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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J가 학원에서 일하는 방법

MBTI, 가면, 간식

by 소소라미

5년전, 처음으로 MBTI 검사를 했을 때 ISFP가 나왔다.


호기심 많은 예술가라 했다. 조용하지만 감정이 섬세하고, 평화를 지향하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으로, 진심이 느껴지는 유형이었다.


딱 내 이야기 같았다. 나는 싸우는 걸 극도로 싫어했으며, 누군가가 힘들어갈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조용히 도와주곤 했다. 분위기 파악을 잘해서 감으로 대처하는 능력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하지만 그런 행동과 말을 할 때마다 이상하리만큼 소진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최선을 다해 감정을 헤아리려 "노력해 주고" 있으며, 반복적인 하소연은 멈추고 해결 좀 해보라고 "쏴 붙이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 것이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가족들은 내가 공감 능력이 없고 냉정하다 했다. 부모님이 싸울 때도 이 부분은 엄마가, 저 부분은 아빠가 잘 못한 것이니 서로 탓만 하지 말고 인정하고 화해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나의 가시 같은 말에 상처받은 당신들은 아이를 잘 못 키웠다며 다시 서로를 공격했다. 언제부터인가 싸움에는 관여하지 않기 시작했다.


또한 죄송한 이야기지만 부모님이 편찮으셔도 병원에 모시고 가거나 약을 사다 주는 것 외에, 매일같이 안부를 물은 기억은 많지 않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는 1년 이상 너무 힘들어하셨는데, 엄마에게 당분간 우리집에 와 계시기를 권유했다. 내가 챙겨드리면 좀 더 안정이 될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너는 너무 차가워서 같이 살면 불편해."라고 거절하며, 당신의 형제나 친척 누구가 서운한 말을 해서 더 속상하다거나 자신의 처지를 알면서도 외면해서 가슴이 메어진다는 등의 하소연만 계속할 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가 생각에 매몰되지 말고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다.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일기 쓰기나 새로운 활동을 권유했지만 엄마는 당신은 그게 안 되는 사람이라며 화를 내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언니는 이런 내가 나쁜 년이라고 했다. 마음 하나 헤아려주지 못하고 잘난 척한다며 또 나무랐다.


MBTI 신봉자는 아니지만 진정 내가 정 많고 진심이 느껴지는 ISFP가 맞는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3년 전쯤, 우연한 기회에 다시 MBTI 검사를 하게 되었다. 결과는 놀랍게도 INTJ였다. 관찰력과 분석력이 뛰어나고 시간과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 내향형이라는 점만 빼면 ISFP와는 전혀 상반된 특징을 지닌 유형이다.


이후에도 1년에 한 번씩 검사를 하고 있지만 결과는 늘 INTJ다. MBTI 결과가 때때로 변할 수도 있다고 듣긴 했으나 이처럼 극과 극의 판정이 나온 이유가 무얼까 궁금해졌다. 둘 중의 하나는 나의 가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릴 때부터 가족들에게 이기적 혹은 계산적이 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다정하게 상대방을 어루만져 주어야 좋은 사람이 된다고 여겼다. 답답하고 속이 막혀도 나쁜 사람이라는 욕을 먹지 않기 위해 진짜 속에 있는 말은 아꼈다. 설령 그것이 더 효율적이고 논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말이다.


직장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원칙과 정직을 우선으로 했다가는 자칫 튀는 사람으로 비칠 수 있었기에 순응하는 척했다. 가정에서 교육받은 대로 좋은 사람이 되려면 다른 사람의 사정에도 관심을 갖고 진심으로 공감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포장했다.


그 정점에 있었던 것이 5년 전이다. 그 당시 나는 쫓기듯 팀을 옮기는 등 회사에서 입지가 흔들리고 있었기에, 비효율과 불합리에도 내 의견을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증명고 실력을 보여줄 기회가 적었으니 모든 걸 수용하겠다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다가가야 했다. 그때의 나는 ISFP였고, 그게 나의 가면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가면을 벗고 나온 것이 벌써 3년 전이다.


이후 2년이라는 긴 휴식기를 거치면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내는 대에 몰두했다. 누구보다 목표지향적이고 시간 효율성을 중시한다는 INTJ라기엔 너무 모순적이지 않냐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퇴직의 이유이자 목표는 나를 찾는 것이었다. 피라미드 구조에 맞춰 그만두는 그날까지 정치력으로 무장해야 하고, 일에 대한 완벽주의 성향으로 부서져 가는 나 자신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면을 벗고 싶었다.


본연의 나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휴식은 가히 성공적이었다. 원칙을 중시하고 정직을 우선하는 사람, 남에게 신경 쓰는 에너지를 나 자신에게 사용하고 싶은 사람. 감정에 치우치기에 앞서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몰입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걸 확신했으니 말이다. 원가족에게도 내가 나쁜 게 아니며 공감을 잘하는 사람들과 조금 다를 뿐이라고 설명했다. 대신 문제 해결은 내가 제일 빠르지 않느냐는 반문과 함께.


휴식을 끝내고 올해 초 영어 학원에 새롭게 둥지를 틀게 되었다. 학원에는 다른 조직들과 달리 더 이상 올라갈 피라미드가 없다. 경영진은 대표와 원장 둘 뿐이고, 이 외의 구성은 각자의 직함이 있기는 하지만 협력 관계에 가깝지 상명하달의 구조는 아니다. 내가 원장이 된다는 야망을 품지 않는 이상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또한 조직이 작아 1당100의 역할을 해야 하는 만큼 경영진의 눈 밖에 나더라도 퇴사를 종용하고 챌린지를 걸기란 쉽지 않다. 이는 수개월 전, 하루 종일 잠적하고도 다음날 멀쩡히 나와 수업을 진행했던 강사들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점을 간파한 이후에는 내 성향에 맞는 방식으로 업무에 임하고 있다. 나의 공적들이 쌓아 올려져 승진을 하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총대를 메고 애써 개선할 필요는 없다. 만, 시간의 효율 나는 방향으로 슬쩍 방법만 바꿔서 후다닥 해버린다. 윗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도 선심도 쓰지 않는다. 그저 내가 맡은 일만 깔끔하게 처리하면 그만이다.


하루의 1/3 이상을 보내다 보면 각종 이슈나 진상을 맞이하게 되기 마련이지만 굳이 내색하여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에너지 소모만 부를 뿐인 감정을 사고로 전환하여, 일을 빨리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해결에 초점을 둔다. 실장은 나에게 무슨 일인지 자꾸 물어보지만 간단히 설명한 후, 이슈나 보고에 다 기재했다고 부연한다. 나는 원래 그런 스타일이라는 걸 확실히 해두는 것이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반면 옆자리 실장은 매우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원장실에 불려 가 질책을 받고 나오면 새빨개진 얼굴이 민망한지 자꾸만 손으로 비벼댄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틈을 타 나에게 험담을 늘어놓는다. 나는 그녀의 말이 좀 길어진다 싶으면 짧지만 분명한 반응을 보인다. "아 그랬어요? 그게 뭐 별거라고 혼까지 낸대요?" 정도면 충분하다. 간혹 당신이 잘못한 거니 혼나야 마땅한 거 아니냐는 반감이 들기도 하고, 해결도 못할 거면서 욕만 하는 시간이 아깝기도 하지만 AI가 아닌 이상 이 정도의 감정은 가지고 살아야지 싶다. ISFP 가면을 쓰고 학습했던 시간이 쓸모없었던 건 아니다.


실장은 내 한마디에 힘을 얻었는지 좀 더 하소연을 늘어놓고는 "우리 뭐 시켜 먹을까요?"라고 묻는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그녀에게 빵을 하나 건넨다.

"어제 잘 먹었어요.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그녀의 얼굴이 활짝 핀다.


이곳에서는 골치 아픈 정치력도 공감력도 필요 없다. 간의 간식을 기꺼이 나눌 수 있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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