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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변호사 Oct 27. 2024

못생긴 염소 한 마리 키우겠습니다

    나에게는 무대 공포증이 있다.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거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여 목소리가 심하게 떨린다. 이 증상이 처음 나타난 때는 고3 수업시간이었다. 앉은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책을 읽고 있는데, 내 차례가 되자 갑자기 염소 한 마리가 내 목젖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울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긴장이 되어도 목소리가 떨리지는 않았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오는 바이브레이션에 몹시 당황했다. 수업시간이 끝나고 친구들이 따라하며 놀릴 때까지만 해도 어쩌다 한 번 생긴 헤프닝이겠거니 하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발표하거나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이 염소 친구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도대체 원인이 뭘까? 수험생활의 압박감? 목소리가 작기 때문에 크게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 다른 사람에게 똑부러져 보이고 싶은 욕심?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두려움? 여러 이유들을 떠올려보고 어린시절 상처까지 쫓아가보았지만, 염소가 어디서 왜 나타났는지에 대한 대답을 해줄리는 만무했다. 어쨌든 나는 내 목이 이렇게 통제불가능한 기관이었다는 사실을 여러 상황과 공간에서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확인하는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떨리는 목소리가 부끄럽고 당황스러운 정도였지만, 이 경험이 반복될 수록 증상은 더 심해졌다. 내 목젖에 염소가 찾아왔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나의 정신은 혼미해져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나의 염소는 이제 내 목뿐만 아니라 머릿속과 망막과 온 몸의 신경세포들을 마비시키며 자유롭게 뛰어다녔다. 그 순간 내 몸의 주인은 더이상 내가 아니었다.

    이런 나의 증상은 대학생활과 직장생활에서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대학생활 때에는 발표수업이 없는 수업만 골라 들었고, 앞에 나가서 말해야 하는 역할을 맡는 것은 무조건 피했다. 나는 내 안의 염소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듣고 싶은 수업, 해보고 싶은 동아리 활동, 맡아보고 싶은 역할이나 업무 모두 놓아버려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쟁취하기 위해 달려가기 보다는 내가 못하는 것을 피하는 데 급급한 삶을 살게 되었다. 나의 염소가 매고 있던 목줄이 내 목에 채워져, 목줄이 걸려있는 말뚝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 것만 같았다.

    그러다 변호사 6년차에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아이를 임신했을 때에도, 출산한 후에도 나의 공포증은 변함없이 계속되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임신과 출산이라는 큰 사건을 겪고있던 나는 무대공포증을 신경 쓸 여력이 없어졌다. 여전히 긴장되고 떨리긴하지만, 이걸 길게 생각할 에너지도 힘도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뭐', '출산에 비하면 이 민망함은 아무것도 아니지 뭐', '이게 나인데 어쩌겠어' 하고 체념하게 되었다. 염소에 분노하고 억울해하고 슬퍼하고 민망한 감정을 느낄 시간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렇게 급격히 떨어진 에너지 상태로 인해 염소의 존재를 힘없이 받아들이며 민망한 순간들을 어찌어찌 보낸지 1년 반 정도 되었을 무렵,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17년 동안 내가 여러 사람이 있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얘기할 때마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던 염소가 40분의 발표시간 동안 잠자코 조용히 있었던 것이다. 물론 Zoom을 통해서 하는 발표였고 나는 대본을 읽는 로봇 같았지만(실제로 미리 준비한 대본을 영혼 없이 읽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 자체가 곤욕이었던 나에게는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 염소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다. 불쑥불쑥 나타나 나를 여전히 당황시키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강도가 많이 줄었다. 온 정신과 신경이 마비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횡설수설할 때가 아직 있지만, 그래도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내 목소리를 찾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자책하고 미워하는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아쉬운 모습이긴 하지만, 그저 내 안의 염소를 받아들일 뿐이다. 

    내가 약물이나 인지행동 치료를 따로 받았던 것도 아닌데, 17년만에 염소가 왜 갑자기 얌전해졌을까? 나는 ‘내가 이 골치거리인 염소를 포함한 나의 부족한 모습을 부정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저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추측한다. 17년 전에 느닷 없이 고3이라는 중요한 시기에 염소가 왜 나타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이 염소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판단이 두려운 아주 아주 연약한 내 자아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그 연약한 자아를 보살펴주고 들여다봐주지 않자 너무 힘들었던 이 작은 아이는 나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정확히는 나에게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받기 위해서 그렇게 울어댔던 것 같다. 타인의 평가기준에 나를 맞추려고만 하지 말고, 힘들어하는 나를 좀 알아봐달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누가 나에게 이런 상처를 주었는지 골몰하기만 했을 뿐, 나 스스로가 이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안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남에게 받은 상처에 내가 생채기를 끊임없이 내고 있다는 사실을, 심지어 내가 스스로 상처를 내기도 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 그랬구나', '연약한 내가 거기 있었구나', '힘들었구나' 이런 말들이 필요할 뿐이었는데.

    아직 염소가 종종 울어대는 것을 보니, 내 안에 어루만져줄 상처가 남았나보다. 나에 대한 부정적인 말, 걱정하는 말, 비난하는 말 모두 상대의 입장에서는 일리가 있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나만큼은 그로부터 상처받은 보드랍고 연약한 나를 있는 그대로 안아주려고 한다. 약해빠진 나를 '못났다' 생각하지 말고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봐주려고 한다. 항상 평가받는 세상에서 나만은 내 편이 되어주어도 되지 않을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잘 해주는 공감의 말, 응원의 말을 나 자신에게는 해주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평가받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긴장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좋은 평가를 받지 않아도 괜찮다고, 너 자체로도 충분히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람에게는 쉽게 내뱉지 못했던, 아니 상상도 못했던 비난의 말을 나 자신에게는 시도때도 없이 했다. 왜 그렇게 덜 떨어진 말을 했냐고, 왜 더 센스 있는 리액션을 못했냐고, 왜 이렇게 게으르냐고, 똑부러지지 못하냐고, 소심하냐고, 인간관계를 더 챙기지 못하냐고 나에게 끊임없는 비난의 말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아무리 남들이 나를 못마땅하게 보고 비난을 해도, 나만큼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싶다. 아직 내 안에 있는 연약한 어린 아이를 안아주고 싶다. 나의 염소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하지 않고, 내쫓으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내 마음 한 켠을 이 못난이 염소에게 내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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