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는 못 말리는 엄마 껌딱지다. 내가 휴직하기 전 한창 나와 못 있어 안달일 시기에는 집 안에서도 계속 자신의 시야에 내가 보여야 했고, 안 보이면 다급한 목소리로 ‘엄마! 엄마!’하며 다다다 달려왔다. 내가 샤워할 때도, 화장실 일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의 모습이 너무 불안해보여서 분리불안증이 있나 걱정될 정도였다. 어쩌다 회식을 해서 아이가 잠을 잘 시간에 집에 못 갈 때에는 10시쯤이 되면 어김없이 전화가 울렸다. 남편이 저녁 내내 엄마를 찾는 아이를 달래며 놀아주다가도 아이가 졸리면 시작되는 대성통곡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나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엄마를 보러 가자고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밤길을 나서야 아이는 울음을 그친다고 했다. 그렇게 밤길을 정처 없이 걸으며 아이도 남편도 기진맥진해진 모습을 몇 차례 보다 보니 나는 신데렐라처럼 10시까지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 아이가 엄마 껌딱지인 얘기가 나오면 우리 엄마가 항상 하는 얘기가 있다. “너도 그랬어. 심지어 엄마는 화장실에서 일을 볼 때에도 너를 무릎에 앉혀놓아야 했지.” 맞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 엄마가 이 세상 최고이고 엄마만 있으면 되었던 때가. 나는 유치원에서 캠프를 갔을 때에도 밤에 유일하게 바로 잠에 들지 못하고 엄마를 찾으며 울던 아이였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촌언니가 같이 자자고 해도 엄마와 따로 자는 것이 싫어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땐 엄마 품에 안겨 울며 위로 받곤 했다. 엄마 품속에서 아기처럼 안겨 울 때의 엄마의 따뜻한 온기, 엄마의 체취, 엄마의 목소리, 엄마의 살결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 내 삶에서 엄마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에 비하면 매우 작다. 물론 나의 생활방식, 성격, 인간관계에 엄마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현재의 내가 생활하는 데 있어 엄마와 대화하고 함께 하는 시간은 아주 일부분이다. 엄마가 없으면 살 수 없었던 나는 도대체 언제 엄마로부터 독립을 하게 된 걸까.
보통 사춘기 때 그 독립을 시작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나는 사춘기가 늦게 왔었다. 성인이 되어 대학교, 로스쿨을 다닐 때가 되어서야 부모님과의 갈등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말 잘 듣는 딸이었던 나는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고 친구 관계도 원만한 모범생이었다. 진로도 엄마, 아빠가 추천해주는 대로 결정했다. 엄마는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고, 아빠는 크진 않지만 당신의 방식대로 자수성가한 사업가였다. 엄마와 아빠의 말을 안 들을 합리적인 이유가 없었다. 나를 사랑하고 당신들의 삶을 충실히 사는 어른들이었기 때문에 그 말을 안 따르는 것은 내 손해인 것 같았다. 엄마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하지 않던가. 어린 아이 때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부모님의 생각을 따르다보면 내 삶은 저절로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법대를 선택하게 된 것도 부모님의 추천 때문이었다. 초등학생 때 처음 가졌던 장래희망인 디자이너라는 꿈을 엄마께 말씀드렸을 때 미술은 취미로도 할 수 있고 재능이 뛰어나도 어려운 분야라고 하시며 대놓고 반대를 하진 않으셨지만 암묵적으로 반대의 의사표시를 하셨다. 말 잘 듣던 나는 ‘그래도 나는 할 수 있어’라는 패기는 감히 꿈꾸지도 못하고 ‘내가 그림을 엄청 잘 그리는 것도 아니니까’라고 생각하며 바로 그 꿈을 접었다. 중학교 때에는 외교관이라는 꿈을 가졌었는데 ‘가족들과 떨어져 살 텐데 괜찮겠어?’라는 아빠의 질문에 바로 자신이 없어진 나는 그 꿈을 접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경영학과에 진학해 아빠와 같은 사업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지만, 조직생활과 사업을 직접 경험한 아빠는 여자가 조직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말씀하시며 경제학과에 진학해 행정고시를 보거나 법대에 진학해 전문직이 되는 것을 추천하셨다. 차분하고 여리고 공부가 꽤 적성에 맞는 나의 성격도 감안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둘 다 그렇게 끌리는 진로는 아니었지만 내가 아직 경험해보지 않았던 경험을 아빠는 해보셨기에 ‘내 생각보다 아빠의 생각이 더 현명한 거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법대에 진학해 자격증이라는 ‘무기’를 장착하면 그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법대에 진학했다.
공부 자체가 적성에 잘 맞았던 나는 법대 공부도 나름 재밌었다. 민법, 형법, 헌법 등 사회가 합의한 규범을 배우며 내가 살고있는 사회를 여러 층위와 다양한 각도에서 알아갈 수 있었다. 새로운 배움을 즐기는 나에게 법학은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알려주는 창구였다. 하지만 문제는 졸업 이후 진로를 결정할 때 발생했다. 단지 자격증만 따야겠다는 생각으로 로스쿨에 진학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 다음 목적지가 없었다. 판사, 검사 또는 인권변호사가 되어 사회 정의를 이룩하겠다는 거룩한 사명감도 없었고, 그렇다고 법조인으로서 사회적인 인정을 받겠다는 야망도 없었다. 그래도 ‘실제로 일해보면 원하는 진로가 생기겠지’라고 스스로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나에게 맞는 길을 찾는 간절한 마음으로 방학마다 정말 다양한 곳(로펌, 검찰, 기업, 정부기관 등)에서 인턴 경험을 했다. 하지만 한 학기씩 지나갈수록, 인턴 경험을 해볼수록 선명해진 것은 나와 법조계가 그다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세상을 보는 창구가 되어주었던 법이 이제 나를 작은 공간에 가두는 창살이 된 것만 같았다. 수없이 많은 법을 계속해서 습득해나가고 그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일이 나에게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절망적이었던 것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어떤 도전을 해보고 싶은지를 알 수가 없어, 이 길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도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법대에서 4년 간 공부하고 바로 로스쿨에 진학해 다른 경험은 해본 적이 없었다. 선택할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일단 로스쿨은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증은 따는 것으로 나는 이 중차대한 고민을 유예했다. 수많은 대학생들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로스쿨에 입학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다들 변호사가 좋은 직업이라고 하니 졸업을 1~2년을 앞두고 변호사가 되기를 멈추는 것은 아까웠고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학비를 대주신 부모님께도 할 말이 없었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른 채 그 지난한 수험생활을 하는 것은 매우 고역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변호사가 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이렇게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해 확신이 없어지면서 나의 불안감은 부모님에 대한 원망으로 번져갔다. 지금까지 정말 모범적으로 열심히 공부해왔는데 그게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니. 나는 그 원인을 찾아야만 했고 부끄럽지만 당시 나는 그 원인을 부모님에게서 찾았던 것 같다. 부모님이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충분히 지지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판단보다 부모님의 판단이 더 맞다고 여겼기 때문에, 부모님이 내가 모험을 하기보다 안정된 길로 가길 원했기 때문에, 내가 뭐든지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의 내적인 욕구를 바라봐 주기보다는 부모님이 안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왔기 때문에 이런 잘못된 결과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쯤부터 부모님의 조언이 더 이상 와닿지 않았다. 믿고 의지했던 부모님의 조언은 내 삶을 전혀 책임져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던 부모님은 사실 몰랐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견딜 수 없는지, 어떤 것이 내 인생에서 가치가 있는지, 내가 어떻게 변할지,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그건 내 인생을 살아가는 나만이 알거나 대처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부모님의 조언을 듣고 내가 선택하는 행위를 하긴 했지만, 실질적으로 나의 책임으로 온전히 선택해온 삶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부모님의 판단에 기대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 결과 나는 내 삶에서 주체성을 잃었다. 나는 내 삶에 당당히 책임을 지지 않고 부모님에게 그 책임을 미루고 있었다. 나는 내 삶을 온전히 살아내고 있지 않았다.
내 미래에 대한 불안과 후회, 그리고 부모님을 향한 원망이 뒤섞여 20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때늦은 반항기가 찾아왔다. 엄마가 나와 엄마를 동일시하는 말을 하면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엄마는 성인이 된 이후로도 나의 학업이나 진로에 대한 결정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자주 “우리가 그래서 그때 그런 결정을 했었잖아”, “그래서 우리가 그 직장을 선택했잖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내가 혼자서 내 삶의 중요한 선택들을 해온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함께 선택을 해온 것이었다. 전업 주부였던 엄마의 삶은 곧 나와 동생이었다. 우리를 위해 쉴 새 없이 집안일을 하고 음식을 하고 학원을 데려다주고 가족관계 속에서 있었을 수많은 갈등을 감내하셨을 것이다. 회사에 30년 근속하는 것이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딸들을 30년간 먹이고 재우는 데 얼머나 큰 인내가 필요했을까. 엄마의 인생 중 30년 넘는 시간을 바쳐 가꾸어 온 정원이 우리였다. 그러니 우리의 중요한 결정에 항상 함께 하고 싶어했고 엄마의 딸들이 고생하지 않고 안정되고 편안한 상태에 있기를 바랐다. 엄마가 평생 가꾸어 온 꽃과 나무와 풀들이 햇살과 이슬만을 머금고 평화롭게 지내는 모습을 보며 노년을 맞이하고 싶으신 것 같았다. 거센 폭풍우와 서리를 맞는 것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으신 듯했다. 하지만 정원의 꽃이나 나무가 아닌 정원수로서 나만의 정원을 가꿔야 하는 나는 엄마가 나와 엄마를 동일시하는 말을 할 때면 ‘왜 엄마는 나와 엄마를 분리하지 못하고, 엄마와 다른 나만의 의지와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존중하지 못할까’라는 원망이 올라왔다. 나를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할 때도 필요 이상의 슬픔이 나를 덮쳐왔다. 아빠는 내가 사용한 공용공간을 깨끗이 치우지 않거나 맏이로서 부모님이나 동생을 챙기지 않고 나의 일에만 몰두하거나 아빠가 요청한 일을 사려 깊게 우선적으로 처리하지 않을 때 이기적이라며 비난하였다. 이전의 나는 억울하긴 해도 잘못을 고치기로 하고 사랑의 조언으로 받아들였을텐데, 때늦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던 나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그 사랑의 조언 이면에 있는 아빠의 나에 대한 시선이 나를 매우 아프게 했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나를 부족한 사람으로 바라보고 걱정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아빠의 눈에 비친 나는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갈 강인함이 부족했고 아빠가 끝없이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러한 나에 대한 시선은 아빠의 감정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아빠는 아빠의 나이가 이렇게 들어서까지 계속해서 딸을 보호하고 걱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답답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이제 나이가 점점 들어가는 아빠가 기댈 수 있는 믿음직한 어른이 되지 않는 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러한 아빠의 마음이 느껴지니 나는 계속해서 한없이 작아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화가 났다. 그렇게 나를 계속 부족하다고 생각하니 내가 나만의 줏대를 가지고 패기 있게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부모님에 대한 원망의 마음, 원망하는 나를 자책하는 마음, 부모님과 멀어지고 싶은 마음, 부모님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마음, 부모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 부모님을 아무 불순물 없이 사랑만 하고 싶은 마음,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에게 줄 수 없는 무한한 희생과 사랑을 준 부모님에 대해 보은해야 한다는 마음이 온데 합쳐져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을 부모님과 갈등하며 서로 정을 떼고 헤어질 준비를 하게 된 걸까. 나는 결국 부모님과의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가 어려 친정 부모님의 도움이 필요한 시기에 내가 30년간 살던 동네에서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갔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독립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남은 육아휴직을 다시 사용할 무렵이었다.
부모님과 좀 떨어져 지내기 시작하자, 부모님과 나 사이에 뿌연 안개처럼 엉켜있던 여러 감정들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부모님을 원망한 것은 사실 내가 부모님을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엄마만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 나도 부모님과 나를 동일시하고 있었다. 부모님을 나와는 별개의 인격체로 대하지 못하고 ‘왜 우리 부모님은 나를 항상 부족한 사람으로 보고 조언을 해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할까’,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존중을 해주지 않는 것일까’하고 나만의 잣대로 부모님을 평가했다. 부모님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모의 모습에 맞게 바뀌기를 바라왔다. 그리고 내가 세운 이상적인 모습에 우리 부모님이 부합하지 않을 때 나는 실망하고 화가 났다. 우리 아빠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서로가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상대가 내 마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길 바랐다. 그리고 상대가 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고 슬프고 화가 났다. 하지만 내가 너무 사랑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존재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이 든다는 사실 자체가 또 한 번 자신을 날카롭게 아프게 했다.
이렇게 나의 마음 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자, 비로소 정신적인 독립을 할 준비, 다른 말로 하면 부모님을 실망시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의 나는 부모님이 나에게 당신의 기준만 들이대는 것에 불만만 가지고 짜증을 냈다. 하지만 막상 부모님의 조언을 따르지 않는 것은 어려워했고 따르지 않았을 때 마음이 매우 불편하고 불안했다. 내 인생이 잘못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키워준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당신의 기준은 나의 기준과는 다르기 때문에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그 대화의 과정에서 언성이 높아지고 서로 비난할 때도 있지만, 부모님을 실망시켜도 어쩔 수 없다는 나만의 기준과 삶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나의 정신적 독립을 선언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 부모님을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부모로서의 모습이 아닌 그 사람 자체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나를 지켜주고 위해주고 사랑해주는 부모님이어서 관심을 갖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60여년간 치열하게, 성실하게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온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그 사람 자체를 바라보게 되었다. 내가 받은 것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돌려줘야 할 의무로서의 사랑이 아닌, 어떤 권리나 의무로부터 해방된 좀더 순수한 형태의 사랑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부모님에 대한 나의 사랑에 탁하게 껴 있던 불순물을 정화시켜주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 진정한 독립이었다.
이제 알게 되었다. 부모와 자식은 제때 잘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적당한 거리를 두며 헤어지는 것은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사랑하기 위해서 헤어지는 것이다. 언제 헤어지든 정을 뗄 때에는 서로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겠지만, 자식의 독립이야말로 아이에 대한 책임을 내려놓는 육아의 종착점이자 아이가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는 진정한 아이 인생의 시작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사랑하는 딸 아이와 잘 헤어지는 것이 목표이다. 나는 우리 아이의 삶에 어떠한 책임도 질 수 없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무리 내가 나를 희생해서 아이를 위한다고 해도 나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절대 알 수가 없고 대신 줄 수도 없다. 아이가 진정으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주인이라면 감내해야 할 도전의 두려움과 실패의 아픔을 온전히 겪어내고 극복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겪어낸 자만이 삶의 책임을 질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가슴이 뻐근한 삶의 아픔도, 슬픔도, 괴로움도, 가슴 벅차오르는 성취감도, 행복도 오롯이 아이의 몫이 될 수 있도록 나는 아이와 헤어질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독립을 시작으로, 나와 아이는 다시 순수한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