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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사대제 May 13. 2024

<이라크 전쟁>의 불편한 진실 03

이라크 전쟁 이면에 감춰진 추악한 진실과 실상

표지 사진: 이라크 전쟁 개전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불타는 바그다드 시내 전경 @ AP=연합뉴스 2003-03-22  





제 3 장  전쟁이 남긴 어두운 유산



전쟁 초기 미국의 전쟁 수행은 순조로운 듯했다. 개전 첫날부터 이라크군이 대거 투항했다. 이라크군은 미군을 상대로 산발적인 저항을 펼치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 개전 20일 만에 수도 바그다드가 함락되고 국토 대부분이 미군 수중에 떨어졌다. 


2003년 4월 9일 바그다드에 입성하는 미군들 그리고 이를 환영하는 바그다드 시민들 @ AP. 2003-04-09


5월 1일 부시 대통령이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 함상에서 종전 선언을 할 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손쉽게 전쟁 목적을 달성하는 듯했다. 


Mission Accomplished @ AP. 2003-05-01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은 이라크에서 베트남 전쟁에 못지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음을 절감해야 했다. 애초 미국은 2개월 정도면 이라크 점령을 끝내고 병력을 철수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전비戰費도 600억 달러(이라크 재건비용 25억 달러 포함) 정도면 충분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이라크의 혼란이 가중되면서 미군 철수는 점점 지연되었고 그사이 사상자와 전비는 끝없이 늘어났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이 내세운 전쟁 명분은 모두 허위와 조작이었음이 드러났다. 2004년 8월 중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의 수색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은 특수 전담반(Iraq Survey Group)까지 조직해 1년 4개월 동안 이라크 전역을 샅샅이 뒤졌으나,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했거나 개발 중이었다는 증거는 단 한 건도 찾아내지 못했다. 유일한 성과라면 대대적인 수색과정에서 사담 정권이 자행한 민간인 대량학살 현장(생매장지)을 여러 군데 찾아냈다는 것뿐이다. 


2003년 6월 초 알 힐라 인근의 생매장지 발굴 현장 @ <조선일보> 조○○ 기자


사담 정권이 국제 테러조직 알카에다(al-Qaeda)와 연계되었다는 주장도 사실무근으로 판명되었다. 전쟁 전 미국이 국제 사회에 공개한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및 테러 지원 관련 증거들은 대부분 미국 정보기관들이 날조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실 세속 권력에 집착했던 사담은 이슬람 근본주의를 추구하는 알카에다가 이라크 내에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고 한다. 오히려 사담 정권이 무너진 이후 이라크는 국제 테러조직들의 온상이 되어 버렸다. 


알카에다는 이라크 지부까지 조직해 각종 테러를 일삼고 종파 갈등을 부추겨 결국 내전을 일으켰다. 순니-쉬아 간 종파 내전의 직접적 계기가 된 2006년 2월 22일 사마라(Sāmarrā)에 있는 쉬아파 성지 알 아스카리야(al-Askariyya) 마스지드 폭파사건은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알카에다의 폭탄 테러로 황금색 돔이 날아가 버린 알 아스카리아 마스지드 / 출처: Wikipedia, <al-Askari Shrine>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확립하겠다던 미국의 원대한 구상도 물거품이 되었다. 미국은 ‘이라크 자유 작전(Operation Iraqi Freedom)’이라는 거창한 작전명을 내걸고 전쟁을 일으켰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공(참고: 미국 언론은 이라크 전쟁 관련 보도를 할 때 ‘Operation Iraqi Freedom’이라는 공식 작전명보다 ‘The Invasion of Iraq’라는 표현을 더 즐겨 사용한다. 미국인들조차 이라크 전쟁을 침략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격이 되고 말았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무자비한 사담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독재 정권의 통제가 사라진 자리에는 극도의 무질서와 혼란이 찾아들었다. 민족 분쟁, 종파 갈등 등 온갖 해묵은 문제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이라크는 결국 내전에 휩싸였다. 


여전히 이라크에서는 내전이 계속되고 있고 평화와 민주주의 정착은 요원하기만 하다. 끝없는 내전에 지친 이라크 국민들 사이에서는 차라리 사담 시절이 그립다는 불평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8년 9개월이나 지속된 전쟁은 미국에 감당할 수 없는 손실을 안겨 주었다. 이라크 전쟁으로 미군 및 미국인 4,486명이 사망했고 32,226명이 부상을 입었다. 미군 사망자 중에는 전쟁 후유증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군인들도 꽤 된다. 


미국은 3조 달러(약 3,300조 원)에 가까운 돈을 전비와 이라크 재건비용으로 쏟아부었다.(출처: <조선일보> 2013년 3월 12일자, ‘美가 3조 달러 퍼붓고 실패한 전쟁 독재자 사라진 곳, 종파분쟁은 더해‘, 김강한 기자) 전쟁으로 인한 과도한 재정지출은 미국 정부를 파산 지경으로 몰아넣었고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쳐 지금까지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은 애초 이라크 석유를 팔아 전비와 재건 비용을 충당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 계획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전쟁 전 이라크의 1일 원유 생산량은 260만 배럴이었다. 그나마 전쟁이 일어나자 1일 원유 생산량은 150만 배럴로 떨어졌다. 


미국이 석유를 팔아 전비와 이라크 재건비용을 충당하려면 1일 원유 생산량이 600만 배럴은 되어야 하는데, 전쟁기간 내내 이라크 석유 생산량은 하루 평균 200만 배럴에 그쳤다. 석유 생산량이 늘어나려면 정세 안정이 필수요건이었으나, 내전이 벌어지면서 혼란은 더욱 가중됐고 원유증산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한마디로 미국에 이라크 전쟁은 밑지는 장사였다. 


무엇보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도덕성과 국가 이미지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미국은 이제까지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라 자처해 왔건만(역사상 미국이 실제로 이런 가치들을 국익보다 앞세운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지만), 이라크 전쟁의 명분이 모두 허위와 조작이었음이 드러나자 미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전쟁 중 벌어졌던 미군의 오폭, 민간인 학살, 포로 인권침해 등은 범세계적인 비난을 샀다. 특히 2004년 4월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 수용소에서 벌어진 포로 고문과 잔학 행위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미국의 국가 이미지는 치명상을 입었다. 이를 두고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Hugo Rafael Chávez Frías, 1954 ~ 2013) 대통령은 “미국은 이라크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이야말로 진정한 테러리스트다.”라고 비난했다.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벌어진 미군의 고문과 잔학 행위 / 출처: Wikipedia, <Abu Ghraib torture and prisoner abuse>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은 전쟁을 통해 유일하게 이득을 챙긴 측은 미국의 네오콘(Neo-Con)이었다. 부시 행정부를 이끌었던 미국의 네오콘 수뇌부는 모두 석유와 군수업계의 거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체니(Dick Cheney) 부통령은 세계적인 석유개발회사 겸 군사기지 건설회사 핼리버튼(Halliburton)의 경영주였고 그의 아내 린 체니(Lynne Cheney)는 군수회사 록히드 마틴(Lockheed Martin)의 이사를 역임했다. 도널드 럼스펠드(Donald Rumsfeld) 국방장관, 돈 에번스(Don Evans) 상무장관, 게일 노턴(Gale Norton) 내무장관, 폴 울포위츠(Paul Wolfowitz) 국방부 부장관,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안보보좌관 등은 모두 석유나 군수업체 경영자 아니면 대주주였다. 이들은 이라크 전쟁을 통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벌어들여 개인 재산이 몇 곱절로 늘어났다. 


전쟁의 최고 수혜자는 단연 부시 대통령이었다. 텍사스 석유회사의 소유주이자 군수업계에도 막대한 지분을 가진 부시 대통령은 네오콘 중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었고, 대통령에 재선되기까지 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2000년 대선에서 대법원 판결까지 가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 대통령에 오른 부시는 전쟁이라는 위기상황을 이용해 2004년 선거에서는 여유 있는 표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모든 면에서 그보다 능력이 뛰어났던 아버지(George H. W. Bush, 1924~2018, 제41대 대통령)도 이루지 못한 재선의 꿈을 부족하기만 한 아들(George W. Bush, 제43대 대통령)이 이룬 것이다. 


이들 소수의 승리자들을 제외한 미국 국민 전체는 패배자가 되었다. 전쟁이 남긴 어두운 유산은 고스란히 미국 국민들의 몫으로 남았다. 전쟁을 일으킨 미국 국민들조차 이제는 자신들이 전쟁의 피해자라고 여긴다. 


2013년 3월 전쟁 발발 10주년을 기념해 미국 CBS 방송국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9퍼센트가 ‘애초 전쟁을 일으킨 것 자체가 미국의 실수였으며, 이라크 전쟁은 사실상 실패한 전쟁이었다.’라고 답했다.


 



전쟁으로 이라크가 겪은 고통과 상처는 미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 지금까지 이라크가 입은 인적 손실은 민간인 사망자 약 10만 명에 부상자는 그 몇 배에 이른다. 전쟁 난민도 270만 명이나 발생했다.(출처: 계간 <황해문화>, 2013년 여름호(통권 제79호), ‘바그다드, 그 후 10년’,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구정은)


물적 손실은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이라크는 말 그대로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그중에서도 격전지였던 바그다드, 바스라(Basra), 팔루자(Fallujah) 등은 기간 시설이 거의 다 파괴되어 더 이상 현대적인 도시의 면모를 찾아보기 어렵다. 아직도 테러가 난무하는 바그다드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난민 수용소로 변해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는 완전히 파탄지경이어서 실업률이 50퍼센트에 육박하고 전 인구의 약 20퍼센트는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절대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이라크인들은 생명과 재산 그리고 자존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전쟁은 그들의 과거(전쟁 중에 수많은 고대 유적과 문화유산이 파괴되었다.)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앗아갔다는 점이다.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도서관, 연구소, 각급 교육기관 등 지식기반이 깡그리 파괴되어 재기불능 상태에 빠졌다. 덕분에 전쟁 전 서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던 이라크의 문맹률은 지금 40퍼센트대를 넘어섰다.(출처: UNDP, Human Development Reports, 2011)




<제 4 장  이라크 전쟁 이후의 세상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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