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다른 사람이 깰까 봐 집게발을 딛고 생쥐처럼 힐끔거리며 집을 나선다. 오늘은 섬진강을 따라 하동과 쌍계사 벚꽃 보러 가는 날, 벚꽃만큼 화사한 마음을 가지고 시청역에 내린다. 와, 여긴 밤의 동대문 시장을 능가하는 관광버스 행렬이 줄을 이룬다. 버스가 서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이리저리 엉켜있다. 내가 숙면하는 동안 사람들은 일찍 일어나 소풍을 즐기는 모양이다. 긴 겨울을 끝내고 꽃소식을 전하는 섬진강이 산수유, 매화꽃을 피우며 봄소식 알리다가 드디어 3월 말이 되니 벚꽃소식을 알린다. 5시간을 달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푯말이 붙어있는 십리벚꽃길의 입구에 들어선다.
그러나 2차선 도로는 차들이 움직이지 못한 채 주차장처럼 서있고 네비를 찍어보니 쌍계사까지 차로
거의 2시간이나 걸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할 수없이 섬진강을 따라 걸으며 벚꽃을 만끽했다. 처음에 일본에서 꽃이 예뻐 가져와 심었다는 벚꽃나무는 세월만큼이나 굵은 묵직함을 보여주며 하얀 눈송이들을 달고 있었다. 특히 노목에서도 굵은 껍질을 뚫고 나오는 새싹 벚꽃은 생명의 신비로움을 더해주었다. 많이 달려있는 가지의 벚꽃보다 유독 노목 중간에 핀 벚꽃 새싹이 싱그럽다.
섬진강의 파란 물은 모처럼 단장을 한채 푸른 맑은 빛을 더하고 있었고, 봄의 향기가 섬진강 물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1년에 봄 한철을 위해서 얼마나 몸부림치며 살았을까? 그래도 그들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이 잔치를 열고 축하해 주는 자리라 생각하니, 벚꽃도 조금은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쌍계사의 100년 이상의 벚꽃 터널은 사랑하는 연인과 걸으면 이루어진다는 아름다운 벚꽃 터널로 저절로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 노래를 콧바람으로 부르게 한다.
쌍계사를 벗어나 화개 장터의 봄은 조영남의 동상으로 시작하며 풍물단의 경쾌한 음악소리와 더불어, 섬진강의 물길을 리듬에 맞춰 아름답게 춤추게 하고 있다. 섬진강의 맑은 정기를 먹고 자란 재첩과 다슬기로 건강한 정기를 몸에 가득 담고 흥겨운 가락에 맞춰 몸을 흔들어본다.
개나리 노란 옷에 청초하게 풍성한 하얀 꽃을 매단 벚꽃을 두른 섬진강은, 햇빛에 반짝이는 파란 강물을 더 싱그럽게 해 주고 있었다. 봄바람에 날리는 하얀 벚꽃잎처럼, 노목에 신선한 꽃을 피우고 흩어지는 바람결에 내 몸을 실어 날아가고 싶었다.
잘 가꾸어진 최참판댁과 박경리 집을 둘러보며 평사리에 자리 잡은 박경리선생님이 느꼈을 아름다운 봄의 하동을 호흡해 본다. 평화롭고 고요한 이곳에서 토지의 질긴 생명력과 사람들의 삶을 생각했으리라. 비록 사람은 떠났지만 하동의 봄은 해마다 살아남아 나무의 굵기만큼이나 든든한 뿌리를 가지고 이곳을 지키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모처럼 관광버스를 탄 촉박한 봄나들이 었지만 겨울을 지나고 풍성한 봄을 맞이한 행복한 하루였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나의 마음을 맑은 섬진강의 꽃물에 흠뻑 적시게 하는 아름다운 날이었다. (24.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