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과 싸웠다. 싸우고 난 후에는 아빠라고 부르기 싫다. 꼴도 보기 싫은 감정이 물밀듯 쏟아지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늙고, 병든 부친과 싸우는 경우의 수는 몇 가지 없다. 자꾸 불필요하게 화장실을 가거나 (낙상 위험이 있어 자리에서 누실 것을 권한다), 밥을 먹지 않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검체 확보에 협조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은 두 번째 이유로 싸웠다. 입원이 반복되면서 부친은 별 학습 효과가 없어 보이나 나는 그나마 젊은 세대답게 빨리 습득한다. 오죽하면 밥을 못 먹겠나 싶어 요즘은 못 먹겠다 하면 조용히 식판을 물리지만 (그나마 병원밥이 비싸지 않은 것이 위안이 된다), 이번은 상황이 좀 다르다.
염증 수치도 28대였던 것이 지금은 1.7로 많이 안정되었다. 0에서 0.5가 정상수치임을 감안하면 아주 심각한 상태로 입원을 한 것이고, 많이 호전된 것이다. 3주에 근접하는 입원 기간 중에 조직 검사 결과도 정상 (재발 아님), 염증 수치도 안정되었고, 그릉그릉 하던 가래와 기침도 많이 호전되었다. 그럼에도 부친은 왜 호전이 없냐고 불평 중이다. 본인이 느끼기에는 상태가 별로 나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열이 오르락내리락 안정될 기미가 없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부친은 33kg대로 항암 이후 2년 간 살도 많이 빠지고 기력도 많이 쇠해졌다.
설명을 시도한다. 최대한 노인의 언어로 쉽게 쉽게… 염증 수치를 보여줘 가며 엄청나게 호전되었고, 재발도 아니고, 이제 기침도 덜하지 않느냐. 아빠만 이제 잘 먹으면 나을 수 있고 퇴원할 수 있다. 열 번 정도 어르고 달랜 것 같다. 조금씩 움직여야 한다고 억지로 끌고 나가려다 또 “이따가, 이따가”만 반복하는 통에 폭발했다. 잡고 있던 부친의 손을 털어버린 나는 급기야 “나는 간다”는 최후의 통첩을 하고 밖으로 나온다.
영하 10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추위에 나는 시원함과 후련함을 느낀다. 언니와 교대한 지 꼬박 48시간이 지났으니 이젠 벌떡증이 나기도 할 시점이다. 아침을 늦게, 거하게 먹은 아직 점심 전이다. 겨울의 병실은 어찌나 더운지 시럽을 넣은 아이스 드립 커피가 간절하다. 배달 음식 앱을 검색해 드립커피 맛집을 고른다. 식도락인 나는 커피 한 잔도 허투루 먹지 않는다. 맛없는 커피를 먹을 바엔 아예 마시지 않는다. 아주 현명한 습관이다. 스트로베리 캔들라는 이름의 드립 커피를 고른다. 콜롬비아 카투라 허니 코퍼멘티드 스트로베리 75%, 콜롬비아 엘 디비소 옴블리곤 내추럴 25% 블렌딩 커피다. 읽다가 숨이 찰 판이다. 커핑 노트가 생딸기우유, 스트로베리, 딸기잼, 크렌베리라 되어 있다. 금액을 맞추기 위해 초코 파운트 케이크를 추가했다.
부친과의 싸움을 핑계로 실력행사를 위해 나왔지만 갈 곳이 없다. 1월 1일이라 좋아하는 커피숍도 열지 않았고, 잠시 로비에서 생각을 정리한다. 그래, 일단 부친과의 접촉을 피하자. 붙어 있어 봤자 온갖 미운 생각이 들어 이런 때는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다. 커피와 파운드를 픽업한 후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어차피 가져올 물건도 있고, 샤워도 해야 할 시점이다. 가녀린(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몸을 겨우 지탱해 주는 보호자용 의자에 지친 허리를 쉬어줘야 할 타이밍이다. 앱으로 택시를 부른다. 택시를 부르고 나면 꼭 빈 택시가 들어온다. 弟길슨! 右라질!
갑자기 허기가 몰려와 택시에서 파운드를 먹기 시작했다. 택시에 흘리지 않기 위해 배달된 쇼핑백에 얼굴을 파묵고 쳐묵쳐묵 먹는다.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든다. 부친에 대한 서운함, 1월 1일이라는 날짜의 특수함, 내 노력에 대한 허무함, 온갖 서운한 감정이 몰려든다. 커피를 한 잔 마신다. “이게 뭐지? 정말 스트로베리 향이 난다. 거기다 커피 색도 오묘하게 체리빛을 띤다. 눈물을 훔치며 파운드를 먹다, 다시 커피를 마시고.
택시 기사가 나를 돌아본다. 혹시 흘렸을까 걱정할까 봐 “안 흘리게 쇼핑백에 대고 먹었어요”라며 볼멘소리를 한다. 누구라도 싸움만 붙여봐라, 쏘아붙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와중에 커피를 마시는데 신의 물방울에서 묘사된 황홀경을 경험한다. 적절한 산미에 폭발적인 향이 느껴진다. 말도 안 되게 맛있는 커피와 그것보다는 조금은 말이 되게 맛있는 파운드를 다 먹고 나니 기분이 풀렸다.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드라마를 보고, 카톡을 하고, 한 시간 정도 졸린 눈을 쉬고 나니 (카페인 기운에 잠은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돌아갈 의지가 생겼다. 잘했다. 학습한 대로 하니 아비를 100번 미워하지 않고 5번 정도만 욕을 하고 이 싸움을 혼자 끝냈다.
무겁고 불안한 마음을 안은 채 - 병실을 비울 때는 늘 불안하다 - 병실에 돌아오니 부친은 열이 나 또 끙끙 앓고 있다. 무심히 간호사를 불러 열을 재게 하고 해열제를 투약받는다. 열이 내리고 저녁 시간이 된다. 더 먹으라 채근 없이, 아무 말도 없이 명태조림을 발라주고, 김에 밥을 싸 건넨다.
이로써 원만히 화해가 성립되었다. 부부싸움도 칼로 물 베기지만 부녀 싸움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