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 황제펭귄은 새끼를 알에서 부화시키기 위해 영하 50도의 혹한에서 4개월간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알을 품는다고 한다. 단 1분만 알을 놓쳐 얼음 바닥에 두게 되어도 순식간에 알이 얼어버리기 때문에 아빠 펭귄은 오직 새끼를 위해 먹지도 않고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선 채로 눈만 집어먹으며 수분을 보충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 펭귄은 부화 과정을 거치면서 몸무게가 절반 가까이 빠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를 낳고 내가 얻은 가장 경이롭고 신비한 것은 엄마로서의 마음이다. 내 목숨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이타적이고 강인할 수 있다는 것, 나의 마음 속에 우주를 담을 만큼의 큰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게 된다(일단 내가 17kg짜리 아이를 그렇게 번쩍번쩍 들고 걸어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왜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씨앗을 맺거나 새끼를 낳아 기르는 것이 그 생명의 목표 그 자체가 되는지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 절대적인 이타심을 주는 대가로 ‘나’라는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 유한한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얻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본능적으로 부모는 자기 자신보다 아이를 위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삶과 관계는 이런 본능을 넘어서 훨씬 더 복잡하다. 인간인 부모는 단순히 아이가 추위를 피할 수 있도록 하고 아이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줘야 할 뿐만 아니라, 직장생활을 하고 집을 마련하고 아이에게 교육을 시키고 아이를 사회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아이를 독립시키고 나서도 꽤 오랜 시간동안(이제는 100세시대니 근 50년이 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살아갈 수 있도록 건강과 경제력도 비축해야 한다. 자식은 그저 잘 생존해 또 자식을 낳아 키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이든 부모를 보살피고 봉양하고 집안의 대소사를 챙겨야 한다. 물론 자기 자식을 교육시키고 노후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부모와 마찬가지이다. 인간 사회에서는 부모의 희생은 곧 자식의 부채를 의미하기도 한다. 부모가 나 때문에 무릎이 아프고 허리가 아프다면 보살펴야 하고, 부모가 나를 교육시키느라 노후 대비를 하지 못했다면 봉양해야 한다. 다른 동물의 세계처럼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단순히 일방향이 아닌 것이다. 자식이 홀로 생존만 할 수 있으면 서로 독립하는 단기적인 관계도 아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동물적인 본능을 넘어서, 더 섬세하고 장기적이다.
육아휴직이 끝나고 복직을 하면서, 일과 육아를 모두 내가 해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육아휴직 전에 4명의 시터이모님을 거치면서 우여곡절을 겪었던 경험이 있다보니 다시 시터이모님을 구해 아이를 맡길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가 나를 너무 원하고 찾았다. 그래서 이제는 아이가 꽤 컸으니 내가 좀 힘들더라도 직접 아이를 등하원하며 케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사도우미 서비스만 일주일에 두 번 받기로 하고 그렇게 복직을 했다.
하지만 정확히 세 달 만에 두 손, 두 발을 들게 되었다. 남편은 스타트업 회사에 다니고 있어 워낙 바빠 평일에는 아이가 일어나기 전에 출근을 하고 저녁도 일주일에 두 번 같이 할 수 있을까 말까 였다. 그래서 평일엔 등원 준비시키기, 하원 시간에 맞춰 픽업하기, 같이 놀이터 가서 놀기, 저녁 준비해 먹이기, 씻기기는 모두 내 몫이었다. 내가 회사를 다니면서도 똑같이 자신과 시간을 보내니 아이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듯했다. 나도 처음에는 아이가 안정되어 있으니 시터이모님이 계실 때보다 정신적으로는 덜 스트레스를 받는 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나의 체력이었다. 아이의 하원 시간을 맞춰야 하니 아이가 자고나서 잔업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잠도 부족해졌다. 두 달 정도되자 안 걸리던 감기몸살을 앓으면서 골골대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왜 이렇게 피부가 거칠어졌냐, 왜 이렇게 피곤해보이냐 하는 말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의 질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조금만 징징거려도 나의 인내심에 금방 한계가 와 욱하기 일수였고, 저녁을 준비할 힘이 없어 반찬 가지수가 점점 줄어들고 부실해졌다.
이것은 지속가능한 모델이 아니었다. 한 두 달만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적어도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는 이렇게 손이 많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체력은 금새 바닥나기 시작했고 회사의 일은 쌓여만 가니, 나의 스트레스 지수도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이가 5살이 되고 많이 키웠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세 달 만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원대한 포부는 실패로 끝이 났다.
최근부터는 중개 플랫폼 어플로 놀이 돌봄 선생님을 구해 하원 후 2시간씩 아이를 맡기고 있다. 아직 시작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언니 같은 젊은 대학생 선생님이 와서 놀아주니 아이도 좋은 눈치이다. 나도 아이가 선생님과 노는 동안 잔업을 할 수 있으니, 잠은 충분히 잘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대학생 선생님들은 1년 이상씩 장기적으로 하는 경우는 드물고 2~3달씩 단기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 앞으로 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음식도 건강한 집밥을 해먹이려는 욕심을 내려놓았다. 반찬을 시켜먹거나 배달음식을 시키거나 외식을 하는 것으로 나의 에너지를 아낀다. 가사도우미 서비스도 일주일 3번 받는 것으로 횟수를 늘렸다.
내가 잠도 충분히 자고 쌓인 회사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줄어들고 에너지도 비축이 되니, 덜 예민해지고 좀 더 여유로운 태도로 아이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에게 정서적으로 더 안정된 엄마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와 함께 보내는 절대적인 시간은 줄어들고, 아이에게 따뜻한 집밥의 기억도 남길 수 없겠지만, 엄마인 내가 우선 살 것 같다. ‘내가 살아야 아이도 살릴 것 아닌가’라는 다소 속 편한(?) 생각으로 더 이상 나의 체력을 깎아먹는 희생은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마 나와 나의 아이는 앞으로도 정말 긴 세월 동안 부모 자식 관계로 지내게 될 것이다. 특히 앞으로 5년 정도는 아이를 돌보는 데 손이 많이 갈 것이고,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계속 옆에서 서포트해야 할 것이다. 황제펭귄의 부성애도 눈물 겹긴 하지만, 인간이 자식을 성장시키는 20년의 시간에 비하면 황제펭귄이 알을 품는 4개월쯤은 뭐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나를 갉아먹는 희생은 하지 않기로 한다. 엄마를 1년, 2년만 할 건 아니니까. 나와 아이의 욕구 사이에서 최대한 균형을 맞추고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엄마 모델’을 찾아 가야겠다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