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체와 자본주의적 인간형 확립하다
마가렛 미첼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위 영화는 1939년 빅터 플레밍 감독에 의해 연출 된 작품이다. 원작이 “남부를 미화하고 당시 노예제도를 긍정”하고 있으며 “인종적 몰이해가 드러난 작품” “흑인 노예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고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단을 미화한 작품”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85여년이 지난 지금도 연극으로 영화로 재연되고 있을 만큼 불후의 명작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많은 것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지만 이 영화는 결코 바람과 함께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어떤 점이 세계인의 가슴에 그토록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던 것일까?
제목을 보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바람이 불었고 무엇인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어떤 바람이 불었던 것일까? 무엇이 사라진 걸까? 사라진 그 자리에는 무엇을 새로 키우고 건설해야만 할까?
1. 줄거리 요약
연방제 유지와 노예문제를 둘러싸고 전운이 감도는 1860년대 미국. 부유한 가문 출신에 빼어난 미모로 뭇 남성들의 관심을 독차지 하는 스카렛오하라(비비안 리)는 거짓과 술수로 이 남자 저 남자를 홀리고 다니지만 정작 그녀가 일편단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애슐리(레슬리 하워드)이다. 애슐리는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스칼렛을 뿌리치고 절제와 인내의 화신, 온화하고 따스한 멜라니 해밀턴(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을 사랑한다. 갖은 수를 써서 애슐리에게 고백을 해보지만 스칼렛은 그의 철벽방어에 절망한다. 질투와 복수심 넘치는 스카렛은 애슐리의 동생 인디아(알리시아 레트)의 연인인 찰스 해밀턴(랜드 브룩스)을 유혹한다. 때마침 링컨이 군대를 소집했다는 소식에 이어 전쟁이 발발하자 애슐리와 멜라니가 결혼식을 올렸고 바로 다음 날 스카렛은 찰스와 결혼식을 올린다. 마음에도 없으면서 인디아의 애인을 가로챈 것이다. 자원입대하여 전쟁터에 나간 찰스는 홍역으로 인한 폐렴으로 사망하고 스칼렛은 졸지에 미망인이 되고만다.
미망인 생활을 지겨워 하던 끝에 엄마의 권유로 애틀란타에 온 스카렛은 자선바자회에서 레트 버틀러(클라크 케이블)와 재회한다. 엄청난 재력가이자 선장인 버틀러는 그 방자하고 방탕한 생활 탓에 육군사관학교에서 쫒겨나고 가족들과도 담을 쌓은 인물인데, 스칼렛에게만은 진심인 듯, 집요하게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하지만 스칼렛은 교만하고 음흉하다며 번번히 그를 뿌리친다. 멜라니를 따라 간호 봉사로 나섰지만 참을성 없는 스칼렛은 못하겠다, 힘들다, 지겹다를 입에 달고 산다. 북부군이 아틀란타로 진격해 오자 두려워 하던 스칼렛은 보금자리인 타라로 돌아가려 발버둥을 치지만 임신중인 멜라니를 돌보라는 의사의 만류로 할 수 없이 멜라니 곁을 지킨다. 멜라니는 아들을 낳고, 곧이어 북부군의 집요한 공격에 애틀란타는 폐허가 된다. 스칼렛으로부터 구조요청을 받은 버틀러는 마차를 구해와 멜라니 모자와 스칼렛을 태우고 타라로 향한다.
목적지에 다다를 무렵, 버틀러는 스칼렛과 마차를 팽개치고 대의명분과 부끄러움이란 핑계로 뒤늦게 입대를 해버린다. 저주하고 절규하던 스칼렛은 홀로 마차를 몰고 천신만고 끝에 타라에 도착한다. 엄마는 죽고, 아버지는 치매, 철없는 동생, 먹을 것 타령하는 흑인 노예들뿐. 그녀는 가족을 굶주리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강하고 억세게 생활해 나간다. 타라에 매겨진 300불이라는 당시로선 엄청난 세금을 갚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결국 감옥에 있는 버틀러를 찾아 가지만 그는 냉정히 거절한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동생 수엘렌의 약혼자인 프랭크 케네디(캐롤 라이어)를 만나는데 그가 자영업으로 성공하였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술수를 부린다. 동생 수엘렌이 딴 남자와 결혼하기로 하였다고. 이에 속은 프랭크는 스칼렛의 유혹에 넘어가고 결국 둘은 결혼한다. 이번엔 친동생의 남자를 가로챈 것이다. 스칼렛은 착하고 성실하지만 우유부단한 남편 프랭키를 대신해 직접 자본주의 최전선에 뛰어든다. 남성에 의존하지 않는 당당한 여성 주체를 선언한 것이다. 뉴욕으로 떠나려는 애슐리를 붙잡아 공동사업자로 회사를 설립하고 이윤을 위해서 흑인죄수를 고용하는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공장으로 향하던 스칼렛은 빈민가에서 강도들의 습격을 받고 기절하나 자신의 노예인 빅샘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이에 격분한 프랭크와 애슐리는 복수하러 갔으나 프랭크는 사망하고 애슐리는 어깨에 총상을 입고 만다. 이로써 스칼렛은 두 번째 과부가 되고 만다. 이때 호시탐탐 그녀를 노리던 버틀러가 접근하여 집요하게 추근대자 결국 스칼렛은 결혼을 승낙한다. 호화 신혼여행을 가고 뉴올리언즈에서 생활하지만 곧 실증을 내고 타라로 돌아온다. 둘의 행복은 거기까지 였다.
스칼렛의 영원한 사랑은 오직 애슐리 였기에 버틀러와 결혼생활은 버겁기만 하다. 딸 보니를낳았지만 걸핏하면 싸우고 각방생활하고 이혼하자고 티격태격할 뿐이다. 딸 보니가 노새에서 낙상해 사망하자 슬픔에 쌓여 있는데 멜라니마저 쓰러져 임종을 고한다. 멜라니는 스칼렛에게 자신의 아들과 애슐리를 부탁하고 버틀러를 사랑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멜라니가 사라지자 이제 기회다 하며 스칼렛은 애슐리에게 자신의 사랑을 간청하지만 애슐리는 여전히 요지 부동이다. 그제서야 그녀는 버틀러의 소중함을 깨우친다.
“난 허상을 사랑했네 실제로 존재치 않는”
진짜는 가짜가 되고 가짜는 진짜가 된 것이다. 애슐리에 대한 환상은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스칼렛은 버틀러에게 떠나지 말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그녀를 버리고 찰스턴으로 떠나 버린다.
“어떻게 그를 돌아오게 하지. 지금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 내일 생각해야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니까....”
(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를 인종차별문제에 눈감고 노예제도를 옹호한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 문제는 괄호치고 감상해 보고자 한다. )
이 영화는 남북전쟁으로 모든 것을 상실해 버린 남부 귀족들의 재건을 그린 작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느 여인의 극도로 이기적이고 교만한 행태를 추적하는 영화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울러 네 남자와의 관계를 통하여 진실한 사랑을 찾아가는 어느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이상을 쫓다가 이상과 현실 모두를 잃어버린 어느 여인의 삶을 그린 영화, 또 개성이 두드러져 사회와는 화합하지 못하고 겉도는 두 남녀의 애정행각을 그린 작품으로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 소중한 견해이지만, 이 영화는 자본주의라는 새 시대 새바람을 맞아 자본주의에 걸맞는 새로운 인간상을 정립한 영화로 , 또한 남성과 사회를 향한 인정투쟁을 통해 여성의 홀로서기, 즉 여성 주체를 확립한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과거의 믿음과 행동이 송두리째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알고 후회하는 깨달음에 관한 영화. 즉 진짜인 줄 알았는데 가짜였고 가짜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다는 깨달음에 진짜와 가짜의 문제를 생각게 하는 영화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1860년대는 산업혁명이 연착륙에 성공하고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이륙하던 시기이다.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생산력을 확보한 자본주의는 한편으로는 노동력을 확보하고 또 한편으로는 개인주의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시민계급을 길러내야만 했다. 이를 위해 노예해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는 마르크스 용어로 생산력(자본주의의 공장제 대량생산)과 생산관계(노예제도)가 모순에 처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력하에서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주의 자유는 필수였다. 즉 노예를 해방시켜 노동자로 만들어 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예해방은 인도주의의 요구가 아니라 자본의 요구였던 셈이다.
노예해방이라는 엔진을 장착한 자본주의는 기존의 비포장도로를 허물어 버리고 부르조아 계급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양쪽 레일로 삼아 질주해야만 하는 기관차와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전통 봉건사회의 인간형을 버리고 새 시대에 걸 맞는 인간형,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지켜낼 새로운 주체를 창조해 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고 이 영화는 이에 응답을 하였다. 이 영화가 명작이라 칭송받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충실히 반영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때 이 영화의 쟁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1) 당시 자본주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는데 이는 자유주의 개인주의 바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자본주의의 주체의 확립과 관련하여 스칼렛, 버틀러, 멜라니, 애슐리의 인간형을 살펴보기로 한다.
2) 그럼 그 바람에 의해 사라져 버린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자신의 행복만을 갈구하는 스칼렛은 오직 애슐리의 사랑을 차지하겠다는 일념 밖에 없다. 하지만 결국 그에 대한 사랑이 허상이었음을 깨닫는다.순식간에 진짜는 가짜가 되고 가짜는 진짜가 되어 버렸다 . 이러한 점에서 애슐리라는 남자가 상징하는 의미와 이 깨달음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3)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사라진 폐허 위에 타라의 재건과 사랑의 재건이라는 과제가 남는다. 타라는 버틀러의 물질적 부로 즉시 재건되었다. 그럼 남은 문제는 사랑의 재건이다. 즉 전통사회를 해체하고 자유와 행복이 만발하기 위해 어떤 사랑을 만들어가야하는가? 이와 관련하여 버틀러와 스칼렛의 사랑과 투쟁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헤겔의 인정투쟁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이 영화가 다소 충격적인 점은 우리의 통념상 악녀와 한량이 주연이라는 점이다. 스칼렛은 절제와 인내를 미덕으로 삼는 멜라니를 경멸한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또한 버틀러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술집과 도박을 즐기는 한량이다. 전통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성적이고 안정감 있는 멜라니와 애슐리가 주연이어야 마땅하나 이 영화는 촐삭대고 불안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스칼렛과 버틀러가 주연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평단과 관객을 사로잡는 마력을 발휘한다. 작가와 감독은 왜 이런 악녀와 한량을 옹호하는 걸까? 이들이 정녕 새 시대에 부합하는 인간형이란 말인가?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전통적 이성적 인간
멜라니는 애슐리가 전쟁으로 둘을 갈라놓을까, 염려와 두려움을 내보이자 그녀가 말한다.
“전쟁이 두려운 거군요. 두려워 마세요. 우리 사이는 변하지 않아요. 어떠한 전쟁도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저는 변하지 않아요.”
이 남자 저 남자에 주접떨며 오만 방자한 언행으로 일관하는 스칼렛을 모두가 비난하고 비웃을 때도 멜라니는 그녀를 감싼다.
“스칼렛 당신은 너무 활력이 넘쳐요 너무 부러워요. 저도 당신처럼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건 오해예요. 인디아. 스칼렛이 너무 매력적이라 그래요. 그냥 명랑하고 생기 발랄해 남자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2) 공동체주의 인간형
멜라니는 애틀란타에서 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부상병을 치료하는 간호사로 봉사한다. 그녀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보다는 가족과 공동체의 화합과 평화를 위해 애를 쓴다. 멜라니는 스칼렛이 자신의 남편인 애슐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고 끝까지 그녀의 삶을 챙긴다. 숨을 거두면서 스칼렛에게 유언을 남긴다. “내 아들과 남편 에슐리를 잘 부탁한다”
이처럼 멜라니는 이성적인 태도로 주위 사람을 편하게 해주고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다.
1) 이기적 욕망적 인간
스카렛은 남자마다 거짓말로 유혹한다. 애슐리 동생인 인디아의 애인 찰스 해밀턴에게
“매우 잘생겼네. 너와 바비큐를 먹고 싶어.”
그러다 자신의 여동생의 애인인 프랭크를 만나자
“당신 수염 멋지네. 당신과 바비큐 약속있다고 찰스해밀턴 요구 거절했지 뭐야.”
남자들을 이렇게 홀리고 다니더니 결국 인디아로 부터 찰스 해밀턴을 빼앗아 첫남편으로 만들고 자신의 친동생으로 부터 프랭크를 빼앗아 둘째 남편으로 만든다. 그녀는 이처럼 거짓과 술수로 남의 애인이나 뺏는 뻔뻔한 여인이다. 전통적 인습의 눈으로 보면 그녀는 악녀임이 틀림없다.
2) 일탈- 인습으로 부터의 도피
스칼렛은 당시의 규칙이나 윤리를 거추장 스러워 하며 이를 우습게 여긴다. 파티에서 숙녀는 많이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흑인 유모에 굉장히 짜증스러워한다. 왜 숙녀는 많이 먹으면 안되느냐는 불만이다. 일종의 남녀차별에 대한 항의인 셈이다. 또한 그녀는 파티중 낮잠을 자야하는 규칙도 지키지 않고 홀로 현장을 빠져나와 애슐리를 쫒아간다. 한술 더 떠 남편을 잃은 미망인은 파티를 하거나 춤을 추어서는 안된다는 관습도 과감히 깨버리고 상복을 입은 채로 버틀러와 춤을 춘다.
이러한 스칼렛의 행위는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공동체의 규약을 깨뜨리며 홀로 나대는 천방지축이지만 개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보면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전사인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3) 수단의 일탈-목적으로의 도피
스칼렛은 매사를 힘들어하고 짜증을 낸다. 부상당한 병사들을 간호하는 것도 지겹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해내고 더 이상 못해먹겠다다고 소리친다. 두렵고 투덜대면서도 출산하는 멜라니의 곁을 어쩔 수 없이 지킨다. 일을 게을리 하는 동생과 노예들을 가혹하게 다룬다. 자신의 고향농장 타라가 세금 300달러에 넘어 갈 위기에 처해자 경멸해 마지 않는 버틀러를 찾아가 굽신거린다. 하지만 거들먹거리는 버틀러에 돈을 빌리는데 실패하자 동생 수엘렌의 애인인 프랭크를 유혹한다. 결국 순진한 프랭크는 이에 넘어가고 그녀와 결혼한다.
그녀는 목재사업에 뛰어 들어 자본주의 최전선에 선다. 그녀는 최대 이윤을 추구하기위해 죄수들을 불법적으로 고용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이에 대해 공동경영자인 애슐 리가 이의를 제기한다.
“난 강제노동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댓가로 돈을 벌지 않을거야”
“당신은 노예소유에 대해 이렇게 까다롭게 굴진 않았잖아요. 전 돈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어요. 다시는 돈 없이 살지 않겠어요. 저는 양키와 친구가 되겠어요.당신은 나와 함께 그들을 이기게 될거예요”
이처럼 자본주의에 눈을 뜬 스칼렛은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오로지 효율성만을 추구한다. 매사에 다혈질이고 능동적 적극적인 그녀와 자본주의는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해야할 것 같다.
4) 스칼렛을 이대로 악녀로 방치할 것인가?- 니체의 도덕이론
이처럼 악녀로 평가받는 그녀를 구출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일단 인간개조를 해서 그녀를 멜라니처럼 착하게 살면서 자본주의 전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천성은 좀처럼 바뀌지 않기에 이는 좀 불가능한 것 같다. 두 번째는, 그녀를 악녀라고 규정짓는 규칙과 인습을 악이라고 규정하고 이를 폐지하면 된다. 예를 들면, 간통녀를 악녀라는 오명에서 구하는 방법은 간통죄를 폐지하고 소급효를 인정하면 된다. 이것은 전근대적인 인습과 악법을 철폐해야 한다는 과제를 수반하게 된다.
마지막은 니체의 자연주의 도덕이론으로 그녀를 방어하는 것이다. 니체는 도덕을 인간의 이성이 아닌 생리적 심리적 상태로 설명하였는바, 사랑은 성적충동에 기원하였으며, 겸손은 약자의 영리성에서 기원하였고, 공정은 책임에 대한 공포에 그 근원을 두었고 정의는 복수 본능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겸손과 공정, 정의라는 것이 도덕적 선이라는 것은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고 자신의 삶을 정당화 하는 한가지 방식일 뿐이므로 그것이 절대적으로 타당한 도덕률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오만이나 무례함도 그 배경을 살펴보고 재평가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강하고 아름답게 사는 스칼렛이야 말로 니체가 그토록 강조하는 위버맨쉬(초인)에 가까운 여인이 되는 셈이다.
육사에서 쫒겨난 금수저 버틀러는 교만하고 속을 모르는 음흉함, 가족과의 단절, 여인과의 추문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인물이다.
1) 실용주의자 면모
오하라가문, 윌크스 가문을 포함한 남부인들이 바비큐 파티에 모여 전쟁을 옹호한다.
“우리는 양키에게 모욕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노예를 거느릴 수 있다는 점을 그들에게 이해 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연방군을 탈퇴하려는 조이아주의 주권입니다. 남부는 병력으로 강력히 주장을 펼쳐야 합니다. 싸웁시다."
모두가 전쟁의 결의와 근거 없는 낙관주의를 펼치자 버틀러가 홀로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남부 전체를 통털어 대포공장 하나없습니다. 반면 양키는 공장 조선소 탄광 심지어 함대가 있는데, 우리가 가진 것이라곤 목화, 노예, 그리고 오만함 뿐입니다 “
전쟁이 북군의 우세로 기울기 시작하고 아틀란타가 폐혀로 변하자 버틀러는
”남부는 무릎을 꿇었어. 과거의 대의명분이 지금 우리 눈앞에 죽어가고 있어. 난 낭비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나. 이건 다 낭비지. 완전한 낭비.“
그는 무분별한 이념이나 값싼 동정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에게 이익이 있으면 행위하고 이익 없으면 냉정하게 돌아선다. 이처럼 버틀러는 이념이나 대의명분 보다는 효율성과 실질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실용주의적 면모를 보인다.
2) 개인 자유주의 신봉자
그는 어떠한 조직에도 속하지 않고 홀로 행동하며 남부를 지원한다. 주관이 뚜렷한 독불장군이다. 버틀러는 애틀란타에서 열린 육군병원 후원을 위한 자선 바자회에 나타나는데 사회자는 그를 ”용감한 밀항자이시며, 스쿠너 함대에서 양키 총탄을 뚫고 순모제품과 레이스를 갖다 주신분, 바다의 귀신, 버틀러 선장님“ 으로 소개 한다. 전쟁의 와중임에도 그는 술집 마담이자 창녀인 벨와트닝과 동거하며 그녀를 존중한다. 또한 흑인 유모의 고급선물을 챙길 정도로 자상하다.
3) 용감한 능력자
버틀러는 멜라니와 스칼렛 일행을 태우고 불타는 아틀란타를 탈출한다. 그는 달라붙는 패잔병들을 물리치고 결국 그녀들을 무사히 수송한다. 또한 스칼렛을 공격한 강도들에게 복수하러 출동했던 애슐리 일행이 양키 경찰로부터 빈민 두명의 살해혐의를 받을 것을 염려한 버틀러는 그들을 자신의 단골 술집으로 데려가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어 구속을 면하게 한다. 또한 뒤늦은 입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연합의회의 훈장을 받는다.
이처럼 버틀러는 기존의 불합리한 관습이나 인습에 반대하는 개혁주의자 면모에다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로 여성을 감싸는 열린 사랑꾼 면모를 보여준다.
이성적인 멜라니는 전통 봉건사회에 타당한 인간형이다. 하지만 새 시대를 담당하기에는 너무 순종적이다.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가정평화에는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한 인간형이나 개성과 자유가 중시되는 자본주의 시대에는 부적한 인간형이 틀림없다. 각종 불합리나 부조리에도 그저 입 닦고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비겁한 소시민으로 살아갈 것이 분명한 인간형이기 때문이다. 애슐리는 남부의 대의에는 흔쾌히 참가하지만 시대의 불의나 사회개혁에서는 한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인물이다. 착하기만 하고 순응하기만 하고 사회적 문제에는 관심도 없는 인물이 새시대를 담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 발전을 위해서는 불합리한 금기와 각종 차별의 경계를 뛰어넘어 저항 할 수 있는 패기와 진취적인 기상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 시점에서는 악동과 악녀로 평가받지만 새로운 시대는 전혀 다른 척도로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보여진다. 매사에 활기찬 기상으로 비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망을 떳떳하게 드러내고 각종 금기에 저돌적으로 도전하는 스칼렛은 활력과 용기를 보여준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전사로 재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관용과 개방, 실용주의적태도를 보여주는 버틀러가 새시대에 걸맞는 인간형으로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악동과 악녀를 주연으로 내세운 이유이리라.
스칼렛의 고향 타라는 남북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굳센 의지와 노력으로 재건에 성공한다. 하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은 예전의 타라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그녀의 지고지순한 애슐리에 대한 사랑이었다. 영화는 상징과 은유 체계이다. 애슐 리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빼어난 미모와 화술로 뭇남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지만 스칼렛의 일편단심은 오로지 애슐리이다.
그가 멜라니와 결혼하려 하자 스칼렛은 애슐리에게 간곡히 고백한다.
”네 아니오 밖에 못하는 바보 멍청이와 결혼이라니요. 당신은 멜라니를 사랑하지 않아요. 저와 결혼해요“
”난 멜라니와 결혼할거야. 넌 너무 어리고 경솔해“
애술 리가 실제 멜라니와 결혼해 버리자 스칼렛은 홧김에 멜라니의 동생 찰스해밀턴과 결혼해 버린다.
전쟁이 끝나고 전장에서 포로가 되었던 애슐 리 소령이 무사히 귀환한다. 타라를 지키는 일이 힘에 부치자 스칼렛이 그에게 하소연한다.
”우리 도망가요. 멕시코로 거기 장교가 필요하데요. 나는 당신이 멜라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나 사랑한다고 예전에 그랬잖아요. 멜라니는 다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데요. 난 아니예요.“
”나도 도망치고 싶지만 난 멜라니 버리고 못떠나. “
애슐 리가 뉴욕으로 떠나려 하자 멜라니까지 동원하여 그를 붙잡는다. 그리곤 자신의 지분의 반을 주고 목재회사를 그와 공동 경영하면서 까지 자신의 곁에 둔다.
멜라니가 사망하면서 아들과 남편 애슐리를 잘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한다. 이를 기화로 스칼렛은 또 애슐리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이제 멜라니 떠났으니 애슐리는 내거라는 의사표시이다. 이를 지켜본 버틀러는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린다. 그녀의 기대와 달리 애슐리는 그녀에게 관심없고 멜라니가 그리워 눈물만 쏟는다.
”난 멜라니 없이 살 수 없어. 그녀는 나의 유일한 꿈이었어“
스칼렛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든다. 멜라니만 없으면 자기차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본심은 자기를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 멜라니와 살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난 허상을 사랑했구나. 실제로 존재치 않는..하지만 신경안써...그건 중요치 않아. 조금도 중요치 않아...“
진짜는 가짜였고 가짜는 진짜였다. 가짜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고 바람은 진짜와 함께 불었다. 가짜는 진짜의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드디어 플라톤의 동굴에서 뛰쳐 나온 것이다. 그녀는 드디어 베이컨의 4가지우상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녀는 오랜 고통과 번뇌 끝에 가짜와 진짜의 경계에 선것이다.
그제서야 그녀는 버틀러를 찾는다. 가짜라고 생각했던 버틀러가 진짜 였던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에서 빠져 왔는데 플라톤이 가짜라 규정했던 우리의 현실이 진짜임을 깨우친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에 갇혀 가까스로 플라톤에서 벗어난 그녀는 니체가 말한 현실의 대지, 타라에 이제야 도달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였다는 말인가? 이는 애슐리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와 관련있다.
이 물음에 대해 니체는 ”신(神)“이라 대답할 것이다. 그는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은 신에 의한 세계질서라고 답할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신은죽었다라는 것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영화에 목사가 등장하거나 예배장면이나 기도하는 장면이 없다. 이는 서양 고전 영화에서 흔하지 않은 일이다. 스칼렛도 "하나님 더 이상 우리를 굶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드리지 않는다. 그녀는 두주먹 불끈 쥐며 자신에게 맹세한다. "난 나와 내가족을 결코 굶기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선언한다. 이는 신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으로 데리다 푸코 들뢰즈등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애슐 리가 상징하는 것은 ”이성 중심주의“라고 대답할 것이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형이상학이라 할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 것은 각각 이성중심주의, 전통의 형이상학이라는 것이다.
1)The God was dead.= gone with the wind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끊임없는 변화의 세계인바 이는 인간에게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신들의 무력감과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초자연적인 존재를 갈망하였다. 자신들의 현실세계가 덧없는 세계이며 어딘가에 참된 세계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였다. 영원과 무한 불멸을 꿈꾸었던 인간은 고뇌끝에 하여 신의 세계, 절대자의 세계, 초월세계를 만들어 냈다. 즉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한 것이다. 플라톤은 이에 근거하여 이데아론을 제기했다. 영원 불변한 이데아계는 진짜이고 변화무쌍한 우리의 현상세계는 가짜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데아론을 기독교적 세계관에 적용시키면 초월적 신의 존재를 긍정하게 된다. 그럼 신의 세계는 진짜세계이고 이의 반사효과로 현실세계는 가짜세계가 된다. 결국 현실을 부정하는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진짜세계인 천국에 가려면 죽어야 한다. 결국 우리는 죽기 위해 사는 셈이다. 그런데 이는 현실의 고통을 잊어버리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현실은 고통스럽고 비참해도 죽으면 천국가서 구원 받을 수 있으니.
2) 기독교는 노예의 도덕
삶 대신 죽음을 예찬하고 삶의 행복이나 기쁨 대신 불행이나 슬픔을 찬양해온 것이 기독교라고 혹평한 니체는 기독교는 원래 약자 이자 무능한 천민노예들이 지배자인 귀족들에게 보복하기 위해 꾸며낸 간교한 복수극이라 주장한다. 유대인들이 가치전도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 같이 공모해서 강자에 대한 간교한 복수를 했다는 것이다. 원래 귀족계급은 좋음을 의미하고 노예계급은 나쁨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노예는 힘에의 의지를 얻지 못해 귀족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원한과 증오를 품게 된다. 이러한 노예들에 의해 강자의 도덕은 악으로 규정됨과 동시에 노예도덕(겸손,복종,정의 공정)은 선이라 간주되어 버렸다.
이렇게 하여 원래의 선한 것들은 악으로 바꿔치고 원래 악은 선으로 바꾸어 버렸다. 귀족과 노예의 가치가 전도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기들의 삶이 선한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자신들의 불행을 위로받고 심리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애슐리가 이성중심사회를 의미한다고 주장할 개연성이 높은 후기구조주의자의 견해를 살펴보자. 이성중심사회의 특징은 욕망을 불온시 하고 남성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유럽중심주의를 옹호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작가와 감독이 노예제도를 긍정한다 측면을 고려해 본다면 그들은 여전히 백인 중심주의 유럽 중심주의 입장에 있으리라 추측된다.
다만 영화는 이성 보다는 스칼렛의 욕망을 긍정한다. 또 스칼렛이란 여성의 주체선언으로 이 영화를 읽으면 일정 정도 남성중심주의에 반대하는 메시지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이성중심사회를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고 그중 남성중심주의와 극히 일부를 부정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을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신 중심의 공동체적 세계관은 더 이상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평가한 셈이다. 이제 기독교적 신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하고 새시대를 담당할 참 사상을 세우자는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해석된다. 그 대안의 하나가 니체의 위버맨쉬를 중심으로 하는 실존철학인 셈이다.
새로 건설해야 할 그것은 한편으로는 스칼렛의 보금자리인 타라이자 또 한편으로는 모두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주는 진정한 사랑이다. 튼튼하고 건강한 타라는 멀고 먼 이상이 아니라 우리의 주어진 현실이며, 자유민주 자본주의의 굳건한 터전으로 상징될 것이다. 이는 물질적 생산력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새시대 최대의 과제는 참사랑의 건설이다. 이를 절대정신의 경지까지 이끌어 올려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사랑으로 모두가 자유로워 져야 하기 때문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스칼렛과 버틀러는 사랑하는 것 같고 서로를 증오하는 것도 같다. 둘은 싸우면서 사랑하고 사랑하며 싸운다. 마치 사랑이 투쟁이라는 듯. 이 영화 역시 이점에서도 아주 특별하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사랑의 목적은 영혼의 성장과 고양이다. 탁월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서 우리는 진리의 세계로 인도된다고 한다. 이를 스칼렛과 버틀러에 대입해 보면, 아닌 것 같다. 두 사람이 원하는 바는 행복이지 영혼의 성장과 고양이라는 거창한 목적은 없는 것 같고 또 두사람 다 그렇게 지적 인격적으로 탁월한 사람이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의 목적은 완전성의 열망. 잃어버린 반쪽의 열망이라고 한다. 즉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사람 찾는 것이라 한다. 이는 일견 그럴 듯 하나 이는 스칼렛과 버틀러에 적용하기 힘들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거지. 왜냐하면 우린 비슷하거든. 이기적이고 영리해. 못된 것도 그렇구. 하지만 우린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바른 말을 할 줄알지. 그 어떤 여인보다 사랑해. 키스해줘.“
버틀러는 자기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줄 사람을 갈구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닮은 사람을 찾아 나선 것이다. 또 에릭프롬은 우리가 사랑하는 근본 목적은 태아에서 엄마로부터 분리된 데 따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이러한 사정은 영화에 명백히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둘의 사랑을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헤겔의 인정투쟁론과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인 것처럼 보인다.
이 물음에 대해 헤겔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는 타인의 사랑을 받음(인정을 받음)으로써 진정한 나를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라고 답한다. 헤겔은 사랑을 성적 쾌락이나 정신의 성숙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타자(타인)는 나를 인식하는 거울과 같다. 타인과 관계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한다. 타인의 사랑을 받음(인정을 받음)으로써 진정한 나를 알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연장선상으로 우리의 정체성은 타자의 인정을 통해서 인식되고 형성되는 것으로 본다. 본래 선천적이고 영혼 불변한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정체성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이는 자아의 정체성은 환상이고 정체성은 차이와 관계의 산물이라는 구조주의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욕망 또한 자신의 욕망이 아니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람보르기니 스포츠카를 소유하고 싶은 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타인)이 그것을 욕망(소유하고 싶다고)하기 때문에 내가 욕망하는 것이다. 쉬운 말로 그것이 인기 짱이기 때문에 내가 갖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욕망이론은 정신분석학자 라깡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2)월크스 농장에 온 남자와 여자들은 서로 인정을 받기 위해 유혹하고 꼬리친다. 그들은 상대방의 사랑을 얻음으로써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찰스 해밀턴등 남자들은 스칼렛의 사랑(인정)을 받기 위해 안달이 난다. 버틀러도 마찬가지 이다. 스칼렛은 애슐리의 사랑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난다. 그런데 그들의 욕망은 자신의 근본적 욕망이 아니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통통튀고 아름다운 스칼렛은 모든 남성의 로망이기 때문에 내가 갖고 싶은 것이다. 멜라니가 애슐리를 탐하기 때문에 스칼렛이 가지고 싶은 것이다. 욕망은 이처럼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다.
우리는 인정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서로는 타인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신이 인정 받기를 원한다. 따라서 사람들의 만남은 투쟁의 양상을 띨 수 밖에 없다. 연애 또한 낭만적 외양을 한 치열한 싸움으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인정투쟁이다. 여기서 승리해야만 인간답고 명예롭게 살 수 있다. 사랑의 시작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서 출발한다.(반 인륜적 관계)
스칼렛과 버틀러의 첫 대면부터 심상치 않다.
”당신은 신사가 아니군요“
”아가씨도 숙녀는 아닌 것 같은데...그렇다고 당신을 나쁘게 본 것은 아니요. 난 숙녀에게 별 매력을 못느끼거든. 애슐리를 잊으면 다시 한번 뵙고 싶군요 그는 조금도 매력이 없습니다. 당신의 삶의 열정에 비하여“
”나를 놀리시더니 이젠 모욕까지 하시는군요“
버틀러와 스칼렛의 목숨을 건 인정 투쟁이 시작되었다.
1) 인정 투쟁의 결과 주인과 노예로 나뉜다. 즉 인정투쟁에서 생명을 건 사람은 주인이 되고, 승리 아니면 죽음의 원칙을 지키지 않는 자 노예가 된다.( 여기서 주인과 노예는 실제 신분을 말하는 것 아니라 실존방식을 상징하는 은유법으로 보면 된다.) 주인의 삶의 본질은 향유이고 노예 삶의 본질은 노동이다. 노예는 사물을 가공하는 가운데 사물과의 관게에서 자신을 인식하고(비자립적 인식) 주인은 노예가 노동한 산물이나 그의 복종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한다 (자립적인 인식) 이는 비대칭적 관계로서 불완전한 것으로 하나로 통일 되지 못한 반인륜적 관계로 파악된다.
2) 버틀러는 스칼렛의 인정(사랑)을 받기 위해 결사적이다. 스칼렛이 칼자루를 쥐었기에 스칼렛이 주인이고 버틀러가 노예인 셈이다. 버틀러의 투쟁이 계속된다. 아틀란타 바자회에서 상중인 그녀와 왈츠를 추면서
”그대에게 사랑한단 말 듣고 싶어“
”선장님, 그소리는 선장님 죽는 날 까지 듣지 못할 것입니다.“
버틀러가 파리에서 돌아와 여전히 상중인 스칼렛에게 파란 모자 선물을 하며
”난 댓가 없는 일은 안해. 당신을 유혹하려는 거지“
”내가 이모자 받았다고 당신과 결혼 할줄 알면 오산이오. 당신은 엉큼한 속물이야“
여전히 주인과 노예는 바뀌지 않고 그들의 인정투쟁은 계속되었다.
1) 어느 날 주인은 깨닫게 된다. 노예로부터 인정 받는 것은 진정한 인정이 아니라는 것을. 자기 자신이 인정하는 타자(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로부터 인정 받는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인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노예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주인은 진정한 주인이 아니다. 그저 노예의 노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즉 주인은 노예의 노예일 뿐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는 노예 또한 마찬가지이다. 노예는 자기가 인정하지 않으면 주인은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즉 노예야 말로 주인을 주인으로 만드는 자다. 즉 노예야 말로 주인의 주인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주인과 노예의 자각에 의해 주인과 노예는 노예와 주인의 관계로 역전된다. 이는 완전한 인간관계로 나아가는 도약의 과정이다. 이 과정을 부연하면 다음과 같다.
1단계- 자기중심성에 기초한 타자 부정성
2단계- 타자 중심성에 기초한 자기 부정성
3단계- 지기 부정성에 기초한 자기 긍정성(역설적인 상호인정)
2) 도도하고 오만한 태도를 견지하던 스칼렛은 버틀러에게 마차로 자신들을 타라까지 데려다 줄 것을 부탁한다. 이에 버틀러는 기꺼이 승낙하고 위험을 무릎쓰고 타라로 향한다. 목적지에 다달을 무렵 갑자기 입대해야 한다며
”당신이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남자. 우리는 잘 맞지 기질도 비슷하고 나는 당신이 애슐리를 잊어 버리기를 기다려 왔지“
”난 당신이 죽는날 까지 증오하고 경멸할 거야“
표면상은 여전히 스칼렛이 주인 버틀러가 노예인 것 같지만 뭔가 미묘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스칼렛은 타라에 매겨진 세금 300달러를 구하기 위하여 버틀러를 찾아 가지만 냉혹하게 거절 당하고 온다.
두 번째 남편이 죽고 상중인데 버틀러가 프로포즈를 한다.
”나는 당신 없이 못살아. 당신이 나의 유일한 여자요.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해줘요.“
”그래요 좋아요“
그녀는 마침내 버틀러와 결혼을 승낙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버틀러의 기나긴 인정투쟁이 외면적으로는 승리한 셈이다. 그렇다고 버틀러가 주인이고 스칼렛이 노예가 된것이라 단언할 수 없다. 스칼렛은 여전히 애슐리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멜라니가 유언을 남기던 날, 스칼렛은 애슐리에게 다시한번 사랑고백을 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때서야 스칼렛은 깨우친다.
”난 허상을 사랑했어. 실제로 존재치 않는...“
버틀러만이 참사랑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우친다.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노예의 노예 였음을 자각한 것이다. 하지만 버틀러는 그녀를 떠나 버린다. 내내 끌려다니기만 하던 버틀러는 자신이 주인의 주인이었음을 자각한 것이다.
”난 여기 있는 모든 것에 손을 털었소. 애슐리에 대한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오“
”“전 이혼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고 달려 왔어요. 전 분명 당신을 사랑해요. 그냥 제가 바보라서 몰랐을 뿐. 전 애슐리를 정말로 사랑하진 않았어요.”
그녀의 간곡한 요청에도 버틀러는 찰스턴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로써 스칼렛이란 주인은 노예(버틀러)의 노예가 되고 , 버틀러라는 노예는 주인(스칼렛)의 주인이 된 셈이다. 즉, 스칼렛은 노예가 되고 버틀러는 주인이 되어 2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이러한 두 자각이 공유되고 전유 될 때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된다. 주인과 노예가 서로 상호 인정하는 관계로 진입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노예가 되어 봄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주인이 된다는 역설이다. 이는 섬기는 주인이자 섬김 받는 노예라는 역설이며 사랑의 진리이다.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로 존재한다. 나는 곧 너이고 너는 곧 나이기 때문이다. 나인 우리, 우리인 나라는 공동성의 관계로 발전 이것이 인륜적 사랑이다. 인간 삶의 진리는 이처럼 역설이다. 진정한 사랑이란 이러한 상호인정의 관계(.상호주관성이며 인륜적 관계)로 고양될 때를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스칼렛과 버틀러는 인륜적 관계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다음과 같은 스칼렛의 마지막 대사가 이를 암시한다.
“그를 보낼 순 없어. 다시 돌려놓을 거야. 지금은 생각을 못하겠어. 내일 생각해야지 하지만 꼭 생각해 내야 하는데...그가 돌아올 방법을 생각해 낼거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니까”
이는 여전히 미완의 과제이다. 아니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절대정신이 완성되면 역사는 최종목적을 달성하기 때문이다.(헤겔)
그럼에도 우리는 이러한 고귀한 사랑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정진해야 할 것이다.
원작자인 마가렛 미첼과 감독이 노예 해방의 바람까지 그려주었다면 그야 말로 최상의 작품이었을 텐데, 남부 귀족을 중심으로 그리는 바람에 노예제도를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는 점은 무척이나 아쉬운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새시대 새바람은 무엇인지? 사라진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새바람에 맞는 주체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는 점, 가짜에 대한 깨달음으로 우리가 마주한 대지(타라)와 현실이야 말로 진짜 삶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는 점에서 불후의 명작이라 평가를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