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하게 시킨 것, 타자연습.
나는 그 친구에게 딱 하나, 정말 하나만 강조했었다. 바로 타자 연습.
조금 어이가 없을수도 있다. 그동안 그 친구한테 어떤 실수를 해도 뭐라 한 적 없는데, 유독 그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정말 처음엔 한가한 날에도 환자 차팅하고 정리하는 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던 것 같다. 그 친구는 내가 태어나서 본 사람 중에 손에 꼽을 만큼 타자가 느린 사람이었다.
간호기록, 인계 내용, 차트 정리. 이건 결국 본인이 해야 할 몫이다. 다른 사람이 도와줄 수도 있지만, 매번 도와줄 수는 없다.
그래서 말했다.
"진짜 뭐든 다 괜찮은데... 타자는 좀 쳐야겠어."
그 친구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노력해볼게요.” 라고 말했지만, 그 말도 무조건 믿은 건 아니다. 근데 그 친구는 늘 진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수가 있어도 핑계 대지 않았고, 조금 느려도 그걸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뭘 물어볼 때, 모르면 모른다고 했고, 잘못했으면 바로 인정했다. 완벽하진 않아도 꼼수 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결국에 성장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타자도 진짜 연습해왔다. 며칠 뒤, 뭔가 타닥타닥 소리가 경쾌하길래 봤더니 그 친구가 조심조심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근데 옆에서 땀 흘려가면서 그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아직 실수도 많고, 느리긴 했지만 뭔가 마음이 이상했다. 나는 그냥 고개 끄덕였다.
그래서 어느 날 말했다. "이제 그만 연습해와도 돼. 이쯤 했으면 됐지 뭐."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시간이 흘러서 지금은 그 친구도 어엿한 선배가 되었고, 후배들도 많이 생겼다. 그 친구는 가끔 연락하면 아직도 타자가 느려서 동기들한테 혼난다고 툴툴거리곤 한다.
시간이 꽤 지났지만, 내 눈엔 아직도 그 친구가 신규 간호사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허점 가득한 모습이 여전히 따뜻하게 남아 있어서 그러지 않을까.
그때 그 겨울, 나는 분명히 프리셉터였지만 오히려 내가 더 많이 배웠다고 느꼈다.
가르침은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흐를 필요는 없다는 걸, 기다림과 신뢰가 누군가를 어떻게 성장시키는지를
그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그 친구를 이렇게 교육했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는 건 아니었다.
사람은 결국 자기가 자라온 방식대로, 자기가 받아온 가르침대로 누군가에게 알려주게 된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가 받아왔던 방식 그대로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 친구보다 훨씬 더 거칠고, 힘든 방식으로 배워야 했다. 그게 나를 좀 더 빨리 능숙한 사람이 될 수 있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따뜻하게 만들지는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내가 받았던 가르침을 답습하지는 않겠다고.
늦게 들어온 누군가가 나보다 조금 더 편해지는 것.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구조와 환경은 변한다. 그리고 시작점 역시 다르다. 그 친구가 나보다 느리고 서툴다고 해도 나는 애초에 우리 둘의 출발선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같은 속도를 요구하는 건, 공평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았던 건 아니었다. 알고 있어도 그렇게 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때의 분위기는 "힘들게 배워야 빨리 안다", "실수는 크게 혼나야 반복하지 않는다"는 식의 잘못된 믿음이 너무 당연하게 퍼져 있었다.
나는 그게 일종의 보상심리 같다고 느꼈다. 자기도 그렇게 배워왔으니까 다음 사람도 그렇게 겪어야 한다는 식의 왜곡된 정의감. 그게 정말 문제라고 생각했다.
신규가 힘든 건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조직은 그저 이미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환경일 뿐이고, 새로 들어온 사람이 적응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걸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늘 반대로 말한다. "신규는 원래 그래", "요즘 애들은 유난이야"
마치, 그 구조가 당연하고 정답인 것처럼, 오히려 적응 못 하는 사람이 문제인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문제는 늘 사람이 아니라 구조라고. 그것을 만든 사람들, 그 안에서 살아남은 방식이 전부였던 사람들. 그들이 경험한 방식이 모두 정답이 아니라는 걸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제는 더 많아져야 한다.
나는 단지, 내가 자라온 방식을 다음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려 했을 뿐인데 그 선택이 누군가의 시작을 조금은 덜 춥게 만들 수 있었다면, 그걸로 된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아마 다음 이야기는 내가 그런 구조 속에서 어떻게 말하게 되었는지 어떤 식으로 나의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