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두터운 외투를 뚝하고 던지듯 의자에 몸을 던졌다.
그는 똑같은 느낌으로 "똘방 똘방은 어디 갔나?"하고 말을 던졌다.
"오늘은 쉬는 날이요."
"왜요?" 하고 나는 되물었다.
"아니 안 보여서"
"시원하게 깎아 두가."
"어~, 오늘도 술 드셨어요."
"술 드시고 오시면 저흰 커트 안 해드려요."
"점심 먹으면서 한 병 먹었지."
"다음엔 안 먹고 올게."
"술을 이렇게 매일매일 드세요?"
"그럼, 밥 먹을 때 한 병씩 먹지."
그는 솔직한 사람이다.
한 잔도 아니고 한 병이라고 정확히 말한다.
두 병이면 두 병이라고 한다.
그는 여든이 넘은 해병대 출신 노인네다.
그는 남루한 옷차림에 단벌 신사로 항상 취기가 남아있는 행동거지와 조금 어눌한 말투로 선 듯 다가가기가 꺼려지지만,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 깔려있는 따뜻함이 보여서 좋다.
그에게 사탕 한 알도 껌 하나도 얻어먹지 않았지만, 매일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눈도장을 찍어서인지 정이 들었다.
그는 오다가다 "어이, 믹스 커피 한 잔 두가."하고 샵으로 들어온다.
"코로나로 안에선 못 드세요. 나가서 드시는 거 아시죠!"
"아, 그럼"
"지랄, 이놈의 코로나...."
이러쿵저러쿵, 그는 내가 하고픈 말을 다하고 간다.
"그럼, 오늘도 장사 잘 돼라."
이런 그가 언제부턴가 보이질 않는다.
알 수 없는 찜찜함이 담쟁이처럼 스멀스멀 목덜미를 타고 시커멓게 올라왔다.
걱정돼서 여기저기 수소문했다.
그를 알만한 분이나 같이 다니셨던 분들에게 안부를 물어보지만 전혀 이득이 없었다.
어럽게 알아낸 전화번호로 전활 해도 안 받는다.
불길한 생각이 고장 난 전구처럼 깜빡거렸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봄 볕에 녹아 사라지듯이 내 가슴속에서 그가 서서히 잊힐 때쯤, 중년의 여인과 환자복에 외투를 걸친 노인네가 샵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순서를 기다리며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한참 후, 차례가 된 노인네는 자리에 앉으며 "내 모르겠나"하고 말을 던졌다.
"글쎄요. 누구신지~"하고 말꼬리를 흐리는데, "나다"하고 그는 얼른 내 말을 덮었다.
"어~~"하고 말을 못 맺고 있는데 같이 온 여인이 "저희 아버지께서 여기 꼭 한 번 와야 된다고 하셔서 이렇게 왔어요"
그녀는 노인네의 딸이었다.
그녀로부터 그간의 일을 들었다.
그는 갑자기 쓰러져 저 세상 문턱까지 갔다 왔다고 한다.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며 많이 호전된 상태라고 한다.
"쟤가 날 꼼짝 못 하게 해서 나올 수가 없다."
"전화도 못하게 하구...."
"근데, 똘방 똘방은 없나?"
그간 시리고 허전했던 내 가슴 한편에 선 서서히 온기가 돌고 있었다.
난 그를 길을 걷다 우연히 부딪쳐도 아무 말 없이 스쳐 지나가는 사람 같이 잊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날 한 번 더 돌아보며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너무너무 고맙고 따뜻했다.
난 이런 감정을 숨기려고 아이처럼 투정 부리듯 다급하게 그의 말꼬리를 자르며 말했다.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난리가 아니었어요."
"........."
"시원하게 깎아두가."
그렇게 그는 바람처럼 왔다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