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부탁에 유독 “NO”를 못하는 사람이다. 대학 시절에는 당시 연애를 막 시작했던 남자친구였던 남편이 거절을 너무 못하는 나를 보고 답답해서 옆에서 코칭까지 해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예를 들어 친구가 1시간을 남겨놓고 약속 시간을 바꾸자고 말하는데, 나는 사실 시간이 붕 떠서 애매하지만 거절을 하지도, 다른 옵션을 제시하지도 않고 알겠다고 대답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사정도 들어보면 이해되고 내가 불편을 조금만 감수하면 되는 것이니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주장을 다시 관철하려고 노력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이 귀찮기도 했다. ‘귀차니즘’에서 비롯한 순응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기 주관이 뚜렷한 남편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얘기를 해야 한다고 하며 친구에게 보낼 문자 내용까지 불러주며 거절을 권유했다. 그 권유도 거절하지 못했던 나는 남편의 말대로 친구에게 문자를 보내보았다. 근데 정말 다른 날 만나자고 거절을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닌가! 상대방은 기분 나빠하지도,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서로 다시 약속 시간을 조율하는 데 많은 에너지가 들지도 않았다. 당시의 나에겐 이렇게 거절을 해도 큰 저항 없이 가볍게 지나간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지금 생각하면 이것이 충격이었다는 것이 충격적이지만 말이다). 막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거절이 뭐가 그렇게 어려워 상대의 기준에 맞추고 살았던 걸까.
생각해보면 내가 모범생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귀차니즘’에서 비롯된 순응의 태도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선생님의 가르침에도, 친구의 말에도, 부모님의 양육에도 나는 대부분 순응했다. 공부하기, 선생님이 지시하는 사항 따르기, 친구와 싸우거나 친구로부터 미움 받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기, 부모님 말씀 잘 듣기와 같은 나에게 주어진 과제들은 ‘어차피 해야 하는 것’이므로, 저항하며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과제를 수행해내고자 했다. 나의 타고난 성향 탓도 있겠지만, 선택이 거의 주어지지 않는 학생으로서의 삶에 적응해가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효율적으로’ 순응한 대가는 나를 잃어버리는 것임을 그때는 몰랐다.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나의 목소리를 내보는 수고를 들이지 않는 대가로, 나는 나의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나의 목소리가 내면에 존재하지만, 밖으로 내지 않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이해하여 갈등을 줄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면의 목소리를 내지 않다보니, 그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져 나 자신조차 듣기 어려워져 버렸다. 내 마음 속에서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의 것인지, 남의 것인지, 내가 원하는 것인지, 남이 좋아하는 것인지 점점 분간이 어려워졌다.
남편이 계속해서 내 의사를 물어보고 다른 사람에 대한 거절을 권유하면서, 나의 ‘거절 못하는 병’은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나의 오랜 습성이었기 때문에 아직 나는 거절이 어렵다. 남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회사에서 특히 그렇다.
다른 업계도 마찬가지겠지만, 변호사 업계도 ‘서비스 마인드’가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서비스 마인드’란 사건이나 자문을 의뢰하는 고객의 요구 사항을 최대한 들어주는 것이다. 그 요구 사항에는 기한도 포함된다. 언제까지 해달라는 요청은 정말 불가피한 상황이 아닌 한 고객에게 맞추는 것이 불문율이다. 특히 로펌의 경우 자문료도 많이 내고 계속적으로 법률 자문을 의뢰하는 회사들이 굉장히 중요한 고객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웬만하면 회사 고객이 요청하는 일정에 맞추어 검토 의견서를 보내준다. 사건을 수임하는 파트너 변호사가 고객 유치나 관리를 위해 무리한 일정을 맞추겠다고 약속하게 되면, 그 밑에서 일하는 어쏘 변호사는 잠을 자지 않고서라도 무조건 그 일정에 맞춰야 하는 것이다. 회사 법무팀에서도 가능한 합리적으로 필요한 최소한의 시간은 고려하여 로펌에 검토 의견을 달라고 요청하지만, 때때로 급한 경우에는 무리한 일정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도 로펌에서 거절하거나 일정을 미루는 경우를 나는 거의 본적이 없다. 물론 그 정도가 얼마나 중요한 고객인지, 수임 금액이 얼마나 큰 건인지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대놓고 고객에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것은 변호사의 ‘바람직한’ 태도에 반한다고 인식된다.
이것은 고객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다. 로펌 내 어쏘 변호사와 파트너 변호사 사이에서도 적용된다. 정말 명백한 사정(또다른 중요한 업무를 거의 밤을 새서 해야 하는 상황 등)이 있지 않는 한 “그 검토를 할 수 없다”거나 “그 기한까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그렇게 말한 어쏘 변호사가 있다면 눈 밖에 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사내변호사는 이 불문율에서 자유로울까? 회사마다 분위기가 천차만별이긴 하겠지만,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업무 속도가 빠른 IT회사이기 때문에 사내 현업부서로부터 요청받은 기한을 단순히 업무시간 안에 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거절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다. 현업부서에서 이 기한 내에 법무 검토를 보내줄 수 있는지 ‘형식적으로는’ 물어오기는 하지만, 어려우니 미뤄달라고 했을 때 실제로 미룰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서비스 런칭 일자가 정해졌기 때문에, 임원 보고 날짜가 정해졌기 때문에 등의 이유로 나에게는 사실상 선택권이 없는 경우가 많다. 가끔은 왜 서비스 런칭 일자가, 임원 보고 날짜가 그때로 정해진 것인지, 왜 그때여야만 하는 것인지, 왜 프로젝트를 실제로 해내는 팀원들의 일정을 고려하지 않았는지를 따져 묻고 싶지만, 그렇게 되면 나의 상사가, 나의 동료가 대신 피곤해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입을 꾹 다문다.
내가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렇게 복잡하다. 변호사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인 ‘서비스 마인드’를 갖춘 ‘모범적인’ 변호사가 되고 싶어서, 내가 속한 팀에 피해를 주기 싫어서, 밥값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남들이 하는 만큼은 해야 할 것 같아서, 나 때문에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긴다는 비난을 듣기 싫어서 등등. 결국 끊임없이 나와 상관없이 짜여지는 일정과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면 부족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게 되고, 내가 부정당하는 그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부단히도 “YES”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만든 기준을 충족하였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나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하였을 때 결국 남는 것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잃어버린 나’이다. 일을 잘해낼수록 더 많은 일이 주어지니 타인의 기준을 완벽하게 맞추기는 불가능에 가까우며, 그런 순간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그리고 내 목소리를 밖으로 내거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을수록 나에게는 무엇이 중요한지,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잊게 된다. 회사를 위한 완벽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일보다 아이와의 시간이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느끼고는 있었지만, 실제 회사에서의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촉박하게 검토 요청을 해오는 것에 대해 거절을 하지도 않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상사에게 적극적으로 요구하며 투쟁하지도 않았으며, 세상이 나에게 요구하는 기한과 기준에 맞추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남은 것은 일과 육아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회사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에는 못 미친다는 무능감과 스스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공허감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무엇을 위해 회사를 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무엇 때문에 돈을 벌려고 하는지 그 근원을 알 수 없어 맹목적이었다. 회사를 그만 두고 싶다면 전업주부가 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하고 싶은 것인지, 이직을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명확히 알기 어려웠다. 심지어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했다. 나의 생각과 감정은 세상과의 작용과 반작용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나가는 것인데, 나는 세상을 받아들이기만 하다 보니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기 어렵게 된 것이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익숙해지려고 노력한 것은 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었다. 우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나에게 허락해주었다. 여러가지를 하다 보니 그만두는 것도 생기고 지속하는 것도 있었다. 이렇게 나의 선택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나의 의견과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아침마다 일기장을 펴고 나 자신과 대화하는 연습도 했다. 생각보다 나는 남의 이야기는 열심히 들으면서 정작 내 이야기는 듣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일기를 쓰면서 알게 되었다. 하루에 20분이라도 혼자 산책을 하며 온전히 현재의 내 감각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세상의 쉴 새 없는 요구들로부터 잠깐이라도 나를 해방시키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내가 나와 상호작용하고, 내 내면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현재의 나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갖음으로써, 나는 내 목소리를 밖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연습해갔다.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내 의견을 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을 터득해갔다.
남은 육아휴직을 모두 쓰고 다시 회사에 복직하니, 남에게 거절 못 하고 남의 기준에 맞추고 싶어하는 내 오랜 습성이 자꾸 내 세포 사이사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려고 한다. 타인의 요구에 내가 휘청거릴 때마다, 내 내면에서는 전투가 일어난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나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는 목소리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남의 인정이 아닌 아이와의 시간과 나의 꿈을 이루는 것이라는 목소리가 서로 부딪히며 마음을 괴롭게 한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내면의 목소리가 이전보다는 많이 커졌다는 것이다. 적어도 싸움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니 다행이다.
내가 회사에서의 요구를 모두 맞춘다면 회사에서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승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가로 나는 아이와의 시간을 반납해야 할 것이다. 아이가 커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하루 있었던 일을 도란도란 나누고, 아이가 엄마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충족시켜주며 나도 아이도 에너지를 얻는 시간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승진도, 임원의 자리도, 사회적인 명성도 아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저녁식사, 가족과 대화를 충분히 나눌 수 있는 시간, 같이 게임을 하며 웃는 시간, 아이와 누워 책을 읽으며 얘기하고 코와 이마를 맞대며 스킨십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이 시간을 지키기 위해 낮 시간 동안 전투적인 시간을 보낸다 한들, 일은 끝이 없기에 결국은 내가 거절을 할 줄 알아야만 이 ‘소박한 소망’을 성취할 수 있다. 내가 거절함으로써 돌아오는 불만의 목소리, 상사나 동료에 대한 죄책감이나 불편함, 무능감을 감내하기로 결단해야만 내가 진정으로 소망한 시간이 나에게로 올 수 있다.
아직 거절을 능숙하게 하려면 갈 길이 멀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못 맞추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괴로울 때, 아침에 일어나 일기장을 꺼내고 내 내면의 목소리를 받아 적는다. 왜 마음이 불편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불편하고,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한 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당장 뭘 해줄 수는 없어도 그냥 들어주기라도 하는 것이다. 그럼 그 순간만큼은 내가 다른 사람의, 회사의, 세상의 도구가 아닌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도구가 아닌 주인공이 되면, 어렵지만 이 말을 입 밖으로 낼 용기가 생긴다.
“그 마감기한 못 지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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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너 변호사, 어쏘 변호사는 누구인가요?
“파트너 변호사(Partner Lawyer)”는 보통 로펌의 구성원 변호사를 의미하며, “어쏘 변호사(Associate Lawyer)”는 로펌에 채용된 소속변호사를 말한다. 로펌이나 개인마다 차이는 있으나 “어쏘 변호사”는 “시니어 변호사(Senior Associate Lawyer)”를 거쳐 입사한 지 7년에서 10년 정도가 되면 “파트너 변호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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