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너'는 떠났다. 그날 이후 '나'는 마음 안에 늘 일정한 보류, 너를 위한 비밀 공간을 간직한 채로 중년의 남자가 되었다. 주인공은 너무나 좋아했던 소녀와 연락이 끊기게 되면서 소녀를 찾아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현실과 벽 세계를 오가게 된다. 읽다 보면 도대체 어느 쪽이 현실이고 가상인지 혼란스럽기도 한데(우리가 사는 현실도 때때로 그렇듯) 아마도 작가는 관계와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의 삶은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그게 사랑일 수도, 꿈일 수도 있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떠도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현실과 다른 도시에는 마음대로 모양과 위치를 바꾸는 의지를 지닌 '벽'이 있다. 사랑했던 소녀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고, 공허한 마음으로 꿈을 읽는 자가 된 주인공은 유령이 된 도서관장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소년을 만나게 된다. 현실과 환상이 뒤섞여 있어서 난해한 부분이 많고 감정선을 촘촘하게 따라가며 읽기는 조금 어려웠지만. 이토록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건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힘인 것 같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무얼까? 우리는 각자에게 놓인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림자'와 '나'는 누가 진짜일까? 사람은 사랑을 상실한 채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결국 내가 살아갈 곳과 살아갈 모습은 스스로 결정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이야기.
하지만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둘만의 대화에 푹 빠져서 시간이 가는 걸 아쉬워하며 몰두한 것이 더 큰 이유일 테다. 나나 너나 그전까지는 이렇게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자기 기분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터놓을 수 있는 상대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상대를 만났다는 건 실로 기적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래서 한 달에 한두 번 만날 때마다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리 오래 대화해도 화제가 바닥나는 일이 없었고, 헤어질 시간이 되어 역개찰구에서 작별 인사를 할 때는 항상 중요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남았는데 미처 말하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p.20)
벽에 대한 꿈도 꾸었다. 꿈속에서 벽은 시시각각 살아서 움직였다. 마치 거대한 장기의 내벽처럼. 아무리 정확하게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려도 벽은 곧장 모습을 바꾸어 내 노력을 무위로 돌려버렸다. 내가 글과 그림을 고쳐 쓰면 벽은 또 지체 없이 변화했다. 견고한 벽돌로 이뤄졌는데 어떻게 저리도 유연하게 모습을 바꿀 수 있는지.(p.96)
그렇게 나는 너에 대한 모든 단서를 잃고 만다. 아무래도 너는 나의 세계로부터 소리 없이 퇴출된 모양이다.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설명다운 설명도 없이 그 퇴출이 너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어떤 불가항력이 작용한 결과(이를테면 차가운 바닷물이 문을 부수고 쏟아져 들어오는 것에 맞먹는)였는지는 모른다. 남은 것은 깊은 침묵과 선명한 기억과 이워질 수 없는 약속뿐이다.(p.172)
그 여름 나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리고 내 안의 시간은 그때 실질적으로 정지했다. 시곗바늘은 언제나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시간을 쌓아갔지만, 나에게 진짜 시간은 그대로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그로부터 삼십 년 가까운 세월은 그저 공허를 메우는 데 소비해 온 것이나 다름없다. 텅 빈 부분을 무언가로 채울 필요가 있기에 주위에 보이는 것으로 그때그때 메워갔을 뿐이다.(p.254)
그곳에 혼자 서 있으면 어김없이 슬퍼졌다. 아주 오래전에 맛보았던 깊은 슬픔이었다. 나는 그 슬픔을 무척 잘 기억했다. 말로 설명할 길 없는 또한 시간과 더불어 사라지지도 않는 종류의 깊은 슬픔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가만히 남기고 가는 슬픔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대체 어떻게 다뤄야 할까?(p.280)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시간이 머물러 있어도 계절은 순환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현재가 비춰내는 잠깐의 환영일지라도, 책장을 아무리 넘겨도 쪽 번호가 바뀌지 않을지라도 그래도 하루하루는 흘러가는 것이다.(p.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