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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펑크 : 엣지러너가 예수의 십자가를 넘다.

by 소시민

この世界で名を残す方法はどう生きるじゃない、どう死ぬかよ。

이 세상에선 어떻게 사느냐로 이름을 떨치는 게 아니야, 어떻게 죽느냐로 기억되지. [사이버 펑크 중 대사]




신학생 시절 늘 두통에 시달렸다. 그건 언제나 구원의 문제가 내 전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고자 하는 욕구는 생명이 있는 것들의 기본값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더욱 죽음과 반대편에 서게 된다.


자본주의는 벌거벗은 삶을 절대화한다. 좋은 삶은 자본주의의 목표가 아니다. 축척과 성장을 향한 자본주의의 강박은 바로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자본주의에서 죽음은 절대적 손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나 또한 살고 싶었고 영원한 죽음의 두려움과 영원한 생명을 갈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종교인이 삶에 집착하는 것이 상당히 이상해 보이는데, 당시에는 마땅히 그래야 할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신앙을 하며 짧지 않았던 고민의 시간은 죽음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불러냈었다.




지금은 종교가 없지만, 목사를 하면서도 언제나 의문이 들었던 것이 있었다.


예수는 왜 부활했을까?


예수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이어서 그가 부활했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 사건으로 그를 믿는 사람은 다 부활한다는 논리를 기독교 전통은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온 인류의 죄를 가진 완전한 죽음이라고 한다면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은 신성모독적 이게도 늘 생각의 저편에 숨겨져 있었다. 부활하지 않아야 대신 죽는 죽음이고, 그가 죽었기 때문에, 그를 믿는 사람은 대신 살게 된다는 논리가 더 와닿았었다. 그렇지만 당시에 이건 상상하기도 거북한 논리였고 누군가에게 말한 다는 건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그저 예수가 부활했기 때문에, 그를 믿으면 나도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믿을 뿐이었다. 그것이 훨씬 마음에 안정을 주는 믿음이었기에.




[사이버 펑크 : 엣지러너]. 우연히 유튜브나, SNS에서 추천하는 영상을 본 것 같다. 대중적인 것들 중에 웬만해서 중요한 의미를 전달해 주는 이야기를 만나는 건 쉽지 않은데, 인기가 있는 작품이면서 마음에 전달된 메시지는 꽤나 깊게 울렸다.


어떻게 사느냐 보다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건 쉽지 않다. 자칫 허무하거나, 감동이 사라질 수 있지만,,, 어떤 작품의 영광스럽고 찬란한 마무리 보다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처음 보고 든 생각은 '십자가를 넘어섰다'였다.


데이비드의 죽음 앞에 순애가 무엇인지, 사랑이 붕괴되고 가볍게 소비되는 시대에 바이블 같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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