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엿, 존중
아주 춥지도 덥지도 않은 3월의 보통날이었다. 월요일이라는 특성상 약간 분주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학원은 별 다른 이슈 없이 평화로운 오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2시가 다 되어 갈 즈음, 교수부장이 헐레벌떡 우리 쪽 데스크로 찾아왔다.
"혹시 OOO 선생님이랑 XXX 선생님 출근하셨어요?"
나와 옆자리 실장은 그제야 그 선생님들과 마주친 기억이 없다는 점을 상기했다. 그들은 2개 국어(한인) 강사 가운데 유이한 정규직으로, 계약서상 출근 시각은 1시였다.
"못 본 것 같은데..."
"2시 반부터 수업인데 여태 안 온 거예요?"
한 명씩 맡아서 통화를 시도했다.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어...로 바로 돌아가는 걸 보니 필시 일부러 안 받는 상황이다. 잠시 피치 못 할 사정이 있어 그런가 싶었지만, 이내 불길한 예감이 감돌았다. 집단 항명이라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보고를 받은 원장은 소리를 질렀고(예상한 바대로), 데스크팀의 자질을 운운하며 1시에 이미 보고를 했어야 한다는 질책과 함께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 그 사이에 교수부장은 그들이 들어가는 수업을 다른 강사로 대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한인 강사의 대부분은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기에 대체 인력은 원어민들뿐이었다. 다행히 이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기꺼이 수용해 주었다.
하루 종일 그들에게 문자와 전화를 반복하느라 다른 업무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던 날이었다. 원장은 틈만 나면 데스크에 대고 소리쳤으니까.
그래서 연락이 됐어요? 안 됐어요?
사라진 선생님들은 다음 날 정확히 1시에 돌아왔다. 교수부장의 면담을 거쳐 원장실에 들락날락하는 등 뒷수습으로 보이는 번잡스러운 과정을 거치긴 했으나. 평소와 다름없이 수업을 준비하고 시간표에 맞춰 강의실에 들어갔다.
오며 가며 잠깐 마주칠 때 멋쩍은 웃음을 보이긴 했지만 연락 두절로 출근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태연했다.
원장이 퇴근하고 강사들도 모두 수업에 들어갔을 때, 실장이 슬며시 화두를 던졌다.
저 선생님들 왜 안 나온 건지 알아요?
자기들한테만 일 몰려서 몇 번씩 면담 요청했는데 원장이 안 들어줘서 태업한 거래.
엿 먹어봐라 이거지.
원장은 발사된 엿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칼자루를 손에 쥔 것만 같았다. 그들의 항복 선언으로 변변치 않은 무기까지 흡수하여 능력치가 더 세진 것이다.
그녀가 퇴근 직전 Desk Team 멤버들을 불러놓고 으름장을 놓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저 두 사람 이상 행동 감지되거나 쓸데없는 얘기 하면 죄다 나한테 보고 하세요. 바로 면담하고 잘라버릴 거야. 일 할 사람 많아.
백만 스물한 번째 보고 업무가 추가된 걸 보니. 엿은 Desk Team이 먹은 셈이다. 이봐요 엿을 날릴 거면 조준을 좀 제대로 하라고요!!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인생이라지만, 이 사건은 현재 내가 딛고 서 있는 이 바닥에 과연 존중과 신뢰가 존재하는지 되짚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20여 년 가까운 직장 생활에서 동료가 퇴근 시간까지 연락 없이 출근을 하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말로 하지 못하고 행동으로만 나선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최소한의 예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행동으로 인한 파장으로 영문도 모른 채 일을 떠안게 될 동료들의 마음을 헤아렸다면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수업은 재화를 담보로 한 고객(학생)과의 약속인 만큼 서비스 제공자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은 신용을 지키는 일이다. 이 부분을 잠깐이라도 상기했다면 어땠을까.
그들의 억울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건 결코 아니다. 이 학원은(다른 학원은 어떨지 모르겠스나) 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일들을 떠맡게 되는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파트타임은 일을 더 하는 만큼 시간이 필요하고 그만큼 비용이 소요되는 반면, 정규직은 "갑은 을에게 근로 시간 외 추가 근무를 요청할 수 있다"라는 근로계약서 상 문구 하나로 모든 것이 통용된다. 서명한 이상 되돌릴 수 없으며, 물론 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만큼 근로자에 대한 경영진의 존중감은 흐릿하다.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인력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만 보아도 소통에 대한 장벽이 느껴지지 않는가.
따라서 진짜 싸울 태세였다면 좀 더 현명한 일격을 가해야 했다. 어설픈 잠적은 경영진의 신뢰 하락은 물론 동료들의 등 마저 돌리게 했기에.
그들은 잠수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표를 제출했다. 마지막 날에도 갑자기 내일부터 출근을 안 하겠다고 하는 등 배려 없는 태도를 보여 다소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나름 마지막으로 던져 본 엿이었을지 모르나, 그 엿 역시 Desk Team이 먹었다. 학부모들에게 강사 교체 건을 납득 가능하게 설명하는 문자를 보내고, 강의실 안내표와 관리장을 변경해야 하는 일련의 작업을 "당장"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실력이 출중했고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 역시 우호적이었기에, 한때 강사로서 존중하는 마음을 품기도 했었다. 그러나 좋게 기억되는 감정과 여운의 핵심은 마무리에 대한 인상과 태도가 아닐까. 그들이 작은 미안함의 표시나 끝까지 책임지려는 태도를 보여줬다면 마지막은 아름답게 기억되었을 테니까.
오늘도 나는 이 학원이 평생 직장은 아닐 거라는 생각으로 출근길에 나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 땐 가더라도 성실과 진심 어린 마무리를 하겠다고 다짐해본다. 마지막까지 동료를 배려하고 존중했던 사람으로 남고 싶기에.
“The way you end something defines the way you’ll be remembered.
(무엇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가, 당신이 어떻게 기억될지를 결정한다.- 미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