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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소록도에서 시 낭송

국내여행

by 청현 김미숙

30년 만에 다시 찾은 소록도는 많이 변해 있었다. 사슴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녹동이라는 이름이 붙은 녹동에서 배로 건너던 소록도는, 소록대교가 개통되어 배를 타고 건너갈 필요가 없어졌다. 차를 타고 소록도를 지나며 육지와 연결된 소록대교가 한센병에 걸린 환자들이 조금이라도 사회와의 단절과 고립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본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산책로의 데스크톱이 반겨준다. 12월의 음산한 날씨는 계엄의 충격으로 혼란과 혼돈의 상태에 있는 머리를 더 차갑게 얼어붙게 하는 강한 바람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머리를 털후드에 단단히 묶고 데스크를 걷는 첫 발자국에 '수탄장'이라는 안내판이 시선을 끈다. 이곳이 바로 한센병(Hansen's disease)의 질병 감염을 우려하여 환자와 자녀들이 격리하는 경계선으로 부모와 한 달에 한 번씩 면회하는 장소이다. 예전에는 산모가 출산하면 감염을 우려하여 아기들을 떼어놓고, 엄마는 핏덩어리 아기가 너무 보고 싶어 쇠창살에 문드러진 살들을 피가 터진 줄도 모르고 부여잡고 통곡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덩달아 울었던 기억도 난다. 수탄장은 부모와 자녀가 양옆으로 갈라져 눈으로만 자식을 봐야만 했던 '탄식의 장소'라고 하여 수탄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데스크 옆의 겨울바다는 썰물이어서인지 창백한 모래를 드러내고 서로 마주 보는 이름 모를 섬이 수탄장의 사연을 재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멀리 한센병에 걸린 나병 환자들을 강제로 소록도에 격리시켜 불편한 몸들로 강제 노동시킨 일제세대에 지어진 소록도 갱생원 등대와 구치소등이 보인다. 나라를 잃은 일제강점기의 만행을 어찌말로 다할 수 있으랴. 손과 발이 썩어 문드러지는 환자들을 동원하여 아름다운 소록도를 만든 아이러니컬한 슬픈 이야기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강제노역도 모자라 환자들을 대량학살하고 57년이 지난 후에 발견된 84명의 비극적인 학살현장의 이야기를 담은 애한의 추모비는 슬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학살당한 현장에 추모비를 세워 그들의 인권회복을 위한 상징적인 이 기념비가 그들의 넋을 조금이라도 달래주길 기도해 본다.


벽에 사슴이 그려진 길을 따라 중앙공원으로 향한다. 언덕을 오르자 예전에 보지 못한 이춘상 6.20 의거 기념비가 보인다. 이런 의거가 있었나 찾아보니 일제만행에 견디다 못한 이춘상 씨가 "너는 환자들에게 못된 짓을 많이 하였으니 내 칼을 받아라!" 하며 1942년 6월 20일 소록도 갱생원 일본 원장의 오른쪽 흉부를 칼로 찔러 원장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벽돌공장을 세워 환자들을 강제동원 시켜 수많은 환자들을 죽게 만들고 신사참배를 강요한 일본 원장을 살해한 이춘상 씨는 1943년 2월 19일 사형되었다 한다. 그를 죽인 것은 개인의 감정에서가 아니라 동료원생들을 혹독하게 사역시켰고 이 기회에 소록도의 비참한 생활을 폭로하고 싶었다고 말한 이춘상의 의거는 제2의 안중근이라 불릴만한 사건이라 하겠다.


조금 올라가니 예전에 보았던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라는 시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시작되는 그의 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는 환자들의 비참한 마음이 반석 위에 깊게 새겨져 있어서 가슴이 뭉클했었다. 이 바위를 나르기 위한 환자들의 고통 위에 새겨진 보리피리라는 시는 환자들의 뼛속 깊은 그리움으로 나의 가슴에 깊게 스며든다.


오늘은 한하운시인을 기리는 날로 보리피리가 새겨진 바위 있는 곳에서 그의 시를 읽고 낭송하기 위해 모인 날이다. 한센병시인으로 잘 알려진 한하운 시인은 1919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 나이 17세에 한센병 확진을 받아 한센병으로 인한 처절한 체험을 소재로 많은 시를 썼다. '나는 문둥이가 아니올시다 나는 정말로 문둥이가 아닌 성한 사람이 올시다'라고 울부짖는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소록도에서 요양할 때 쓴 전라도 길이라는 시에서는 '신을 벗으면/버드나무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길, 이라는 시로 처참한 그의 육신의 아픔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다행히 음성이어서 사회로의 복귀가 가끔 가능하기도 했겠지만 양성인 사람들의 육신과 정신의 고통은 얼마나 심했으랴? 낭송에 참여한 사람들은 소록도에 와서 그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세상에 알리고 나병환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낭송에 참여를 했다.


어렸을 때 기억은 한센병은 나병이라고 했으며 살이 썩어 들어가는 증상으로 나병환자들은 산으로 들어가 움막을 짓고 살며 일반인과 스스로 격리했다. 엄마들은 어린아이가 울 때는 문둥이가 잡아간다라는 말로 아이들을 겁에 질리게 했었던 적도있다. 우리가 암에 걸리고 싶어서 걸리나? 그들도 어쩔 수 없는 고통으로 힘든데 사회의 시선이 너무 차갑지 않았을까?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그들을 죽어가는 소모품이라 생각하여 노예처럼 학대하고 강제노동시키고 학살까지 서슴없이 했으리라.

다시 찾은 소록도는 예전엔 보리피리 바위 주변엔 나무도 별로 없어 시야가 넓어 보였는데 세월이 흘러 나무들이 환자들의 고통을 알아차린 듯 비틀며 자라고 있었다.

하얀 동백꽃은 그들의 순수한 마음을 보여주는 듯 활짝 피어있고 그 아래에는 미카엘 대천사가 한센균을 박멸하는 모습으로 소록도의 희망을 표현한 구라탑이 우뚝 솟아 있다. 그리고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써놓아 그들에게도 살아있는 존재의 이유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작은 희망이라도 희망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요즘엔 미리 발견하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하운시인의 시를 통한 그들의 삶을 보고 따뜻한 시선을 가질 수 있는 의미 있는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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