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과 이성의 합동으로 진리를 길어 올린다.
영화 죠스는 작가 피터 벤츨리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1975년 감독한 해양 스릴러 장르 영화이며, 영화 살인의 추억은 2003년 세계적인 거장 봉준호 감독이 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로 제작한 범죄 스릴러 영화이다.
한국과 미국, 1975와 2003, 상어 이야기와 연쇄살인범 이야기. 이처럼 차이가 분명한 영화를 동일한 범주로 묶어 감상해 보겠다? 그것도 칸트가 이 영화를 보았다면 가정하고? 좀 엉뚱미친거 아님? 때론 엉뚱미칠 수도 있는 법. 어찌 살아가면서 제정신으로만 살 수 있단 말인가? 창조주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엉뚱함도 신의 선물임이 틀림없으리라. 그렇다면 오늘은 엉뚱하기 좋은 날!!! 만약 칸트가 이 영화를 보았더라면... 과연 칸트는 위 두 영화에 어떤 감상평을 남겼을까?
이 영화는 미국 뉴잉글랜드 작은 섬마을인 애미티 해변에 나타난 식인 상어를 잡는 영화인바, 해양 모험 스릴러 장르라는데 이의를 던질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는 성경 말씀에 비추어 보면, 식인 상어 죠스를 잡는다는 것은 사람에게 자유와 행복을 선사하므로 이를 진리를 잡는다( 진리를 발견한다)는 것을 상징 은유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칸트가 보았다면 이 영화는 우리 인간이 진리를 획득하는 방법에 관한 영화로 보고 자신의 인식론을 대입해 볼 것이다.
1986년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 영화는 범인을 잡기 위한 형사들의 분투를 그리고 있다. 위의 성경 말씀과 문학과 영화의 상징성에 비추어 보면 범인을 잡는다는 것 역시 식인상어를 잡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잡는다로 대체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도 우리 인간이 어떻게 진리를 획득할 수 있는가?에 관한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칸트가 이영화를 보았다면 자신의 인식론을 대입해 볼 것이다.
3) 위 두 영화가 진리를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라는 공통점이 있는 영화라면 두 영화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죠스는 브로디 서장의 헌신 덕에 식인 상어 백상아리를 잡는데 성공한다. 즉 진리 획득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은 범인을 잡지 못한다. 죠스와 달리 진리를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칸트라면 왜 그들이 진리 획득에 실패 했는지 그 이유를 분석해 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흄의 회의론도 살펴보기로 하자.
칸트는 기존의 합리론과 경험론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인식론의 신기원을 이루어 냈다. 따라서 칸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이다.
1) 인식론
인식론이란 진리(사실/ 자연/ 객체/ 대상)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분야를 말한다. 우리는 경험과 이성이라는 두가지 인식능력을 가지고 있다(물론 여기에 광기 예지 직관등을 드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이중에 감각경험이 아닌 이성만이 우리를 진리로 이끌 수 있다는 이론을 합리론이라 한다. 여기서 이성이란 이론적 사유능력과 직관력, 쉽게 말해 수학문제를 풀 때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하면 된다.
합리론자 데카르트는 본유관념설(本有觀念)을 주장했는데, 인간은 참된 진리를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판단이 참이라든가, 또 어떤 행위가 선하다든가,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등은 우리는 경험 이전에, 경험해 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선험성).
본유관념은 인간의 뇌 속에 담겨있을 거라 추측되기에 이를 경험(눈 코 귀 입 손)으로 알아 낼 수는 없다. 따라서 합리론자들은 수학적, 3단논법인 연역적 방법등의 이성적 사유로 탐구하여 본유관념에 내재한 진리를 획득해야만 한다 주장한다. 이는 수학적 진리를 발견하는데 적합한 이론이며 그들은 다른 분야도 이처럼 수학적 방법을 통하여 진리를 발견하려 한다.
2) 이성적 인간관
세계는 신에 의한 이성적 질서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합리론의 기본전제이다. 세계의 본질은 이성이므로 인간도 이성적 본질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을 개발하고 이성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인간의 본분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행위 윤리 분야)은 인식론에서 말하는 이성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인식론에서 말하는 이성은 사유능력, 추론 능력을 의미하지만 삶의 영역에 있어서 이성이란 이익이나 감성, 욕망에 흔들리지 않고 계획을 세우고 계산하고 추론하여 냉정한 태도를 잃지 않고 한결같이 본분을 지키고 의무를 지키는 사람을 의미한다. 예를들면 한국은 춘향이, 제인 오스틴의 센스앤 센서빌리티의 언니 엘리너(엠마톰슨),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멜라니(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등을 들 수있다.
1) 인식론
경험론은 진리는 인간의 감각기관(눈 코 귀 입 손-오관)에 의해 인식한 대상을 실험과 관찰에 의해 증명함으로써 지식(진리)을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경험론자에는 베이컨 로크 흄등이 있는데,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다는 로크의 낙관주의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없다는 흄의 회의주의자로 나누어 진다. 이후 실증주의와 논리실증주의 학자들이 경험론의 전통을 승계한다.
로크는 본유관념설을 부인하고 백지(白紙)설을 주장한다. 인간은 백지로 태어났기에(즉 선천적인 지식은 없기에) 후천적인 경험을 통해서만 지식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경험한 모든 것이 진리가 될 수 없으므로 참된 학문 연구 방법으로 그들은 구체적 사실을 관찰 실험하여 일반 법칙을 끌어내는 귀납법을 제시한다.
그런데 흄은 경험론을 끝까지 밀어부쳐 회의론에 빠지고 만다. 전통적인 진리관에서는 진술의 내용이 사실과 일치할 때 진리라고 본다(주관과 객관의 일치, 대응설). 하지만 흄은 진술 내용이 사실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꿀은 달다.'하는 진술이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실제 꿀은 달아야 한다. 그런데 흄에 따르면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해서만 세상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꿀이 단지는 알 수 없다.(꿀이 달다는 관념은 실제 꿀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입과 뇌가 합동하여 만들어낸 관념이기에 실제 꿀이 단지는 알수 없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꿀이 달다.'라는 진술은 '내 입에는 꿀이 달게 느껴진다.'라는 진술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비록 경험을 통해 얻은 과학적 지식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리인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흄의 입장이다.
2) 경험론의 인간관- 이기적 인간
경험론자들은 사람을 경험해 보니 모두가 이기적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한다. 대표적인 경험론자 홉스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이며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본질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이성적이 아니라 이기적 욕망적 충동적이라는 것이다. 영화속 경험론적 인간은 타인에 대한 배려는 없고 오로지 자기중심적이며 다혈질,충동적, 자신의 감정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면 한국은 황진이, 제인 오스틴의 센스앤 센서빌리티의 동생 매리언(케이트 윈슬릿) 보봐리 부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카렛 오하라)등을 들 수 있다. 이성론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성이라는 것은 욕망의 노예일뿐이라는 것이다. 어떤 여인을 꼬셔 결혼하기 위해 계획하고 계산하여 착한 척하는 경우가 이에 합당한 예가 될 것이다.
칸트는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합리론자들이 생각하듯이 세계의 근본진리를 미리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경험론자들이 생각하듯 백지와 같은 상태에서 세계로부터 주어지는 인상을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세계를 알아가는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1) 이성론 비판
연역법의 논리적 무모순성은 실재 존재하는지를 보증하지 못한다. ( 광물로 된 산이 존재한다. 황금도 광물이다. 고로 황금산이 존재한다.) 즉 논리적으로는 모순이 없지만 실제 존재(객관성)는 보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성론은 독단론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으며 논리성만으로는 공허하다.
(2) 경험론 비판
경험론, 경험에서 얻은 지식은 일단 객관성(토끼는 눈이 두개다)은 인정된다. 즉 경험론은 내용이 있는 실질적 지식이라는 것이 칸트의 판단이다. 그러나 경험론은 개연적이며 상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예를 들면 러셀의 거위(매달 25일 거위에게 특식을 주는 경험이 반복되었다 해도 12월 25일 특식을 준다는 보장 없다. 크리스마스때 잡아 먹힐 수도 있다.)를 들수 있다. 또 홈런타자가 10게임 연속 홈런 쳤다고 해서(경험이 반복되었다 해서, 귀납법이 인정된다 해도) 11번째 게임에서도 홈런친다는 필연성은 없다. 극단적으로 수십억년간 태양이 동쪽에서 뜨더라도 내일 우주 멸망으로 태양이 뜨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즉 경험은 객관성은 인정될 지언정 필연성, 보편 타당성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칸트의 판단이다.
1) 실재론
인간의 주관(의식)외에 세계(=자연=대상=물질=사태= 객관)가 실재하는가에 관하여 이전의 합리론과 일부 경험론자들은 자연세계가 실재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 대표가 데카르트는 정신(주관)은 사유하는 실체, 물질(객관 자연)은 연장 있는 실체(심신이원론),라 주장함으로써 실재론을 대표하는 철학자가 되었다.
2) 칸트의 관념론(선험적 관념론)
칸트는 물자체의 세계는 알 수 없다고 함으로서 실재론을 부인하고 관념론입장에 선다. 우리 눈에 비친 사과의 모습(현상)이 개미의 눈에도, 잠자리 눈에도, 코끼리의 눈에도 동일하게 비친다는 것을 우리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사과의 실제모습(물자체)을 우리는 알 길이 없다고 한다. 이는 전통 이성론과 경험론의 실재론을 부정한것이다. 사과의 모습은 실제 사과 모습(물자체)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구성해 낸(관념) 모습(현상)이라 한다. 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한다. 대상(사과)이 우리 의식에 반영 촬영 모사(반영론)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사과를 모습을 구성해 낸 것(=만들어낸 것= 구성설)이라는 것이다. 결국 세상에 있는 자연(세계)은 실제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관념으로 구성해 낸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럼 인간은 어떻게 자연을 구성해 내는가? 달리 말하면 인간은 어떻게 지식(진리)을 획득할 수 있을까? 그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여 자신의 인식론을 완성한다.
3)인식작용
1) 1단계 -감성(경험) 작용
어떤 것(사과/진리)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서 감성 (눈,코,귀,입,손)이 작동하여 그 대상을 배열 시킨다. 예를 들면, -오늘(시간) 과수원에서(공간) 어떤 것(대상/ 진리)이 있네- 라고 배열시킨다. 여기서 시간 공간은 우리 인간의 경험 이전에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선험적, 그리고 시간 공간 없으면 사물(사과)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기에 시간 공간을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형식이라 한다. 즉 모든 인간이 선험적으로 갖추고 있는 감성형식의 틀인 시간 공간이 있기에 우리는 사물을 인식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한 단계를 더 거쳐야만 한다.
2) 2단계- 오성(이성)작용
다음으로 선험적 범주로 무장한 오성(지성 사고능력)이 작동한다. -사과 20개(다수)가 바닥에 떨어져 있네(긍정 부정). 밤새 바람이 심하게 불었기 때문이군(인과관계).- 이처럼 우리는 어떤 사실(진리)를 인식하게 된다. 여기서 범주란 우리 인간이 그 어떤 대상에 대해 사유할 때 그 대상이 무엇이던지 상관 없이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분명 어떤 양과 질을 가진다는 것, 속성을 지닌 실체라는 것, 특정원인의 결과로서 다른 것들과 상호작용 안에 있다는 것을 미리 전제 한다. 즉 사과가 1개냐 여러개냐, 단일성,다수성, 있다 없다등 긍정 부정, 개연성 우연성, 필연성등등 12가지를 말한다. 이 12범주 역시 경험 이전에 주어진 인간만의 고유의 틀이다. 숫자, 없다, 인과 관계등 12범주는 우리 경험세계에는 존재치 않는 것이므로 이를 경험에서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경험세계에서 알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는 것이 이처럼 선험적으로 우리인간에 주어진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시간 공간과 마찬가지로 12범주는 경험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선험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를 오성의 범주라 하는 바, 우리는 대상을 경험하기도 전에 이미 그 대상의 존재 방식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이다.
3) 종합
칸트에 의하면 경험 이전에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시간 공간(감성형식)과 오성의 형식이 12범주를 통해 후천적으로 경험과 이성의 합동작전으로 지식을 얻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문가가 아닌 배우는 학생입장에서는 칸트가 말하는 감성과 오성은 각각 경험과 이성으로 바꾸어도 무난할 것이다.) 이런 합동작전으로 “오늘 과수원에 사과 20개가 바닥에 떨어져 있네. 밤새 바람이 심하게 불었기 때문이군.” 이런 사실에 관한 지식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 인식론의 의미는 간단치 않다. 이제 인식의 기원은 신(합리론자)이나 세계(경험론자)가 아닌 인간 자신이다. 인간 자신은 자신만의 선험적 틀인 감성 형식(시간과 공간) 오성 형식(12범주)를 가지고 신에게서 독립한 채 독자적으로 사물을 구성한다. 즉 인간이 신과 자연을 물리치고 세계를 구성(창조)하는 주체로 우뚝 선 것이다. 인간 주체의 확립인 것이다. 칸트가 위대한 이유이다.
백상아리의 물 자체는 우리가 알 수 없으나 우리 인간의 현상계에 나타난 모습은 식인 상어이다. 경찰서장 브로디(로이 샤이더)와 애미티 시장은 식인 상어를 잡기 위해 두 사람, 매트 후퍼(리차드 드레이퍼스) 와 퀸트(로버트 쇼)를 고용한다. 후퍼는 이성적인 면모를 보이고 퀸트는 경험적 인간형의 면모를 보인다. 진리 탐구는 경험과 이성의 합동작전에 의해 수행된다는 칸트의 구미에 딱 맞는 조합이다.
1) 퀸트- 경험론적 인간형의 전형
거만하고 다혈질 성격의 퀸트는 상어 사냥 전문가이다. 그는 2차대전때 항공모함 인디애나 폴리스의 선원이었다. 그는 “ 히로시마에 투하되는 원자폭탄을 싣고 무사히 배달을 마치고 티니먼 섬에서 레이터로 돌아오는 도중 그 항공모함은 일본 어뢰 두방을 맞고 만다. 천백명이 물에 빠지고 항모는 12분만에 참몰했는데 4m짜리 뱀상어가 몰려왔다. 결국 시간당 6명이 잡아 먹히고 겨우 316명이 생존한다. 5일째 폭격기가 우릴 발견해서 살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상어 사냥에 나섰고 한번은 원통을 2개나 던져 5m가 넘는 놈을 낚은 적도 있었다. 퀸트는 대책회의에서 시장에게 요구한다. 자신이 상어를 잡겠다며 “이 놈은 사람을 통째로 먹는 놈이다 3천달러 주면 찾아주고 만달러 주면 죽여 주겠다. 지원자나 동료 사양한다. 나혼자 가겠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최고로 치며 방구석 이론가인 후퍼를 무시한다. “후퍼씨 지금 뱃놀이 가는게 아니다. 상어잡으러 가는 것이다. 가래상어나 곱상어잡자는 것이 아니다. 내 손이 5천달러 그물로 2천달러 잡던 손이다.그런 그물롤 백상어 잡으려다 그 그물이 종이 인형처럼엉망이 될 것이다.”
자신의 경험이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아주 거만한 인물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셈이다. 경험론에서 주장하는 이기적 충동적 욕망적 인간의 전형인 셈이다.
2) 후퍼- 이성적 인간형
차분하고 진지한 품성을 지닌 후퍼는 해양연구소에 근무하는 상어전문가이다. 그는 첫희생자 시체를 살펴보고 이는 보트사고가 아니라며 오조리 상어거나 롱지 아누스 청상아리일 가능성 제시한다. 피해 여인의 피부가 많이 떨어져 나가 분석이 어렵다면서도 오조리 상어보다 훨씬 큰놈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브로디 부부와 식사 자리에서도 이성적 태도를 강조한다. “제이 이곳을 떠나면 유일하게 이성적인 분이 서장님”이라며 식인 상어에는 관심없고 해수욕장을 개장해 돈벌이에만 급급하는 시장과 시민들을 비판한다.
시장은 결국 3천불의 현상금을 내걸었고 이에 전국에서 몰려든 사냥꾼들 중 하나가 식인상어랍시고 잡아온다. 이에 시장과 상인들은 크게 기뻐하지만 후퍼가 나타나 이 상어의 입크기가 희생자 상처크기와 다르다며 배를 갈라보자 제안하지만 거절 당한다. 후퍼는 무리에서 뛰쳐 나와 혼자 다니는 상어를 방랑자라 부르며 1m 깊이 해변 3m에서 사람 사냥에 나서며 먹이가 떨어질 때까지 그 곳 근처에서 머문다는 영역설을 주장한다. 이에 근거하여 브로디 서장의 허락하에 후퍼는 상어의 배를 갈라보지만 사람의 몸덩이는 찾지 못해 식인상어가 아님을 증명해 낸다.
후퍼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사람이 수영할 때마다 그 움직임이 상어를 유인한다며 그것은 바로 카카로돈 카카리아스 백상아리라고 규정한다. 이는 완벽한 살인기계로서 진화의 기적에 해당하며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새끼 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식인 상어는 남쪽 해변 근처에서 찾아 낼 수 있다는 예측을 한다.
후퍼는 경험자인 퀸트를 무식하다며 무시한다. “이런 노동계급의 헛소리를 들을 이유 없어요”
이처럼 후퍼는 상어에 대한 이론적 학문적 연구와 치밀하고 검증된 분석을 통해 냉정한 판단을 내린다. 마치 진리에 대한 이성적 태도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사람처럼.
3) 죠스를 잡다.
브로디 서장과 퀸트 후퍼는 죠스를 잡으러 나선다. 경험 많은 퀸트가 대장질을 하며 진두지휘를 한다. 브로디는 개성강한 두사람을 조화시키려 노력한다. 결국 퀸트의 작살 총이 죠스의 등에 명중하지만 그 거대한 힘에 배는 밤낮없이 이끌려 다닌다. 후퍼가 철창안에서 잠수하여 죠스를 노리지만 죠스의 공격에 철창은 부서지고 후퍼는 바다속 바위틈에 몸을 숨긴다. 죠스의 거침없는 공격에 배는 부셔지고 퀸트는 죠스 아가리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침몰하는 배에서 브로디 서장은 산소통을 죠스 아가리에 집어 던지는데 성공하고 그는 가까스로 총을 쏘아 그 산소통을 터뜨림으로써 죠스를 폭파시키는데 성공한다.
경험과 이성의 합동작전으로 거대 진리를 획득한 셈이다.
마치 감독은 칸트를 존경한다는 듯이 영화는 그의 인식론 입장을지지하는 결론으로 마감했다. 칸트의 시각으로 보면 이성과 경험의 합동작전으로 진리를 획득한 셈이다. 칸트는 자신의 이론이 옳았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 영화에 기립박수를 보냈을 것이다.
영화속 두 주인공 박두만과 서태윤의 첫만남에서 두 사람의 성격을 보여준다. 서울에서 부임받아 임지에 도착한 서태윤이 우연히 여자뒤에서 걷는데 여자가 그를 경계하고 걷다가 언덕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이에 그녀를 구하려고 하는데 이때 마침 등장한 박두만이 그를 성폭행범으로 오인하고 이단 옆차기로 쓰러뜨리고 그를 두들겨 패 체포한다. 나중에 사정을 알고 풀어준 후 둘이 한마디씩 주고 받는다.
“싸움을 못해 형사가...”
“사람을 못알아봐 형사가...”
전자는 형사가 사무실에만 앉아서 범인과 싸워보지도 않았다는 비아냥이고, 후자는 성급하고 감에 의한 수사만 해서 범인 못잡고 엉뚱한 사람만 잡는다는 비아냥이다. 이처럼 첫 만남에서 서태윤은 싸움을 못하는 샌님 선비, 즉 사무실 형사이고(이성적인 면), 박두만은 범인도 못알아 보는 다혈질의 무대뽀 현장 형사(경험적인 면)임을 드러낸 것이다.
감성과 오성의 합동작전에 의해 진리를 인식한다는 칸트입장에서 감성적인 형사 박두만(송강호)을 경험의 자리에, 이성적인 형사 서태윤(김상경)을 이성의 자리에 대입해 보기로 한다.
1) 형사 박두만(송강호)- 경험적 인간
2년제 출신 박두만 형사는 타자기로 조서를 쓰는데 독수리타법이다. 이는 그가 글이나 이론에는 관심도 없고 무지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과학적 수사는 팽개치고 자신의 경험에 의존한 주먹구구식 수사를 한다. 두만은 동료 서태윤 형사에게 외친다. “야 너 서울에서 뭐하러 왔어 서울이 그렇게 넓냐? 미국은 땅덩어리가 넓어 대가리 굴리고 분석하고 하지. 그런데 이 대한민국 땅덩어리가 좁아 두발로 뛰면 돼. 형사는 두발로 수사한다 말이지. 너처럼 잔대가리 굴리는 새끼는 ...”
두만은 이성적 과학적 방법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신의 경험이 제일이라는 것이다.
두만은 자신만의 형사 노하우를 바탕으로 수사한다. 성질은 포악하고 피의자의 인권 같은 것은 전혀 고려치 않고 범인을 잡기 위해, 아니 범인을 조작 생산해 내기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인다.
그는 소문에 의한 수사, 감에 의한 수사, 점쟁이에 의한 수사를 한다.
백광호라는 자가 거들 뒤집어 쓰고 살해 당한 피해자인 이향숙을 그날 졸졸 따라 다녔다는 소문을 아내 곽설영(전미선)로부터 듣고 그를 체포하여 수사한다. 정신지체가 있는 지적장애인에다 증거도 없는데도 백광호를 지하의 취조실에 감금한 채 발로 짓밟고 고문하고 자백을 강요한다. 범죄 정황을 그에게 주입하고 가르쳐 주어 범인을 조작하려 든다. 이에 백광호는 두만이가 불러준 대로 자백을 하게 되고 연쇄살인범을 잡았다고 대대적 보도까지 나왔으나 결국 검사가 영장을 기각하고 만다.
또한 그는 현장에 범인의 흔적이 없다는 점에 착안하여 범인은 무모증이라는 심증으로 싸우나탕에서 잠복수사를 하고 절을 찾아 중을 수사대상으로 삼는다. 그것도 효과가 없자 박두만은 점쟁이를 찾아가고 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부적을 써와 점궤에 의한 수사를 한다. 그 결과로 변태적인 채석장 노동자 조명순을 체포해 고문 강압수사를 한다.
이처럼 자신의 형사적 감만 믿고 날뛰며 쉽게 흥분하고 박두만은 경험적 인간의 표본이다.
2) 형사 서태윤(김상경)- 이성적 인간
4년제 대학졸업하고 서울에서 자원하여 시골로 내려온 엘리트 형사인 그는 박두만의 강압수사, 감에 의한 수사를 반대한다. 그는 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며 나름의 수사자료를 분석하여 살인사건이 벌어진 날 비가 왔으며 빨간옷의 여인이 참변을 당했음을 알아낸다. 이후 빨간옷 입고 비온날 나간 여인이 있음을 알아내고 1명이 더 살해 되었으리라 추측하는데 실제로 그녀의 사체가 발견된다. 우여곡절 끝에 언덕 위의 집에 홀로 사는 여인이 범인으로부터 납치되었다가 극적으로 살아 나온 사실을 알아내고 그녀의 진술을 받아낸다. 범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그녀의 진술에서 얻어 낸 곳이라곤 범인의 손이 부드러웠다는 것 단 하나. 이 사실을 들어 손이 거친 채석장 노동자인 조명순을 풀어준다.
수사가 거듭 될수록 두만은 태윤을 닮아가고 태윤은 이성적 태도를 잃고 두만을 닮아 간다. 태윤은 여경의 도움으로 여인이 살해당한 날 FM 방송국에서 “유제하의 우울한 편지”라는 노래가 나왔음을 알아낸다. 방송국에 전화한 끝에 옆서를 보낸 당사자가 박현규(박해일)임을 알아채고 그가 연쇄살인범임을 확신하고 감시한다. 감시망을 뚫고 사라진 박현규를 붙잡은 태현은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 결과 피해자에 묻은 정액과 박현규의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보고 풀어 줄 수밖에 없다. 분이 덜 풀린 태현은 현규를 향해 총을 쏘지만 두만이 제지한다. 태현은 어둠속의 터널로 사라진다.
이 영화는 이성과 감성의 합동작전으로도 범인을 잡는데 실패한다.
3) 칸트의 이 영화에 대한 평가
살인의 추억은 진리를 획득하는데 실패하고야 말았다. 이에 대해 칸트 어떤 입장을 보일 것인가?
죠스와 살인의 추억의 차이는 브로디 선장의 유무이다. 즉 죠스에서 브로디 선장은 개성이 분명한 두 사람, 후퍼와 퀸트를 조화롭게 이끌어 한배를 타고 투쟁했다는 점이다. 이를 은유하면 브로디 선장은 선험적 형식( 감성형식과 오성형식)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기에 이성과 감성이 제 역할을 하여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살인의 추억은 그러한 선험적 형식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저 박두만 형사와 서태윤 형사의 개인기만 있을 뿐이다. 반장(송재호)이란 사람도 둘을 조정하고 조화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 그리하여 경험론의 문제점인 보편 타당성이 없는점과 이성론의 문제점이 독단의 함정만이 두드러진 영화였다고 평가할 것이다. 즉 박두만의 주먹구구식 수사로 엉뚱한 사람을 범죄자로 내몰고, 태현은 즉 박현규가 범인이라는 증거도 없는데 범인이라 확신한 점이 실패의 원인이라 할 것이다. 또 하나 칸트가 트집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이성과 경험의 합동이 일관되지 못하고 뒤죽박죽 되었다는 점을 들 것이다. 두만은 경험적 인간이라기 보다는 폭력적 광적 파쇼적인 인간이고 태현은 이성적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며, 둘은 이 태도마저 일관되지 못하고 두만은 태현을 닮아 가고 태현은 두만을 닮아가 자신의 차분한 냉정함을 잃고 폭력적 충동적으로 변했기에 이성과 경험의 합동작전이라고 부르기에 미흡하며 따라서 범인을 잡지 못한 것은 필연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즉 칸트는 자신의 이론이 틀린 것이 아니라 이성과 경험을 잘못사용하거나 일관되지 못하였기에 살인의 추억에서는 진리 획득에 실패했다는 진단을 내릴 것이다.
좀 엉뚱미 가득한 해석이긴 해도 죠스는 칸트의 이론대로 이성과 경험이 합작하여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영화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살인의 추억은 어떨까?
봉준호 감독은 칸트 보다는 흄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닐까? 세상이 칸트 이론대로 이성과 경험이 합작하여 진리를 길어 올릴 수 있다면 벌써 우리는 많은 과제, 이를 테면, 암등 난치병 정복, 달정복, 양자컴퓨터 완성등을 해내지 않았을까?
아마 봉감독은 칸트 뉴턴 아인슈타인의 낙관론 보다는 흄이나 양자역학처럼 세상의 진리를 우리는 확신할 없다는 입장인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