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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변호사 Oct 27. 2024

그냥 놀겠습니다

    육아휴직 당시 아이는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평일에는 혼자 보낼 수 있는 6시간이 나에게 주어졌다. 굉장히 나에게 많은 자유시간이 주어질 줄 알았지만, 운동을 하고 점심을 챙겨먹고 일상적인 집안일을 하고 종종 생기는 행정업무나 각종 집안 관리를 하다보면 자유시간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1~2시간 정도였다. 

일을 하는 워킹맘이면 직장 때문에 시간이 없고, 일을 하지 않는 전업맘이면 다른 사람에게 집안일을 맡길 수 없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시간이 없다. 그래도 아이를 내가 직접 등하원하고 온전히 저녁을 같이 보내며 일상을 나눌 수 있고, 운동을 하며 내 건강을 챙길 수 있는 짬이 생기고, 이모님과의 관계를 매니징하는 데 소요되는 많은 힘을 들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육아휴직 생활은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다. 물론 이러한 만족감은 우리의 저축액이 줄어드는 것과 맞바꾼 것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이 만족스러울 수록 나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이 육아휴직 생활은 9개월 후면 끝날 시한부였기 때문이다. 후회 없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못해보았던 것을 다 시도해봐야 할 것 같았다. 나에게 주어진 평일 낮 1~2시간을 정말 제대로 보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나에게 시간이 주어져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고작 북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그저 늘어져 있고 싶어 집에서 유튜브를 봐도 볼 때는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재밌지만 막상 보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진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는 주말만 되면 하고 싶은 것이 10가지는 족히 넘는데, 나는 왜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걸까? 아이는 항상 하고 싶은 놀이가 넘친다. 우리 아이는 집 안에서만 식당 놀이, 미용실 놀이, 병원 놀이, 아기 돌보기 놀이, 비행기 놀이, 블럭 놀이, 퍼즐하기, 음악 들으며 춤추기, 악기 두드리기, 그림 그리기, 만들기, 책 읽기, 카드 게임, 보드게임 등등 수십 가지 놀이를 할 수 있다. 심지어 밥을 먹을 때에도 ‘맛있게 먹는 법 알려주기’ 놀이를 하고 싶어하고, 샤워를 할 때에도 ‘샤워볼 빨래하기’ 놀이를 하겠다고 조른다. 놀이터에서도 그렇게 다양한 놀이를 할 수 있는지 몰랐다. 미끄럼틀, 그네, 시소는 물론이고,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숨바꼭질, 발레 교실 놀이, 공주님 파티 놀이, 소꿉놀이, 초록색 블록 안 밟기 놀이(초록색 블록이 토끼 굴이란다), 유치원 놀이 등 무궁무진하다. 놀이공원, 키즈카페, 수영장, 썰매장, 고궁, 맛집, 디저트 가게 가기와 각종 페스티벌, 버스킹 구경가기, 키즈 뮤지컬, 영화 보러가기, 자전거, 킥보드 타기, 한강에서 돗자리 펴고 놀기, 연 날리기, 비눗방울 놀이는 덤이다. 그리고 놀 때는 얼마나 열정적인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한다. 신나서 입은 쉴 새 없이 떠든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시간이 없어 못 노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놀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의미 없이 재미만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냥 앉아있거나 걷는 것도 잘 못했다. 운전을 할 때에도 자기계발 유튜브 영상이라도 들어야 했고, 지하철을 탈 때에도 생필품을 사거나 아이에게 필요한 물품을 검색해보곤 했다. 아이와 버스킹 공연을 볼 때에도 두 곡 이상을 ‘듣기만’ 하지를 못했다. 노래를 듣다가도 아이의 사진을 찍거나 부모님께 안부 메시지를 보내거나 인터넷 장을 보거나 카톡에 답장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색하고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도 육아휴직 동안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아까우니 집에서 핸드폰만 보기보다는 억지로라도 하고 싶은 것을 찾으려고 했다. 곳곳에 있는 북카페 찾아다니기 정도만 하다가 더 적극적으로 놀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혼자 노들섬에 가서 컵라면을 먹고 멍 때리기도 하고, 그동안 저장해두었던 예쁜 카페나 소품샵을 찾아가보기도 하고, 전시를 보기도 하고, 글쓰기를 해보기도 하고, 유튜브 영상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혼자 쇼핑을 해보기도 하고, 북토크를 가보기도 하고, 혼자 집에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이 경험들이 어떻게 쓰일 수 있을까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나의 본능을 따라 재미만을 생각하며 나만의 놀이를 찾아다녔다.

    시도했던 것들이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막상 해보면 재미가 없고 이질감이 드는 것들도 많았다. 예쁜 카페나 소품샵을 찾아다니는 것, 유튜브 영상을 만드는 것, 혼자 쇼핑하는 것이 그랬다. 시간이 생기면 너무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었는데, 막상 해보니 내가 정말 즐기는 것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도장 깨기 하듯, 지도에 저장해둔 장소들을 의무감에 가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거칠수록 내가 정말 즐거워할 만한 것이 무엇일지에 대한 ‘감’이 점점 좋아졌다. 나는 책을 보거나 나의 생각을 끄적이기 좋아했고, 음악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전시공간을 좋아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더풀 라이프”나 “괴물” 같은 담담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인간의 약한 모습을 비추는 영화를 좋아했다. 음악이나 영상을 통해 나의 감정과 생각이 기존의 것에서 확장됨을 느끼고 그것을 글로 남길 때, 나는 충만함을 느꼈다. 

    이렇게 내가 즐거워하는 것과 나만의 취향을 찾아내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생산적인 활동도, 어떤 목표를 위한 의미 있는 행동도 아니었다. 하지만 순수한 나 자체를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 임무, 과제와 상관없이, ‘나’라는 사람 자체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나의 아이에게 매일 해주듯, 나 자신에게도 무엇을 하고 싶냐고, 뭘 하면 즐겁겠냐고 물어봐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 자체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나 자신에게도 이렇게 다정할 수 있었다니. 나와 난생 처음으로 친해지는 기분이었다.

    최근 남편이 직장일에 지쳐 번아웃이 왔다. 그래서 남편에게도 주말에 반나절은 본인과의 데이트를 하고 오라고 했다. 놀이 시간을 강제한 것이다. 처음에는 남편이 그 반나절 동안 계획을 세우거나 강의를 듣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절대 안 된다고, 그 시간만큼은 순수한 재미를 위해서만 쓰라고 했다. 처음에는 뭘 할지 몰라 디저트 카페 정도 가거나 한강에서 멍 때리고 오더니, 요즘에는 하고 싶은 것이 봇물 터지듯 많다. 악기도 배우고 싶고, 춤도 배우고 싶고, 게임도 하고 싶고, 검도도 하고 싶단다. 20대 때 하고 싶었던 것들인데 바쁜 일상에 치여 잊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과거 꿈 많던 20대 시절의 자신과 만난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다 하라고 하고 싶지만, 시간도, 에너지도, 돈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남편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한 가지씩 하다 보면, 자신이 정말 즐기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직장과 육아, 집안일을 모두 다 해내려면 자투리 시간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 구멍 없이 매일매일 무사히 지나가려면 수많은 ‘to do list’를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핸드폰 메모장에는 항상 해야 할 일들이 빼곡하다. 하지만 이렇게 머리로만 살다보면, 나의 직감이나 본능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낀다.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은 맞는데,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건가 싶고, 근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 때가 생긴다. 머리로는 맞게 살고 있는데, 내 몸과 직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럴 때는 일단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이 반응하는 대로 따라가는 게 좋은 것 같다. 머리로는 왜 하는 것인지 의미를 찾지 못하더라도, 내가 순수하게 설레는 일을 따라가다 보면 그 길 끝에서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나를 다정하게 바라봐주고 귀 기울여주다보면 그 자체로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지친 삶 속에서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은 나를 채찍질하는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나의 롤모델도 아니고, 나의 계획표도 아니었다. 나 자신에게 허용한 작은 일탈, 나만의 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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