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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량변호사 Oct 27. 2024

또 삽질하겠습니다

    나는 로스쿨생이던 시절, 그리고 사내변호사가 되고 나서도 무수히 많은 ‘삽질’을 해왔다. 어떤 뚜렷한 보상이나 결과물 없는 행위들을 쓸모 없는 행위, 즉 ‘삽질’로 정의한다면 그렇다. 근 10년 간 내가 ‘삽질’한 것들을 나열해보자면, 미술관 도슨트(작품해설 봉사) 해보기, 미술학원 다니기, 환경 문제에 대한 세미나 듣기, 조세, 후견인제도에 대한 강의 듣기, 부동산 투자하기, 유튜브 해보기 등등이다. 이 경험들은 내가 IT 회사의 사내변호사로 일을 하는 데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았으며, 나의 새로운 진로가 되어주지도, 돈을 가져다주지도, 연봉을 올려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변호사 일을 계속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고 싶은 다른 것이 있어 새로운 도전을 할 수도 없었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삽질’뿐이었다. 가만히 있기에는 괴롭고 무엇을 하고싶은지는 알 수 없어 방황한 시간들이었다. 한 번 뿐인 나의 20대, 30대의 소중한 시간을 써가며 해온 이 ‘쓸모 없는 일’들은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저 허투루 써버린, 애매하게 남겨져 버리게 될 자투리 천 같은 시간일 뿐인 걸까. 

    나는 IT 회사 사내변호사로 9년째 일하고 있다. 여러 종류의 업무가 있기는 하지만 IT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법무팀의 일은 새롭게 출시하려는 서비스가 법적으로 문제가 없도록 법률 자문을 하는 것이다. 새로 출시할 서비스가 법적으로 금지되는 것은 아닌지, 인허가나 등록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계약서, 약관, 동의서 등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내부적으로 이사회나 주주총회 결의, 내규 마련이 필요할지, 고객이 보게 될 화면(UX)에 어떤 고지사항이 들어가야 할지 등을 종합적으로 보게 된다. 한 프로젝트의 멤버가 되어 법무 파트를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사내변호사로서 업무를 하며 가장 어려운 경우는 사업부서의 목표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서비스를 내놓고 싶은 것인지, 그 서비스를 통해 어떤 효과를 얻고 싶은 것인지에 대한 이미지가 선명하지 않을 때, 사내변호사는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사업부서에서 구체적인 서비스의 형태를 제시하지 못하고 추상적으로만 서비스 형태를 그리고 있는 경우, 고객에게 제공하고 싶은 서비스의 카테고리정도만 제시하고 법적으로 가능한 서비스의 형태와 법적으로 불가능한 서비스의 형태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법무팀에게 역으로 물어오는 경우가 꽤 있다. 법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으니, 법적으로 가능한 것을 말해주면 그 안에서 서비스를 구체적으로 구상하겠다는 접근 방법이다. 그렇게 되면 법무팀이 검토해야 할 대상은 산더미처럼 늘어난다. 그 카테고리 안에서 있을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해 법적 검토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법만 찾아보면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방대한 자료를 찾아보며 해석에 해석을 거듭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한가지 경우를 검토하는 것에도 공수가 많이 드는데, 이렇게 되면 업무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 모든 검토가 쓸모가 있는 것이라면 그래도 위안이 되지만, 보통 이러한 경우 나중에 보면 쓸모 없는 검토를 했던 것이 70~80%가 되는 경우도 있다. 결국 나는 ‘삽질’을 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업부서를 만나는지, 담당자(보통 Product Manager나 Product Owner가 서비스나 상품에 대한 기획을 담당한다)가 누구인지에 따라 법무팀의 업무량은 고무줄처럼 엄청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다. ‘삽질’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해주는 담당자는 보통 그 업계 실무 경험이 많은,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동종의 또는 유사한 종류의 서비스 기획을 해보았던 사람이나 계속해서 업계 동향을 열심히 공부한 기획자들은 업계의 흐름을 알고 다른 회사의 비슷한 서비스들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있다. 이런 경우 그 기획자가 대강의 관련 법적 규제들까지 알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이럴 때에는 오히려 나도 몰랐던 법적 규제를 역으로 배우게 되기도 한다.

    이렇듯 배가 산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는 기업도 비슷한 업계에서 다양한 실무 경험을 하며 내공을 축적한 사람이 필요하다. ‘삽질’을 줄여나가기 위해서는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경험을 토대로 쌓아온 지식을 통해 서비스나 상품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고히 알고 선명하게 이미지화할 수 있는 사람이 프로젝트 팀 전체를 분명하게, 효율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기업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개인 역시 인생의 목표를 위해 자신의 삶을 이끌어갈 때에도 본인의 목표나 방향성이 명확해야 배가 산으로 가지 않는다. 본인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정확히 알고 그 삶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릴 줄 알아야 에너지를 제대로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날 것 그대로의 경험이 필요하다. 기업에서 업계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경험을 통해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이 필요한지, 어떤 경험이 더 필요한지, 어떤 장애물을 극복해나가야 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나는 20대 중반까지 이 ‘경험’을 충분히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로스쿨에 들어가고, 직장생활을 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내 인생의 방향성을 명확히 잡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그럼 나는 이 방황을 끝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사내변호사로서 일을 할 때 가장 성장을 많이 했던 순간은 이 분야가 마찬가지로 처음인 Product Manager나 Product Owner를 만나 함께 ‘삽질’을 열심히 했던 때인 것 같다. 기획자도 처음이라 잘 모르고 나도 처음이라 잘 모르니, 모든 경우의 수, 모든 단계 하나하나를 몸으로 부딪혀가며 느끼고 배워나갔을 때, 그 서비스업과 법 규제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그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었다(물론, 다시 하고싶지는 않다). 

    개인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에는 맨땅에 헤딩하듯 몸으로 부딪혀가며 경험을 축적하여야, 내가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지,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지, 무엇이 나에게 의미를 주는지 알게 되는 것 같다. ‘삽질’로 보이는 경험을 통한 나의 데이터를 쌓을수록, 그 다음에는 그 데이터를 지표 삼아 조금 더 좁게 과녁을 만들어 활을 쏘아볼 수 있다. 그렇게 더 좁게, 또 더 좁게 과녁을 그릴 수 있게 되면 내 인생이 추구해나갈 방향성과 가치, 철학이 점점 더 또렷해지지 않을까. 그럼 나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위해 나의 에너지와 시간을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아예 방향도 못 잡고 감도 없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경험을 쌓기 위해 ‘삽질’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동안 틈날 때마다 변호사일 외의 분야를 접한 것은 나에 대한 경험치를 쌓아가는 과정이었다. 로스쿨을 다닐 때는 다른 동기들은 법서를 한글자라도 더 보려고 하는 시간에 미술관에서 전시 작품을 관객들에게 해석해주는 도슨트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었고, 첫번째 직장과 두번째 직장 사이 공백기에는 미술학원을 주3회 다니며 열심히 미술을 다시 배워보기도 했었다. 첫번째 직장을 다닐 때에는 회사 업무시간이 끝나고 나면, 회사일과 전혀 상관없는 환경 관련 세미나를 들으러 가보기도 하고 조세나 후견인제도에 대한 강의를 듣기도 했다. 수직적이고 보수적인 문화의 첫번째 직장과 다른 분위기에서 일을 해보고 싶어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사기업으로 이직을 하기도 했다. 두번째 직장을 다닐 때에는 틈틈이 부동산 공부를 하고 부동산 투자를 해보기도 하고, 휴직 중에는 육아, 공부와 관련된 유튜브 컨텐츠를 제작해 업로드해보기도 했다. 

    아직 지금까지 했던 경험들 속에서 나의 진로를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삽질’을 할수록 나에 대한 데이터가 축적된다는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을 좋아하고, 같이 일하는 것보다는 혼자 일하는 것을 좋아하고, 남들에게 좋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좋아하고, 글쓰는 것을 좋아하고, 아이들과 대화하고 아이들을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고, 다양성이 존중받는 분위기를 좋아하고, 자연이든 예술이든 문구이든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을 좋아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직접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막상 해보니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환경 분야의 경우 내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맞지만 환경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일은 또다른 차원의 세상이라는 것을 관련 모임을 가보며 알게 되었다. 나는 미술작품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지, 직접 미술작품을 만들어내거나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일에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도 깨닫았다. 경직된 공공기관의 분위기보다는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IT회사가 나에게 더 맞았지만, 회사에 소속되어 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보다 작더라도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의사결정 할 수 있는 일들이 나에게 더 큰 보람을 가져다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무수한 방황의 시간 속에서 관심있는 것은 일단 직접 해봐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 실천으로 나아가지 않는 머리 속 고민은 나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인생은 어떤 결과물을 위한 여정이라기 보다는, 나에 대한 데이터를 쌓아가고 이를 통해 나만의 인생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라도 또 ‘삽질’할까 주저하지 말고, 시간을 허비할까 소심해지지 말고, 남들에게 뒤쳐질까 실체 없는 두려움에 떨지 말고, ‘삽질’이 당연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아니, ‘삽질’이야말로 남의 인생이 아닌 내 인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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