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부끄러움이 많고 겁이 많았던 나는 타인과의 안전거리를 꾀나 널찍하게 갖는 편이다. 낯선 공간에 가면 구석 모퉁이를 찾아 앉아야 마음이 편하고 처음 만난 사람의 속도가 급하다 싶으면 온몸에서 경고음이 울린다. 쉽게 상처받는 성격 탓에 경계심도 높아 누군가에게 마음을 잘 열지도 못했다. 내 마음 바깥에 커다란 동그라미로 안전 울타리를 세워놓고 누구든 그 선을 넘어 다가오면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더 깊숙하게 숨었다. 예민하고 눈물도 많고 한번 정들면 그게 무엇이든 쉽게 잃지 못하는 사람. 난 왜 이렇게 무른 사람인지 세상이 온통 따갑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이가 들고 차츰 사회성이란 걸 갖추면서부터 표면적으로는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지만. 언제나 나를 지킬 수 있는 보호구역 안에서 적당한 거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아무런 방어 없이 속수무책으로 좋아하게 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사려 깊음'이 있는 사람이다. 작은 표정, 말투 하나에도 타인을 향한 배려가 담겨 있는 그래서 함께 있으면 온기가 전해지는 그런 사람. 그런 다정함은 상대를 깊게 바라봐주고 진심으로 대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다. 적당한 매너로 예의를 갖추고 표면적으로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건 쉽지만 진심이 닿아 마음을 움직이고 서로에게 의미 있는 관계로 이어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려 깊은 사람들은 상대방을 세밀하게 관찰하기 때문에 처음 만난 사이라도 상대의 경계선을 잘 파악한다. 어떤 주제로 대화를 나누어도 깊이를 조절할 줄 알고, 상대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하고 듣는다. 그래서 함께 있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 없다. 되려 자신은 긴장되고 피곤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라도. 자신보다 먼저 상대를 살펴주려는 마음이 부드럽고 따뜻한 공기를 만들어낸다. 마치 처음부터 나를 알아봐 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나조차 몰랐던 내 마음을 꺼내어 친절하게 읽어주고 들어준다.
관계라는 게 얕으려면 한없이 얄팍할 수 있고 스쳐가는 무수한 인연이 깊고 친밀함으로 이어지는 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일인지 깨닫게 되면서부터 작은 눈빛과 말, 행동에서도 배려심이 빛나는 사람을 보면 여지없이 마음의 빗장이 열린다. 마음이 마음에게 닿았다는 걸 자각하게 되는 순간 이야기는 끝난다. 그런 사람은 평생 옆에서 함께 걷고 싶은 소중한 이름이 된다.
언젠가 그런 사람과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이후 서로 다른 급한 일정이 있어 서둘러 인사를 주고받고 일어났다. 한참을 걷다 모퉁이를 돌아서려는 찰나에 조금 이상한 기류가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그 사람이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봐주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뒷모습을 지켜봐 주는 사람이라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마음이 쿵, 넘어지고 말았다. 누군가 나의 뒷모습을 바라봐준다는 게 얼마나 따뜻하던지. 어쩌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데 가야 할 방향으로 안전하게 잘 가고 있는지 바라봐주던 그 마음을 마주한 순간, 깜깜했던 밤 길에 가로등이 하나 더 켜진 기분이었다. 알싸했던 겨울밤 등이 따듯해지면 마음까지 녹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경계의 울타리보다 더 크고 따뜻한 보호막이 나를 안아주는 느낌이랄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뒷모습까지 지켜봐 줄 수 있는 사람. 애써 감추었을지 모를 진짜 마음의 표정을 잘 읽어줄 수 있는 사람. 울고 싶은 날 억지로 웃고 있었을지도 모를 순간을 알아채주는 사람. 살아보니 인생은 관계가 절반이라는 생각이 든다. 함께 있는다고 외로움이 전부 사라지진 않겠지만. 이 세상이 살아갈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아마도 사려 깊은 누군가가 나의 하루를 다정하게 덮어주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작은 관심으로 상대방을 배려해 주는 사람. 진심 어린 경청을 해주는 사람. 필요를 따지며 계산적이지 않고 나라는 존재 자체를 애정해 주는 사람. 내가 더 좋은 나일 수 있게 해주는 사람. 때론 구겨진 마음을 곱게 펴주고, 혼자 있고 싶지만 혼자가 되고 싶지는 않은 마음 옆에 가만히 앉아주는 사람. 그렇게 타인의 경계선을 무너뜨리지 않고 조용히 스며들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감추고 싶지만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라는 그런 외로운 마음 하나를 달고 있을지 모를
당신의 뒷모습까지 지켜주는 그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