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남편은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자기 색깔이 확실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아이”가 되기를 바랐다. 우리 둘 다 한국 사회의 ‘모범 기준’에 따르며 ‘표준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해와서 그런지, 아이만큼은 그 틀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살기를 바랐나 보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바람이 통했는지 정말 주관이 확실한 아이가 태어났다(태교 뭐 있나 싶었는데 효과가 있긴 한가보다).
아이의 뚜렷한 주관은 조리원에 있을 때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조리원 간호조무사 선생님이 “이 아이는 엄청 부드럽게 대해줘야 해요. 뭐든 억지로 움직이려고 하면 굉장히 싫어해요.”라고 하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모든 아기들이 그렇지 않나?’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그런데 아이가 돌이 지나면서 서서히 주관이 생기기 시작하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이 아이는 정말 자기 생각이 뚜렷한 아이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우리 아이는 선택지를 주면 0.1초만에 대답이 나오는 아이이다. 입고 싶은 옷, 먹고 싶은 음식, 하고 싶은 놀이, 보고 싶은 사람, 하고 싶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음악, 좋아하는 색깔 등등. 거의 모든 순간에 자기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이 확실하다. 유치원에 등원할 때에도 입고 싶은 옷이 명확하고, 놀이터에서도 항상 친구들에게 먼저 어떤 놀이를 하자고 제안하고, 그때그때 듣고 싶은 음악도 구체적이다.
분명 내가 원하는 대로 ‘자기 색깔’을 가진 아이로 성장하고 있는데, 아이가 또래 관계를 만들어가고 어른들에 대한 예의를 배워야 할 시기가 되자,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어디까지가 지켜야 할 선이고, 어디까지가 아이에게 자율성을 줄 수 있는 영역일까? 어디까지가 ‘자기 색깔’이고 어디까지가 ‘무례함’일까? 부모인 나도 혼란스러운 지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조차도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내 생각을 현명하게 표현하는 법을 아직 완벽히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예의를 중시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는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에 대한 배려를 하면서 자신의 의사도 확실히 표현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 상대와 다른 의견을 펼치는 것이 예의 없는 것으로 치부될 때도 있고, 남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각 상황에 맞는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특히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자기 의견을 내는 것 자체가 튀는 행동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며 남들과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을 금기시하는 우리 문화에서 나 역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점점 잔소리가 늘어나는 것을 느낀다. 특히 우리 아이는 자신의 주관이 확고하기 때문에 거절도 확실하게 하는데, 이럴 때 내가 무안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어떤 친구가 무엇을 같이 하자고 제안했을 때 본인이 하기 싫은 것이면 싫다고 단칼에 거절한다. 5살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내 눈에는 친구의 상처받은 얼굴이 보이니 아이를 나무라게 된다. 더 부드럽게 얘기하라고, 친구가 하고 싶은 것도 같이 하라고 한 소리를 하게 된다.
물론 필요한 훈육은 반드시 해야 한다. 남을 위험하게 하거나 아프게 할 수 있는 공격적인 행위나 말,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행위, 아이 자신의 안전이나 건강에 해가 되는 행위는 하지 않도록 지도하고, 인사, 감사의 표현, 미안함의 표현 등의 기본적인 예의범절은 잘 가르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남이 기분 나쁠 수 있는’, ‘남이 불편할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어디까지 제한해야 하는 것일까? 이 범위를 너무 넓게 보다 보면, 아이가 자신의 표현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들어 건강한 의사표현을 할 기회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 아이의 친구가 자신의 할머니와 함께 우리집에 놀러온 때였다. 둘 다 4살이었을 때였다. 아직 말이 서툰 아이 친구가 우리집 거실 매트를 보더니 “더러워”하고 말했다. 나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더러운 곳이 있다면 살펴보고 닦아주려고 했다. 그런데 함께 온 할머니가 엄청 당황하시며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야”하고 아이를 나무랐다. 알고보니 우리집 매트 위에 놓아두었던 탁자를 옮기자 남겨진 눌려진 자국에 대해 아이는 더럽다고 표현한 것이었다. 실제로 더러운 것이 있었다고 해도 내가 닦아주면 그만일 일이었다. 물론 성인이 남의 집에 와서 “너희 집이 더럽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례할 수 있다. 하지만 4살인 아이가 더럽다고 느껴지는 것에 대해서는 더럽다고 말할 정도의 자유는 주어도 되지 않을까? 그 정도의 표현은 허용되어야 아이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연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더럽다는 것도 더럽다고 말할 수 없다면 아이는 4살이라는 어린 나이부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자기 검열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는 것이 우리 문화이기 때문에 자신의 아이가 다른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며 자랑하는 듯한 말을 하는 것도 경계하는 경우가 많다. 5살인 우리 아이가 어떤 친구 앞에서 “OO(앞에 있던 친구)보다 내가 더 커요”라고 말을 한 적이 있다. 실제로 우리 아이가 더 키가 큰 상황이었다. 그러자 그 말은 들은 친구는 귀엽게 부정하며 아니라고 자신이 더 크다고 말을 하였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 친구의 어머니는 갈등상황을 무마하고자 “둘이 키가 똑같네”라고 말했다. 누가 봐도 우리 아이가 더 큰 상황에서 우리 아이는 사실과 다른 말에 강하게 부정하며 혼란에 빠졌다. 이럴 때 나도 난감하고 복잡한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과연 사실과 다른 말을 하면서까지 남을 배려하는 태도를 가르쳐야 하는 것인 걸까?’, ‘상대적으로 키가 작다는 사실이 정말 언급을 하면 안 될 사항인 걸까(그 아이도 평균적인 키였다)?’, ‘이렇게 키와 같은 아이들의 타고난 특성에 대해 어른들의 잣대로 좋고 나쁨을 평가하는 것이 오히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많은 생각이 그 짧은 시간동안 스쳐 지나갔다.
자기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억누르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자기 감정이나 생각 자체를 잘 모르게 되거나 건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어른들 중에서도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말로 표현하지 않고도 상대방이 알아주길 바라고 혼자 끙끙 앓거나, 건강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남을 비난하거나 화내거나 욱하는 어른들이 얼마나 많은가(그 중 하나가 바로 나다). 내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수용하고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건강한 인간관계의 첫 단추라는 것을, 이 첫 단추를 풀어야 다른 사람과도 서로 간의 존중에 기반한 관계를 쌓아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닫았던 것 같다.
우리 속담에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튀는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경우 예의가 없다거나 사회성이 부족하다며 안 좋게 보는 경우가 많다. 우리 대부분은 그 비난의 무게에 짓이겨져 모서리가 깎이고 깎여 동글동글하고 매끄러운 ‘예쁜 돌’이 되었다. 내가 남과 구분되어 존재할 수 있었던, 나만의 특성이 되어주던 모서리들은 모두 닳아 없어져버린 셈이다.
하지만 나는 내 딸 아이도, 내 딸 아이의 친구들도 매끈한 ‘예쁜 돌’이 되고 나서야 자신의 모서리가 다 닳아 없어진 것을 슬퍼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원래 모습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들 모두가 세상에서 가장 모나고 특이한 돌이 되어 자신의 모서리를 뽐냈으면 한다. 남이 가지지 못한 생각과 감성으로 다른 돌과 최대한 확실히 구분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모두 ‘모난 돌’들이 되어 서로의 모서리를 감상하고 즐기며 존중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