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나서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온 때가 있었다. 조리원을 퇴소하고 집으로 돌아온 지 2주 정도 되었던 주말 오후였다. 남편도 나도 밤낮 할 것 없이 2~3시간 간격으로 갓난아기를 먹이고 트림시키고 재우느라 잠이 부족해 한참 예민해져 있었고, 나는 제왕절개를 한 후 아직 몸이 회복되고 있는 중이었다. 주말 동안은 주로 내가 아이를 맡고 남편이 집안일 대부분을 하고 있었다. 설거지가 밀려있어 남편을 채근했는데, 남편은 자신도 잠시 한숨 돌리고 싶었는데 내가 또 뭘 시키니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것을 기화로 다툼이 일어났고 자신도 힘들다고 하는 남편의 말에 나는 억울함이 북받쳐 올랐다. 아이를 낳느라 몸이 망가진 것은 난데 이런 잔소리를 할 권리도 없다니, 억울했다.
태어나 이런 육체적인 고통은 처음 겪었는데 나의 고생을 진심으로 함께 해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내편이라고 믿었던 남편도 ‘나’ 자체일 수는 없다는 사실, ‘남’이라는 사실이 그 순간만큼은 차가울 정도로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마치 바다에 홀로 떠 있는 것만 같은 무서운 외로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내가 없으면 생존할 수 없는 갓난아이가 거실에 누워있었기에 나는 어디론가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 자리에 서서 이 무서운 외로움을 그저 온 몸으로 느끼는 것 말고는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없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에 빠트렸다.
이 사실을 깨닫자 남편에 대한 분노를 넘어 아이를 낳은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그리고 그 후회감을 느끼자마자 나는 엄청난 죄책감에 휩싸였다. 어떻게 부모가 되어서 아이가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니. 그 생명을 부정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니. 내 자신이 무섭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모든 감정들에 압도되어 나는 정말 아이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한동안 그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의 의미가 그제서야 어떠한 의미인지 생생하게 전해졌다. 나는 앞으로 이 책임으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번복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때가 나의 존재가 나 개인을 넘어서서 부모로서 재정립되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때 이후로는 부모로서의 책임에 점점 익숙해지며 살아왔다. 퇴근 후에도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휴식이 없는 삶에 남편도, 나도 이제 적응을 많이 했다. 물론 아직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버거울 때가 있지만, 많이 쓰다 보면 굳은살이 배기듯 이제 아이를 돌보는 것이 우리의 기본값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남편과 내가 각자의 꿈이나 목표가 생겼을 때였다. 아이가 없을 때는 각자의 시간과 계획을 존중해주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이미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올인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이 아이와의 시간이 될 수도, 상대방의 희생이 될 수도, 경제적인 이익이 될 수도 있었다.
회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육아를 맡기고 싶지도 않고 나도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어 퇴사를 할까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나의 결정을 지지해주었고, 우리는 그 대가로 경제적인 이익을 내어놓기로 결정했다. 이 생각을 부모님께도 말씀드렸는데, 내 얘기를 듣고 엄마가 했던 말은 "왜 이렇게 무책임하니?"였다. 부모님이 회사를 그만 두는 것에 부정적이실 것이라는 것은 예상했지만, 무책임하다는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물론 오랜 기간 공부하고 일하면서 얻은 그간의 커리어를 놓아버리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뒷바라지하셨던 엄마의 서운한 마음도 섞여 있겠지만, 아이에게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회사를 그만 두는 것은 엄마로서 무책임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나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이에게 무책임한 결과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물론 나는 부모로서 아이를 양육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외벌이가 되면서 수입이 줄긴 하지만 생계가 가능한 상황에서, 단순히 돈을 덜 벌게 되는 것이 아이에 대해 무책임하다고 할 수 있을까? 부모의 책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전업주부인 엄마 밑에서 자랐다. 아침, 저녁 엄마가 정성스럽게 차려주시는 밥을 먹고, 하원, 하교 후에는 그날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얘기하는 것이 소소한 일상이었다. 친구와 속상한 일이 있을 때에도 집에서 나를 맞이해주고 내 얘기를 들어주는 존재가 있었기에, 마음속 응어리를 휘적휘적 풀어가며 다음날을 아무렇지 않게 시작했다. 엄마와 대화하지 않더라도 엄마가 있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잠을 자고 나면 다시 다음 날을, 어려운 문제를 대면할 에너지가 푸근히 충전되었다. 물론 나와 다섯 살 터울인 어린 동생과 돌아가며 우리집에서 지냈던 친척들도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나만 바라보지는 못하셨지만, 그래도 같은 공간에 엄마라는 존재가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내 내면 깊은 곳에 무게중심이 묵직하게 자리잡게 하였다.
이렇게 나는 일을 하지 않는 엄마 밑에서 충분한 보살핌과 사랑을 받으며 부족함 없이 컸다. 엄마가 일을 하지 않아서 아쉬웠던 적은 없다. 오히려 나는 내가 엄마에게 받았던 보살핌을 내 아이에게 주지 못해서 아쉬울 때가 많다. 그런데 왜 엄마는 내가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무책임하다고 하는 것일까? 나는 이 모순에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하면 ‘아이에 대한 부모의 책임’을 다했다고 볼 수 있을까? 최대한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풍족한 환경을 제공하면 책임을 다하는 것일까? 엄마, 아빠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것일까? 사람마다 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부모의 책임이 어떤 이에게는 경제적인 안정일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따뜻함과 다정함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게는 적절한 행동에 대한 훈육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아이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것일 수 있다.
나는 나의 딸에게 단순히 엄마가 남들이 인정하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루어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그치고 싶지 않다. 나는 딸에게 경제적 안정과 풍족함을 주는 대가로 엄마와의 시간을 부족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의 딸에게 일을 하는 이유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라는 것을 나의 인생으로 보여주고 싶다. 스스로의 행복과 삶을 개척하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 나의 열정적인 모습으로 보여주고 싶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나의 생생한 표현과 넘치는 행복감으로 보여주고 싶다.
나의 새로운 도전이 또 어떤 어려움에 봉착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있는 곳이 나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나는 실패를 감수하고서라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나의 삶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실패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나의 딸에게 ‘무책임’한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무책임’해지겠다. 나의 꿈을 접고 현실에 타협하는 것이 ‘모범적인 부모’로서의 자질이라면, 나는 기꺼이 ‘불량’해지겠다. 그래서 나중에, 지금의 내 나이가 된 딸에게 “나는 너를 위한 삶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온전히 내가 살아야 할 삶을 살았노라” 당당히 말할 것이다. “그러니 너도 용기 내어 너의 삶을 살면 된다”고 나의 삶으로 몸소 말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