 여기저기서 팡팡 웃음이 터진다. 나는 옅은 미소로 웃음을 연기한다. 아메리칸식 유머라서 못 알아들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답답한 마음에 다시 또 고개를 떨군다.
아무도 나를 눈여겨보지는 않겠지만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채, 분위기에 역행하는 나 자신이 오히려 눈에 띌까 두려워진다. 다들 재주넘기에 한창인데 숨을 곳을 찾지 못해 홀로 구석에 앉아 바나나만 까먹는, 아니 까는 시늉만 하는 동물원 원숭이가 아른거린다.
각 강사가 모의수업을 마치면 강점과 약점을 중심으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시간이 이어진다.
이에 앞서 원장은 연구 수업의 취지를 한번 더 강조한다.
연구 수업은 발표와 피드백을 통해 다양한 시각에서 개선점을 찾고 상호 발전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피드백 주실 때 무조건 좋았다고만 이야기하면 다시 시킬 거니까 제대로 평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실랄한 평가가 시작된다. 평가받는 데 이미 익숙한 강사들은 겸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메모를 한다. 하지만 아직 적응이 안 된 이는 작은 지적에도 얼굴이 새빨개진다. 그녀는 애써 웃어보지만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느껴진다.
나는 영어도 제대로 못 알아들는 주제인 만큼 그냥 좋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진짜로 다시 시키는 경우가 있어 억지로 약점을 하나 덧붙인다. 잘 들었습니다.라는 마무리 인사와 함께.
모두 빠져나간 회의장을 정리하고 있을 때, 얼굴이 새빨개졌던 강사가 다시 들어온다. 겉옷을 놓고 나갔다며.
그녀의 얼굴이 여전히 상기되어 있다는 게 느껴져 미소를 건네고 싶어진다. 이것만큼은 연기가 아닌, 진심이다.
OO 선생님! 저는 선생님 수업이 제일 좋았어요. 제가 학생이라면 수업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조금 긴장하긴 했어도 친절하고 침착하게 수업을 진행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속도가 살짝 쳐지더라도 나처럼 잘 못 따라가는 아이들을 배려하는 모습도 느껴졌다. 원장은 잘하는 아이들 위주로 수업을 진행해야 하니 속도를 좀 내야 한다고 채근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강사의 선한 품성이 녹아들어 좋았다.
이제야 긴장이 풀리는 듯 그녀의 얼굴에 자연스러운 웃음이 번진다.
어머, 정말요?정말 감사해요. 사실 저는 연구 수업할 때마다 너무 민망해요.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랄까요?
연구 수업의 목적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이 사람, 저 사람을 원숭이로 만들지는 말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 가슴을 꼬집는 단점 지적 대신, 할 수 있다는 용기의 언어와 발전하고 있다는 희망의 찬가로 가슴을 채우는 시간이 될 수는 없을까?
물론 내가 영어를 못 해서 줄행랑치고 싶은 건 이쪽 원숭이 사정이니 할 말은 없다. 요리조리 숨어서 바나나 껍질 까는 연기만 해대는 내 꼴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가슴 아프지만 이 웃음도 진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