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은 친자보다 앞선다
KBS의 ‘이산가족을 찿습니다’라는 프로그램을 모티브로 제작한 위 영화는 1986년 임권택 감독 작품이다.
화영(이상아/김지미)은 8.15해방과 함께 일본에서 고향인 황해도 길소뜸으로 돌아와 정착하지만 콜레라로 부모님과 동생들은 죽고 홀로 고아가 된다. 같은 마을의 동진의 아버지는 화영을 딸자식처럼 보살피고 키웠고 동진(김정석/ 신성일)과 화영은 서로 사랑에 빠진다. 결국 둘은 성관계를 갖게 되고 학생신분인 화영은 임신을 하게 된다. 이에 동진의 집에서 쫒겨난 화영은 춘천에 있는 동진의 이모님댁으로 간다. 아버지의 용서로 동진은 화영을 찾아가지만 화영은 출산을 위해 길소뜸으로 가는둥 둘의 운명의 엇갈림이 계속된다. 때마침 6.25 전쟁이 발발하여 화영과 동진은 끝내 만나지 못하고 그녀는 홀로 아들 승운(한지일)을 낳고 기른다. 화영은 학교 스승이었던 음악 선생을 만나 심부름 해주었는데 그만 그는 빨치산 거물이었고 결국 화영은 간첩죄로 체포되어 7년 옥살이를 한다. 그동안 아들은 버려져 고아원을 전전하게 된다.
그 30여 년 후, 화영은 KBS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서 아들 승운과 비슷한 사람을 보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다. 그녀는 이산가족 현장에서 첫사랑 동진을 만나고 둘은 승운을 찾아 강원도로 간다.
승운은 현재 맹석철(한지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는 아내와 아이 둘을 거느린 가장인데, 극빈층으로 특정한 직업 없이 허름한 집에서 하루하루 근근히 살아간다. 무식하고 상스럽고 아내에게는 폭력적이고, 양아치 룸펜인 승운에 화영과 동진은 아연실색한다.
마지못해 셋은 혈액검사를 하고(당시는 DNA 검사는 없었나 봄) 셋의 부모 친자관계를 부정할 만한 모순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박사(최불암)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화영은 100% 친자관계임을 확증할 수 없다는 핑계로 자리를 박차고 떠나 버린다. 큰아들로 입적 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던 동진도 가족의 반대를 등에 업고 자주 만나자는 말만 남기고 떠나 버린다. 그렇게 셋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 버린다.
뿔뿔히 흩어졌다가 30년 만에 만나게 된 첫사랑과 그들의 아들, 이 세 사람의 삶을 반추해 봄으로써 결국 6,25전쟁의 비극을 그린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좀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OUT OF MIND OUT OF SIGHT를 실현한 영화, 유전자 결정론의 허구를 입증한 영화, 자유의지론의 허구를 입증한 영화, 계급은 친자보다 앞선다를 증명한 영화, 과거의 인연 보다는 현재 삶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영화, 30년간의 이질감을 극복 못한 영화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30년 살아온 부모와 친자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게 하는 영화로 파악하고자 한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테고 많은 논점이 있겠지만 다음 세가지를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 영화에서 화영 가족의 비극의 원인은 6.25전쟁이라고 단언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6.25전쟁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우연이라면 피할 수 있었다는 의미(비 결정론)이고 필연이라면 피할 수 없었다(결정론)는 말이 된다. 이를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으로, 결정론을 취하든 비결정론을 취하든간에 하여튼 전쟁은 발발했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화영은 중산층, 동진은 서민, 아들 성운은 최 극빈층이 되었다. 이들의 개별적 삶은 어떻게 평가될까? 이와 관련하여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운명인가? 사회인가? 자유의지인가? 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화영은 혈액검사의 결과를 불신한다. 그녀는 100% 친자관계임을 증명할 것을 요구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린다. 그녀의 이런 행위는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하나? 이에 대해 공리주의와 의무주의, 그리고 도덕적 딜레마를 살펴 보기로 하자.
이에 대해 피할 수 없었다는 역사적 결정론과 피할 수 있었다는 역사적 비 결정론이 있다.
날아가는 총알이 자신의 의도대로 날아갈 수 없듯이 역사의 진행 역시 일정한 법칙에 따른다. 얼른 보기에는 역사속에서 우연적인 사건들과 자유와 선택적 행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단지 우리가 역사속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유형이나 법칙들을 발견하고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착각일 뿐이다. 이와 같이 역사 속에는 어떠한 우연도 존재하지 않고 그것이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간에 일정한 원인이 있다고 여기는 입장을 역사적 결정론이라 한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견해로서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과 헤겔의 관념론적 역사관,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이 있다.
1)목적론적 역사관
라이프니츠의 예정 조화설은 목적론적 역사관인데 이 역시 결정론에 속한다.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항상 하나의 목적을 가지며 개별적인 목적들은 전체 목적(신의 섭리등)에로 향해 있다는 이론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개별적인 역사적 행위도 그 자체가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전체와의 일관적인 연관성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기독교적 역사관도 이에 해당한다.
2)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존재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는 모나드(원자와 같은 맥락)로 이루어 졌는데, 이러한 모나드는 하나의 단일체 이기에 부분이 없고, 더 이상 나눌 수 없기에 형태가 없으며, 모나드간에 서로 소통하는 창이 없다는 특징을 가진다한다. 이러한 모나드들이 조화롭게 운동하는데 이걸 가능케 하는 궁극의 배후는 전지전능한 신이다. 우주는 신의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최고의 완전한 질서 속에서 조화롭게 운영된다. 완전한 것을 본질적 속성으로 하는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우주는 창조될 당시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장래에도 완벽한 질서 속에서 조화를 추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모든 일은 신의 예정 조화 아래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에 의하면 6.25전쟁도 신의 예정에 있었던 일이고 또 세상을 조화롭게 하려는 신의 뜻(억지 예를 든다면, 전쟁을 통해 반전사상을 키운다든지, 인구수등 환경 변화를 야기한다거나 등, 신의 계획에 맞게 세상을 수정하는등.)인 셈이다.
3)평가
그러나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예정 조화설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신은 완전무결한 존재이기에 선한 존재이고 이미 신의 섭리가 완성된 세상이다.그런데 이렇게 완전무결한 선한 신이 창조한 세계에 왜 악이 존재하고 악이 판치는가? 6.25때 무고한 사람을 무참히 살상한 자들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불구하고 악의 편에 선자들 아닌가? 이에 대해 라이프니츠의 예정 조화설은 대답을 주지 못한다. 이에 반해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관은 이문제를 해결해 준다.
1) 헤겔에 의하면 역사의 주인은 정신이다. 즉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나 계급이나 민족이 아니다. 사람들간, 계급간, 민족간의 투쟁, 전쟁은 현상일 뿐 본질은 정신이 변증법적 발전 과정이다. 이러한 절대정신은 자유를 완전하게 실현하기 위해 인간들을 사용하여 변증법적으로 자신의 길을 간다. 예를 들면, 현상은 나폴레옹의 프랑스대 러시아 유럽 전쟁이지만 본질은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것이다. 정신이 완전한 자유에 도달해서 모두의 자유가 실제로 이루어지면(이성적인 겻이 현실적인 것이 되면) 역사도 완성된다. 역사가 완성되면 정신도 절대정신으로 완성된다.(절대정신은 상대정신과 구별되는데, 상대정신은 사람마다 달리 평가되는 정신을 말하나 절대정신은 모든 사람이 일치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즉 모두가 진정 자유로울 때 절대 정신은 완성된다. 하지만 일부만 자유로울때는 상대정신일 뿐이다.) 따라서 역사의 영웅들은 절대정신의 명령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헤겔은 나폴레옹을 “말을 탄 정신”이라고 했다.
그는 한 사람만 자유로운어린아이 단계( 중국 인도)에서 소수만 자유로운 청년기( 그리스 로마, 종교개혁)단계로, 모두가 자유로운 정신의 본성을 회복해 가는 단계(게르만, 즉 독일 영국)로 발전해 간다는 것이다.
2) 이성의 간계
이성의 간계는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유사한 개념이다. 아담 스미스에 의하면 시장참여자 가계 기업등이 각자 자기이익을 충실하게 구현할 뿐이지만(즉 그들에게 극대만족이나 최대 효율등 시장적 정의를 실현할 의도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전체가 이익을 누리고 정의가 구현되는 시장질서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역사속의 개개인은 개인적 목적을 추구하지만 그럼에도 자신도 모르게 이성이나 자유등 정신의 수단이나 도구가 되어 무의식적으로 이성의 목적에 봉사하게 된다. 즉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성의 간계가 작동하여 자유를 실현하고 절대정신을 실현하는데 공헌 한다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자유롭게 내버려 둠으로써 도리어 자신의 섭리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즉 이성의 간계로 인하여 신은 인간의 자유보장, 신의 섭리 둘다 이루게 된다.
이렇게 이론구성함으로써 헤겔은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양립가능함을 주장하였다. 또한 우리의 현재는 신의 섭리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며 변증법적 발전의 과정에 있기에 라이프니츠가 설명할 수 없는 악이 존재하고 판치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있다. 악이 판치는 이유는 자유정신이 악과 변증법적 투쟁과정에 있다는 증거이며, 결국 이성의 간계로 인하여 악은 절대정신인 자유에 굴복하는 역사적 여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3)이러한 헤겔에 의하면 6.25전쟁은 자유진영과 독재진영의 운명을 건 투쟁이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쟁은 미시적으로는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자유의지 때문에) 언젠가는 터져야만 하는(결정론) 전쟁이었으며 결국 자유정신이 승리하여 절대정신을 완성할 수 밖에 없다고 평가할 것이다.
1)역사가 정신의 변증법적 과정이라는 헤겔과는 반대로 마르크스는 역사는 생산력(물질)의 변증법적 과정이라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사회실재론에 근거 사회는 인간과 독립한 사회적 유기체로서 개개인간을 구속한다는 전제에서 사회구성체 이행법칙을 제시한다. 모든 사물의 운동원인은 내부 모순인바, 생산력(하부구조- 청동 철기 수공업, 공장제 대량생산등 물질부분)과 생산관계(상부구조- 법 정치 이데올로기등 정신부문)는 필연적으로 모순에 처하게 되어 이를 담당하는 계급은 투쟁을 벌이게 된다.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계급투쟁을 통해 사회는 원시공산사회에서 고대 노예제사회(왕족-노예 계급), 중세 봉건사회(봉건귀족- 농노계급)를 거쳐 근대 자본주의사회(부르조아(시민)계급-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로 발전하여 최종적으로 공산사회로 이행한다고 한다.
2)이에 의하면 6.25전쟁은 자본을 대표하는 부르조아지 세력대 노동을 대표하는 프롤레타리아 세력의 계급투쟁으로서 공산사회로 이행하기 위해 거쳐야할 필연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이 전쟁은 반드시 일어났어야만 하는 전쟁인 셈이므로 그 누구에게도 전쟁의 막대한 피해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
데카르트 칸트, 베르그송, 사르트르등이 취하는 견해인바 역사적 비결정론자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역사 속에는 자연과학적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기에 인간 역사에 있어서 이른바 필연적인 발전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사는 예측 불가능하고 설명 불가능하다. 자연은 일정한 규칙성이 존재하고 이에 따라 앞으로 일어날 현상에 대해 예측하고 설명할 수 있어도 인간사는 어떠한 예측과 설명도 가능하지 않다. 만약 역사를 예측하고 설명할 수 있다면 아마 역사는 항상 진보해야 하고 시행착오를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정론과 인간 자유 문제와 도덕적 책임의 문제는 양립할 수 없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결정론의 딜레마는 자유 문제와의 충돌에 있고 이에 따라 제기되는 도덕적 및 법적 책임의 문제와의 충돌일 것이다. 만약 역사적 결정론이 보편화 된다면 우리는 어떤 역사적 책임도 어느누구에게도 귀속 시킬 수 없는 도덕적 법적 허무주의에 빠지고 말 것이다.
2차대전도 필연적이었다면 수천만 유태인을 살해한 히틀러나 나치에게도 책임을 물은 근거가 없는 셈이다. 이는 명백히 부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역사적 비결정론에 의하면 6.25전쟁은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으므로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를 규명하고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간첩죄로 7년 감옥살이한 화영(김지미)은 출소하여 아들성운을 잃고서 억척스럽게 살아간다. 남대문 시장에서 다방 마담으로 일하다가 자신을 수사했던 장교랑 동거한다. 3년 살다 그가 사업실패 후 빛만 남기고 도주해 버리자 그녀는 술집을 운영한다. 거기서 만난 현 남편(전무송)과 억척스럽게 돈을 벌고 아들딸 낳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동진(신성일)은 인민군에 끌려가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가까스로 도망쳐 가야산 근처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만다. 장씨덕에 목숨을 건진 그는 국군 특공대에 입대하였고 길소뜸근처에서 5발의 총알을 맞고 간신히 살아난다. 그 후 그는 화영을 찾는다는 팻말을 목에 걸고 전국을 떠돌며 약장사를 한다, 생명의 은인인 장씨 아저씨가 자신의 딸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자 그의 딸(오미연)과 결혼하여 5남매를 키우며 서민으로 살고 있다.
고아원을 전전하던 성운(한지일)은 이직업 저직업 전전하여 기술도 배우지 못하고 도살장등 일용직으로 근근이 살고 있는 처지이다. 심지어 물에 빠진 시체를 상대로 돈벌이를 하곤 했다. 소년원을 들락거리던 성운이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일은 해병대에 자원 입대하여 월남에 파병된 일이었다.
전쟁으로 뿔뿔히 흩어진 셋은 이처럼 신산한 삶을 살았다. 이들의 삶은 자신들이 만든 것인가? 아니면 사회가 만든 것인가? 하늘이 그런 것인가? 여기에는 운명론, 결정론, 자유의지론의 대립이 있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운명론은 세상의 사건은 모두 미리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고(신 또는 절대자에 의해), 인간의 노력으로 그것을 바꿀 수 없다고 한다. 즉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행동들 모두 이미 정해져 있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위 영화속 세 사람은 자신의 운명이 그러하므로 아무리 발버둥치고 노력해도 자신의 처지를 벗어날 수 없으니 체념하고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운명론은 신등에 의해 결정되므로 미래가 필연적으로 결정된다. 이에 반해 결정론은 미래는 과거와의 인과법칙에 의해서 미래가 우연히 결정되는 경우를 말한다. 운명론은 이미 정해진 운명은 무슨 짓을 해도 바뀌지가 않으므로 필연성을 띠지만 결정론은 우연성을 띤다. 즉 결정론은 미래가 정해져 있긴 하지만 과거의 행동이 바뀌면 미래도 바뀔수 있다는 점이 운명론과 다르다. 다만 자유의지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운명론과 결정론은 차이가 없다.
유전자 결정론이란 유기체의 행동은 구성 유전자들의 합(게놈)이 낳는 필연적 결과라고 보는 견해이다. 유기체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을 유전자로 간주하며, 인간의 사회적 행동도 유전자에 의해 좌우된다는 주장이다. 유전자만 보고서도 그 개체가 어떤 모습을 할지, 어떤 질병에 걸릴지, 그리고 어떤 행동양식을 보일지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모든 생물은 유전자의 명령을 받아 그 생물을 보호하고 복제해 나가는 이기적인 생존 기계라고 주장한다. 신체적, 행동적 표현형뿐만 아니라 인간의 각종 사회적 행동 역시 유전자의 보존과 복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전자 결정론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은 인간 세상은 유전자가 인간의 몸을 빌려 펼치는 서바이벌 게임이기 때문에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평등, 갈등, 차별, 대립 등을 보다 나은유전자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부추기는 측면이 있다. 또한 똑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아 한 몸에 두 사람이 달린 샴 쌍둥이의 경우에도 한 개체는 병에 걸렸는데 다른 한 개체는 건강한 경우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유전자 때문에 한 개체에만 병이 생겼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성운의 경우 부모인 동진, 화영과 유전자가 일치한다. 그럼에도 무식하고 상스럽고 폭력적, 야만적인 모습은 온화하고 따스하며 나름 성실히 살아가는 부모의 성품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이러한 영화속 성운의 모습은 유전자 결정론의 허구성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운의 현재모습은 주변 환경의 영향으로 설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경제결정론은 인간의 의식, 사회의 사상, 이념, 정치, 법률 등의 상부구조(=생산관계= 정신)가 그 사회의 하부구조인 경제적 기초(=생산력=하부구조=물질)에 의해 그 특징이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쉽게 말하면 그들의 재산 계급이 그들의 의식을 규정 결정한다는 것이다. 부르조아는 부르조아 의식이, 프롤레타리아는 프롤레타리아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의 우위를 주장하는 전통관념론을 부정하며 정신은 물질의 반영 촬영 모사일 뿐이라는(레닌) 유물론의 당연한 귀결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아니라(관념론 부인), 그와 반대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계급상태)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한다(유물론)”고 주장한다.
이러한 경제결정론은 경제적 조건이 비록 근본적이라 해도 유일한 역사적 동인은 아니며, 모든 정치사건이나 사상 등이 직접적·배타적으로 경제에 귀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영화에서 화영은 서민계급에서 억척스럽게 살아 남편과 함께 부를 축척해서 상류계급으로 살아간다. 동진은 양반가문에서 호의호식하다가 전쟁으로 변변한 직업도 없이 떠돌이 장사꾼을 전전하는 서민계급으로 살아간다. 반면 아들 성운은 범죄를 일삼으며 최하층 빈곤계급으로 살아간다. 이처럼 계급이 각각 다르기에 세사람은 서로의 가치관(의식)이 다르고 이질감만 팽배하다. 화영은 옛연인 동진에게 거리감을 두고, 아들인 성운에게는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계급적 이질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계급은 피보다 더 진하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구조주의는 인간이란 구조속에 갇힌 수인(囚人)이란 모토하에 사회구조가 인간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인간을 결정한다는 의미는 인간의 자아 정체성(identity), 주체성을 형성시킨다는 의미이자 이 구조를 벗어날 자유가 없다는 의미이다. 그가 구조속에 위치한 자리와 이름이 정체와 주체를 만들어 낸다는 주장이다. 흔히들 하는 표현인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주장은 구조주의의 핵심 모토이다. 여러 주장이 있지만 여기서는 알튀세르와 푸코를 살펴보기로 한다.
후기 마르크스주의자인 알뛰세는 경제결정론이 가지는 기계적 인과성, 즉 상부구조에 대한 경제의 일방적인 지배를 비판하면서 “중층결정(surdétermination)”의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사회란 경제적 토대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수준의 외부 조건들이 하부구조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토대(경제적 요소)와 상부구조(정치적-법률적 및 이데올로기적 요소 등)는 일방적인 반영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작용하는 중층결정의 관계이다.
이에 따라 그는 이데올로기(이념)를 허위의식으로 보고 과학과 대립시키는 기존의 입장에서 탈피하여, 현실 세계 속에서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물질적인 힘을 강조한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란 사회 집단에 있어서 사상(思想)·행동이나 생활 방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신조(信條)의 체계를 말한다. 가정에서는 가정에서 지켜야할 예의 범절(남자는 설겆이 하는 것 아니야등 ), 학교 교회 직장에서 허용되는 것과 금기시 되는 것들의 관념체계등을 말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appellation)”한다. 이데올로기의 기본 기능은 개인들을 주체로 변형시키는 것이며 또한 자신들이 주체인 것처럼 행위하게끔 한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에게 ‘자랑스러운 신의 아들“이라는 호명(불러주면)으로 정체성(주체성)을 부여해 주면 그는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는 주체성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질서와 그 질서의 요구에 대한 개인들의 예속을 강제하기 위하여 이데올로기는 그 개인들을 사회의 의식적인 주체로서 구성한다. 호명 메커니즘을 통해 “주체화된 존재들”은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는 자유로운 주체로 인식한다.
이러한 주장은 주체가 자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구조가 각 개인의 주체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실체론 부인, 관계론 긍정) 즉 인간의 자아라는 것은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체계가 만들어 낸 관계의 산물이라는 주장이다.
영화속 세 사람은 타인들이 이데올로기 체계에 의하여 호명에 의하여 부여해준 주체성을 얻고 거기에 맞게 살아가고 있다. 성운의 예를 들면, 그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무식한 놈, 상스러운 놈, 가정폭력배. 가난뱅이, 시체장사꾼 도살자등등.. 으로 호명을 받아 그는 이런 정체성을 얻고(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 주체로서) 살아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정체성은 성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의 사회 이데올로기가 만들어 낸 것이다. 즉 그의 정체성은 그가 형성한 것이 아닌 사회구조가 형성해 준 것일 뿐이다. 그의 실체(자아)는 없고 다만 이데올로기의 관계 그물망 속에 그의 이름과 자리만 있을 뿐이다. 그는 자유의지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구조에 갇힌 죄수일 뿐이다.
구조주의자 푸코는 권력-지식 연대로 인한 주체가 탄생한다고 본다. 칸트나 헤겔이 주장하는 것처럼 본래적인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지식 권력이 주체(자아)를 형성시킨다는 것이다. 푸코는 인간의 신체와 행위를 지식대상으로 삼는 생체권력(교도소 정신병원등)은 과학적 지식과 연대하여 기술과 제도를 통해 인간들을 규제하고 규정하여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에서 사람의 몸은 통제하고 금지하며 조절하는 권력앞에 노출된다. 감옥 뿐만 아니라 군대 학교 병원 공장 회사등의 모든 장소에서 몸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일련의 기법을 총동원한다.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원형감옥은 중앙통제탑에서 죄수들을 한 눈에 감시 할 수 있지만 죄수들은 그 통제탑에 있는 감시원들을 알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이런 강압적 배치에 의해 개인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 특성이 드러나고 개인은 개별적 방식으로 언제나 감시된다. 개인들은 분리되고, 그들의 행위는 규제되고 그들의 신체는 훈련되고 그들의 움직임은 책략적으로 조직된다. 이런 점에서 규율은 학교 병원 공장 군대로 확산되며 각 개인들은 처벌 될 수 있고 언제나 처벌된다. 나는 감시당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예를 들면 군대는 상관에 절대 복종하는 주체를 만들고, 의사는 건강을 명분으로 자연적인 삶을 더럽고 위험한 삶이라 규정하며, 목사는 기도하는 주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로써 응시속의 주체( 나는 응시당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형성된다. 사회화란 내가, 혹은 나라는 주체가 남들의 응시(gaze)속에, 응시앞에 놓이는 것, 드러나는 것, 폭로되는 것, 한마디로 감시당하는 이다, 그러므로 나는 응시속의 주체이다. 그러므로 나는 주체가 아니라 응시에 종속되는 주체이고 그러므로 주체가 이다. 나의 몸 행위 감정 일체가 응시의 대상이 된다. 여성은 남성의 응시의 대상이고, 남성 욕망의 대상이지만 한편 여성은 남성의 응시를 유혹해야 한다. 우리는 감시, 응시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응시의 대상이며 동시에 응시를 유혹하는 주체라면 남성 역시 응시의 주체이며 동시에 여성의 응시의 대상이다.
이처럼 주체가 지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 지식이, 담론이 주체를 만든다. 우리는 다양한 지식에 연루될 때 자아 정체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화영은 동진네 가족의 응시하의 주체로 살아간다. 동진 아버지의 나름의 권력과 지식하에 그의 가치관을 화영에 불어 넣는다. 화영은 얌전한 조선 여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길러진다. 화영은 갖은 역경을 견뎌내며 살고 있는데 우연히 스승을 만나 심부름을 해주었을뿐인데 간첩으로 몰려 7년간의 감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녀는 오로지 감시와 처벌의 객체로서 대한민국의 공권력이 부여해준 정체성, 빨갱이 전과자로 살아간다. 이러한 그녀의 삶 속에 조선의 유교윤리와 자본주의 논리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흔적(정체성)이 있을 뿐이지 화영의 고유한 주체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녀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한사람일 뿐인 것이다.
결정론과 달리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에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칸트와 사르트르의 입장을 살펴보기로하자.
1) 칸트
칸트는 현상계는 자연필연성이 지배하지만, 현상 너머 물자체의 세계에는 수학이나 물리학의 법칙, 즉 인과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자유의 세계가 된다. 이러한 자유의 존재는 인간 삶의 과정 중에서 매 순간 결단에 의해 새로운 인과계열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인과적 선택을 하지 않고 인과에 벗어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일 굻었다고 모두 도둑질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 법칙이 있다는 의미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도덕법칙은 자유의 인식근거이고, 자유는 도덕법칙의 존재 근거이다. 자유가 없으면 책임도 있을 수 없고 행위를 통제 할 수 없으므로 선 악이라든지 도덕이라든지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에 도덕과 자유는 서로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2) 실존주의
사르트르는 존재를 즉자와 대자로 나눈다. 즉자는 그 자체로서 존속하는 자연사물이다. 즉자는 아무 근거 없이 그냥 우연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돌멩이는 그저 자체적으로 존재할 뿐이지 자신을 반성하는 경우는 없다. 돌멩이는 언제나 동일하게 돌멩이로 A=A로 존재한다.
이에 반해 대자(무(無)=의식)는 자기의 상태에 대해 그것을 항상 문제로 삼는(나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자신을 반성하는 존재) 존재를 말하는데 이는 인간에게 의식이 있어 가능한 존재 방식이다. 그런데 의식은 끊임없이 변한다. 동일하게 고정되지 않는다. 즉 동일성이 없다. 결과적으로 의식안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없다. 의식안에 무엇인가 있다면 (동일성이 있다면) 끝없이 흘러갈 수가 없다. 그래서 의식은 무(無)이다. 무 이므로 자유다. 이처럼 의식은 A는 A라는 동일성을 향해 끊임없이 부정을 제기한다. 사르트르는 끊임없이 현재를 극복하려는 것(의식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을 현재를 극복하려는 것으로 파악) 이것이 바로 인간의 의식=자유의 근본원리라고 보았다. 존재란 정적인 동일성을 나타내고 무(無)란 그것을 부정하는 인간의 자유능력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실존은 무(無)이다. 즉 끊임없이 실존을 형성하고 창조해 가는 존재이다. 인간존재는 목적도 없고 필연성도 없다. 필연성이 있는 것은 자유가 없으나 우연으로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유가 있다.
3)이러한 칸트와 사르트르의 입장을 영화에 적용해 보면, 세 사람의 현 상태는 자유의지대로 산 결과를 반영한다. 따라서 세 사람의 현상태에 대해서는 각자 자신이 책임을 져야한다. 그러나 어린 화영이 자유의지로 동진의 집에 갔는가? 그녀의 임신도 자유의지 인가? 선생의 심부름도 자유의지인가? 여러가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가장 억울한 것은 성운이리라. 어렸을 때부터 고아로 버려지고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사람에게 자유의지란 얼마나 허울좋은 명분이란 말인가? 성운의 삶이 자유의지의 결과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자유의지, 자유로운 결단(사르트르)이 성운에게는 얼마나 허망한 이론인지 여지없이 드러내 주고 있다 하겠다.
결국 세 사람은 친자확인을 위해 혈액검사를 하게 되고, 세 사람간의 친자관계를 부인할만한 모순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결과에도 불구하고 화영은 승복을 하지 못한다. 그녀는 100% 친자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핑계로 자리를 박차고 가버린다. 상류층에 속하는 화영은 아마 상스럽고 무지한 아들을 인정하기 싫었을 테고, 자신의 현재의 가족에도 누가 될 것을 염려하여 이런 결단을 내린 것만 같다. 이러한 화영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악을 저지르면서 살까?
이와 관련하여 칸트, 벤담, 도덕적 딜레마를 살펴보기로 하자.
칸트의 의무주의에 의하면 친자를 인정하고 가족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의무라고 평가 되므로 이를 위배한 화영의 행위는 선한 행동으로 평가 받지 못할 것이다.
결과를 고려하는 공리주의에 의하면 판단이 모호한 측면이 있다. 성운의 가족 4명이고 화영의 가족 4명이다. 만약 화영이 친자를 인정하면 성운의 가족에게 이익이 될 것이고 화영의 가족에 어떤 손해가 있는지는 판별하기가 쉽지 않다. 남편(전무송)이 승인을 했기에 친자를 인정하더라도 별 손해는 없으리라 평가된다. 따라서 공리주의에 의해서도 화영의 행위는 선한 행위로 평가 받지 못할 것이다.
1)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입장
우리는 어떻게 해야 선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왜 악에 빠지는 걸까?
이에 대해 플라톤은 주지주의(主知主義)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의주의(主意主義)를 주장한다.
플라톤은 지식이 없기 때문에, 무식하기 때문에 악을 실행한다 하고, 바꾸어 말하면 이데아에 대한 진리를 깨우치지(무식하기에)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알지못해서가 아니라 의지의 부족이 악을 행하는 근본원인이라 한다.
영화속 화영의 행위는 플라톤에 의하면 이데아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알고는 있지만 선에 대한 의지가 부족해서 아들마저 부정해 버린 것이라 해석할 것이다. 화영의 행위를 플라톤의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평가된다. 화영은 성운을 부정하는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로 입적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 문제는 왜 그런 의지가 없었느냐는 것이다.
2)헤겔의 도덕적 딜레마
이에 대해 헤겔은 주지주의, 주의주의 모두 부인하고 도덕적 딜레마의 원인을 의무의 충돌이라 주장한다.
헤겔은 “도덕적 행동에는 의무들 사이의 대립이 생겨남으로써 하나의 의무를 이행하면 다른 의무가 침해되므로 우리는 도덕적 딜레마에 부딪히게 된다. ”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도덕적 딜레마 안에서 인간은 언제나 죄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장발장은 가장의 의무(배고픈 조카를 살리려는)와 시민의 의무(법을 지켜야 하는읨무)사이에서 갈등하다 결국 도둑질을 한다. 가장의 의무를 지키려다 시민의 의무를 져버려 죄인이 된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입장을 영화에 적용하면 화영은 현재 가족 질서를 지킬 의무와 친자 보호의무사이에서 갈등하고 번민하다가 결국 현재 가족보호 의무(차후 성운을 큰아들로 입적하면 그 무식하고 상스럽고 야만적인 행동으로 현재의 가족이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점)를 수호하려 친자보호의무를 파괴해 버렸다고 평가될 것이다.
이 영화는 수십년 생이별한 이산가족을 만나야 한다는 당위보다는 그 만남 이후의 이질감에 주목하고 있다. 수십년동안 당사자들에게 겹겹이 쌓인 이질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계급이 피보다 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허물어진 과거의 질서를 복원하는 것은 기득권이 되어버린 현재질서에 대한 위협일 것이다. 화영의 친자 부인한 행위를 오로지 비난으로만 일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