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방지축과 노마드 사이에서
작가는 앙시앙레짐(구체제)의 루이15,16시대를 살다 프랑스 대 혁명(1789)의 다음해에 사망했는데 그가 살던 시대는 봉건절대제 체제의 가부장제 모순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플로베르는 의사부인인 델피느라는 여자의 자살사건을 취재하여 5년여의 노력 끝에 1857년 보바리 부인을 출간했는데, 그 내용의 파격성으로 인해 봉건 지배층의 거센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 검찰은 그를 풍기 문란죄로 기소했지만 다행히 무죄 판결을 받게 된다. 이에 소설은 날개돋인 듯 팔렸고 그는 리얼리즘의 기초를 확립한 작가로 추앙받고 있다.
이 영화는 한 여인의 파격적인 일탈로 인한 비극을 그린 영화, 즉 졍욕과 사치, 과시욕에 찌든 한 여인의 파국적 행로를 그린 영화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성적인 남편과 욕망적인 부인의 잘못된 만남을 그린 영화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이성으로 욕망을 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플라톤의 주장을 뒤집는 영화, 즉 이성은 욕망을 억제할 수 없고 오히려 욕망의 도구일 뿐이라는 이성과 욕망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화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울러 보바리 부인을 일탈로 이끌거나 도움을 준 것은 모두 남성들, 타인이었다. 이에 비추어 나와 타인의 관계,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보여주는 영화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영화는 욕망의 파괴적인 면만 보여줌으로써 욕망의 생산성을 은폐한 영화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보바리 부인이 살던 시대는 가부장적 남성 중심주의와 이성 중심주의가 확고하게 뿌리박힌 사회였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여기에 순종을 강조하는 크리스트교의 영향하에 대부분은 여성은 참고 인내하며 살아 왔다. 하지만 엠마 보바리는 달랐다. 이러한 질서에 참을 수 없는 질식감을 느낀 그녀는 사회구조에 도전한다. 당시의 남성이나 수구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천방지축쯤으로 보일 테지만, 페미니스트나 진보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 이성 중심 사회에 대해 도전한 영화.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가혹한 사회구조에 균열을 일으키는 자유의 전사, 선구자적 노마드를 그린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감독(소피 바르트)는 한편의 입장을 옹호하지 않고 천방지축과 노마드 사이에서 어슬렁거리며 비교적 담담하게 카메라를 비춘다.
1) 이 영화는 보바리 부인의 욕망을 그린 영화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는 듯 하다. 그녀의 남편은 지극히 이성적인 사람이다. 이와 관련하여 욕망은 홍수처럼 넘치는 습성이 강하기에 이성의 댐에 가두어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될 수 있다. 이는 이성과 욕망의 관계와 함께 결국 인간의 본질론으로 귀결된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2) 그녀의 욕망은 4가지 방향으로 향한다. 이는 인간의 4가지 욕망을 반영하는데, 미(美)에 대한 욕망, 낭만욕, 명예욕, 신분 상승욕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욕망의 본질이 무엇인가? 아울러 자아와 욕망의 형성에 관한 라캉의 이론을 살펴본다
3) 보바리 부인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 그녀의 폭주를 막을 수 없었을까? 이는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문제로 귀착되므로 이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보바리부인의 처녀적 이름은 엠마이다. 어릴적 어머니를 잃고 부유한 농장주인 홀아버지 루오 밑에서 자란 엠마는 수도원에서 청소년기를 보낸다. 그녀가 엄격하고 절제된 그곳에서 깨우친 유일한 것은 세상은 금기로 가득찼다는 것이었다. 금욕, 절제, 봉사, 의무...그리고 죄책감.. 세상은 금기를 실천하기 위해 태어난 것인 마냥. 욕망을 터부시 하는 기독교, 남성중심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덕목이었다. 그녀는 금기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또래들과 달리 어깃장을 놓는다. 연애소설을 탐닉하고 그림에 의지하여 금기를 버텨내지만 결국 시간은 버텨내지 못한다. 어렸지만 그녀는 이성에서 권태를 보았고 욕망에서 삶의 활기를 느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수녀원 학교를 중도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고야 만다.
여기서 보바리 부인의 자아와 욕망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성격을 지녔을까를 라캉의 이론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라캉에 의하면 우리의 삶은 상상계, 상징계, 현실계의 3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이는 생후 6-8개월 사이의 단계를 말하는데 이곳은 거울, 장난감 엄마등 이미지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주로 엄마와 아기의 2자 관계이다. 이때 아이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인식한다. 즉 거울이 자아, 자기 정체성을 만든다. 거울은 은유로서 엄마나 외부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인간 본래 고유의 자아나 정체성은 없으며 거울, 엄마로 비유되는 타자에 의해 자아가 형성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상을 있는 그대로 읽지 못하고 과장이나 착각, 축소하게 된다. 거울속 이미지로 자신은 완벽한 존재자라는 착각에 빠지거나(나르시시즘) 왜 저리 못나 보이는 가하는 열등감에 빠지기도 한다. 거울속 이상적인 모습과 현실의 불완전한 모습에 불안감이 발생한는 단계이다.
이처럼 상상계는 자아가 만들어지는 이미지의 장이면서 착각과 기만의 영역인 것이다.
엄마와의 2자 관계에서 이제 아버지(=언어= 타인= 금기)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아기의 훈육과 교육의 주체로 등장한다. 아버지는 법과 도덕의 집행자로서 상과 벌을 통해 아기를 길러간다. 이 모든 것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상징계는 언어구조에 기초해 구성된 상징과 문화의 세계이다. 아버지의 등장에 아기는 공포를 느껴 엄마의 남근이 되겠다는 생각을 접는다.(상징적 거세) 아기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억압한다. 억압된 것은 무의식에 축척된다. 무의식에 축척된 충동은 결국 욕망으로 발현된다. 상징계는 무의식과 욕망이 발생하는 단계이다.
이제 타자에 의해 형성된 주체는 아버지의 법, 언어로 대표되는 사회적 질서나 규칙, 타자와의 관계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이에 자신을 일치시킨다. 주체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타자들에 인정 받고 싶다. 인정을 받아야만 쫒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인정을 받으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 예컨대, 공부를 잘하거나, 착하거나, 일을 잘하거나, 성실하거나, 존경받는 의사, 판사가 되거나 해야 한다. 즉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이를 실현해야 한다. 이처럼 욕망이란 자기본래의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인 것이다. 자신의 본래의 욕망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은 채울 수 없는 욕망인 셈이다.
그런데 그 욕망은 우등생, 모범생, 선생님, 판사, 엔지니어, 의사 등등 모조리 언어 기호로 이루어져 있다. 이로써 인간은 실체가 아닌 상징적 기호를 욕망한다는 의미가 된다. 인간도 역시 타자와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상징기호에 불과하다. 모든 것들은 실체가 아닌 사회가 구성해 놓은 상징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요약하면 상징계에서 형성되는 무의식과 욕망은 내가 주체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언어일 뿐이며, 실체가 아닌 상징기호를 욕망할 뿐이라고 라캉은 주장한다.
우리의 이미지와 언어는 실재계에 있는 그 어떤 사물을 재현 표상함으로서 이루어 진다. 그런데 그 실재의 모습을 우리는 온전히 완벽하게 표현해 낼 수가 없다. 예컨대, 실제의 바다는 때로는 생명의 보고로 언어화 되고, 어떤 때는 죽음파괴의 공간, 또 어떤 때는 모험과 추억의 장소로 표현되지만 이는 부분적인 재현일 뿐 바다의 온전하고 완벽한 모습은 아니다. 바다의 진자 모습을 우리는 이미지나 언어로 재현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상상계와 상징계의 배후에 있으면서도 이 양세계가 담아낼 수 없는 원초적인 차원이 실재계인 것이다. 재현의 수단인 언어가 실재의 모든 것을 표현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행위와 언어체계 밖에 머물러 있는 일종의 잔여영역이며, 상상계와 상징계의 경계선이면서 둘 다 포괄하는 영역이다. 다시말하면, 언어와 표상과 이미지를 넘어서 있으면서도 언어와 표상과 이미지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실재계이다. 이러한 점에서 라캉의 실재계는 이는 칸트의 물자체와 유사한 개념이다.
결국 욕망은 상징기호(언어)를 욕망하는 것이 본질인바, 언어는 결코 실재계에 도달하지 못하므로 욕망 역시 결코 실재계에 도달하지 못한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채울 수 없는 것이다.
4.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보바리 부인의 자아와 욕망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그녀가 거쳐간 상상계와 싱징계에서 형성된 셈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자신의 본래의 욕망이 아닌 타인에게 인정 받기 위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욕망를 갖추었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이러한 그녀의 욕망은 실체가 아닌 타인들이 선망하는 부자, 귀족, 멋진 사랑 같은 상징 기호(언어)를 욕망하기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만족을 모르는 욕망의 소유자인 셈이다.
1)수녀원을 나와 집안일을 거들고 있는데 엠마는 의사로부터 청혼을 받는다. 그는 샤를르 보바리라는 시골의사였고, 총각이 아니라 홀아비였다. 주어진 것들에 언제나 순응하는 사람이었기에 부모의 권유에 따라 순순히 결혼했는데, 그의 전 부인은 나이 많고 돈 많은 과부였다. 그런데 그만, 공증인에게 사기당해 전 재산을 날린 그녀는 남편을 홀아비로 만들어 주고 훌훌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 홀아비 시골의사는 아버지를 치료한다는 핑계로 뻔질나게 들락거리며 엠마에게 접근을 했고 마침내 그녀도 그에게 운명을 건다. 그녀는 그렇게 보봐리 부인이 되었고 용빌이라는 시골마을에 신혼집을 차렸다.
3) 절제와 인내의 감옥에 갇히다
결혼생활은 그녀의 기대와는 차이가 있었다. 결혼은 둘의 차이를 존중해 주었지만 생활은 둘의 차이를 존종해 주지 않았다. 남편은 그대로를 좋아하고 아내는 가꾸기를 좋아했다. 남편은 기존을 고수하고 아내는 새것을 지향했다. 남편은 위험을 회피하고 아내는 위험을 감수했다. 남편은 용빌을 사랑하고 아내는 파리를 동경했다. 차이가 그들을 존중해 주지 않듯이 그들도 서로의 차이를 존중해 주지 않았다. 차이 때문에 결혼했건만 차이 때문에 서로 등을 돌리고야 만다. 그럼에도 남편에게 차이는 인내의 대상이었지만 아내에게 차이는 투쟁의 대상이었다. 당연히 그들의 보금자리는 감옥으로 돌변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결혼은 보금자리를 짓는 건설이 아니라 감옥을 짓는 하는 노동일 뿐이었기에 남편은 수갑 아내는 손목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인내와 절제라는 이름을 가진 감옥에 갇히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억울했다. 자신은 아무 죄가 없었다. 취향이 다른 것이 죄가 된다면 그것은 부당한 사회이다. 이제 그녀에게 차이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탈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죄 없는 죄수가 해야 할 단하나의 권리는 탈옥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과감히 탈주를 감행한다.
그녀의 욕망은 4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욕망의 본질은 무엇일까 살펴보기로 하자.
1) 플라톤은 욕망이란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 주장한다. 그는 이성(logos)이 욕망을 제어하고 지배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후 이 견해는 로크 데카르트등 서양의 주류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2) 헤겔은 사람은 인정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욕망이란 타인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값비싼 스포츠카를 갖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남들이 스포츠카를 서로 가지려고 욕망하기 때문에 나도 그 차를 욕망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인정 투쟁이며 이러한 인정 투쟁의 결과 주인과 노예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3) 프로이트는 의식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데 무의식에는 엄마의 상실과 그로 인한 오이디푸스컴플렉스가 억압되어있으며 이러한 성적 충동에서 욕망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4) 라캉은 엄마를 상실하고 상징계에 들어온 인간은 상징기호에 불과할 뿐이며, 실체가 아닌 상징기호를 욕망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후술한다.
5) 사르트르는 세계는 즉자적 존재(돌멩이같이 언제나 A=A인 존재)와 대자적 존재(끊임없이 자기를 극복하는 존재 - 의식)가 있다. 인간은 의식적 존재 이면서 자신이 결여되어 있는 사물적 존재이기를 욕망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욕망이란 욕망 주체와 욕망 대상 사이의 2자 관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욕망 주체와 이 주체가 본받고 싶어 하는( 또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델 그리고 욕망 대상의 삼각관계에서 나온다고 주장한다. 즉 내가 추앙하는 타인이 어떤 욕망 대상을 가지고 있다면 서로 빼앗기지 않으려고 모방적으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욕망이 더 커진다는 것이다.
법, 도덕, 관습과 같은 금기는 한편으로는 우리의 생활 질서를 보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금기를 어기도록 유혹하고 부추긴다. 바타유(Georges Bataille,)는 금기는 신비의 불가침 영역을 만들어 우리가 그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면서도 그 영역에 들어오도록 우리에게 손짓한다고 주장한다.
1) 스피노자는 코나투스(conatus- 욕망)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보아 이성이 욕망을 제어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 그는 욕망과 대상의 관계도 역전시킨다. 욕망을 결핍으로 이해하면 욕망 대상(옷)이 욕망(따스함, 멋, 과시)을 유발시킨 것이 된다. 하지만 이는 정 반대이다. 욕망이 욕망 대상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발을 보호하고 싶다는 욕망이 신발을 만들어내고, 따뜻하고 싶다는 욕망이 집과 의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플라톤에 맞서서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어떤 대상이 좋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욕망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이 좋다고 일갈했다.
2) 니체도 스피노자의 입장을 이어받아 욕망이나 의지가 가치나 형식을 부여하는 힘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개념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에 상응하여, 생산적이고 창조적이고 능동적이다.
3) 들뢰즈는 욕망과 충족, 결핍과 획득의 이원론에 반대하여 욕망을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성으로서 강조했다. 더 나아가 그는 욕망의 주체화와 인격화를 거부했기 때문에 욕망하는 주체라는 용어 대신에 욕망하는 기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녀의 탈주는 4가지 방향에서 이루어 진다. 이는 인간의 4가지 욕망을 반영하는데, 아름다움으로의 탈주, 낭만으로의 탈주, 명예로의 탈주, 귀족신분으로의 탈주가 바로 그것이다.
옷과 가구를 파는 장사치 뢰르라는 사람이 그녀 앞에 나타난다. 그녀를 아름다움의 세계로 인도하겠다 장담한다. 자신이 미의 사신이나 되는 듯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아름다움은 외상으로도 그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며 그녀를 유혹한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면서도 소비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값비싼 의상과 호화로운 가재도구를 마구 사들인다. 신흥세력인 자본주의의 단맛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흠뻑 빠뜨리며 그녀의 욕망은 희망으로 넘쳐 흘렀다.
엠마는 수갑처럼 갑갑하고 감옥처럼 비좁고 답답한 용빌을 떠나 루앙, 파리로 가고 싶었다. 거기서 음악회, 오페라등을 즐기며 감성을 흠뻑 적시고 싶었다. 이 때 레옹이라는 총각이 나타나 그 젊고 늠름한 몸으로 그녀의 감성을 터치한다. 엠마는 주저없이 낭만이라는 마차에 몸을 싣고 싶었다. 레옹 그는 비록 변호사 밑의 법률서기이지만 멋진 외모에 시낭송을 즐기는 프랑스 제일의 로맨티스트라 자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 열차에 올라타려는 마음 간절했지만 잠시 죄책감에 주저하는 사이 실연당했다고 착각한 레옹은 파리로 떠나버리고 만다. 그녀은 이일을 계기로 더욱 불같은 욕망에 휩싸인다.
엠마는 남편이 시골의 찌질한 의사로 사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유명의사의 아내로 떵떵 거리고 싶었다.
명예로의 탈주 열차에 몸을 싣고 싶었다. 이때 그녀 앞에 오메라는 약제상이 나타나 제안한다. 다리가 아픈 동네 청년이 있는데 새로운 시술방법으로 치료하면 프랑스의 유명의사가 될 수 있다고 유혹한다. 이에 엠마는 남편을 적극 설득하지만 소극적이고 찌질한 남편은 주저한다.
남편의 병원에서 눈이 마주친 적이 있는 로돌프 백작이 엠마를 무도회에 초대한다. 로돌프는 그녀와 함께 승마를 하며 사냥에 나선다. 평민에 불과한 엠마는 귀족으로 살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귀족들과 승마를 하고 말을 타고 축제를 즐기는 것이 마냥 행복했던 것이다. 주저하던 그녀는 그 신분으로 도피행 마차에 주저없이 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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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우리는 엠마의 선택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녀는 정녕 엠마는 자신의 질주를 멈출 수는 없었을까? 이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느냐의 문제와 결부되는데 이는 이성과 욕망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본질문제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사안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이론이 있지만 여기서는 합리론적 인간관과 경험론적 인간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합리론적 인간관은 대체적으로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성으로 욕망을 통제 할 수 있다고 보지만 경험론적 인간관은 인간은 이기적 욕망적 존재로 보고 이성이란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 주장한다.
인간이 동물과 달리 문명과 사회를 발전시켜 올 수 있었던 것은 생각하는 힘 즉,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자기가 하는 행동을 목적에 맞게 계획하고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인간은 바로 이런 계획과 예측을 바탕으로 도구를 제작 사용하여 문명을 이룩하고 사회를 발전 시켰다. 플라톤은 인간은 이데아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이성을 가졌다고 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고 주장하였다.
근대 철학의 시조 데카르트는 이성은 모든 인간에 선험적으로 부여(본유관념설) 되었다며, 참 거짓을 분별하는 능력인 이성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준다고 강조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때의 나는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이다. 이는 신이나 왕의 부속물이 아니라 이성을 가진 자유로운 존재라는 사상으로 발전하였고 이는 결국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근대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성론적 인간관은 서양 전통철학의 주류로 자리매김한다.
합리론적 인간관은 이성으로서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인간다운 인간은 이성이라는 영혼의 부분이 기개와 욕망을 잘 조절할 때 갈등이 없어지고 영혼의 조화를 이루게 된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자연은 인간에게만 이성을 부여 했으므로 인간은 자연의 뜻을 잘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성 우위론에 동조하였다. 또한 칸트는 인간은 스스로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닐 때 참된 인간이 된다고 본다.
홉스는 인간은 자기보존의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이기적 존재라 규정한다. 그리하여 자연상태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 선 절대 악 같은 것은 없으며 선악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쇼팬하우어는 세계의 본질은 삶의 의지(=욕망)이라며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라 규정한다. 힘(권력)의 의지를 주장하는 니체 역시 인간을 욕망적 존재로 보고 있다.
프로이트는 의식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데 무의식은 성적인 충동으로 가득 찼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은 욕망의 존재라는 것에 동의 한다.
홉스는 이성은 자기보존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계산능력이며 도덕도 결국 계산에 의한 것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또한 흄은 이성은 욕망의 노예일 뿐이라고 한다. 쇼팬하우어는 “의지(욕망)는 절름발이를 어깨에 메고 가는 힘센장님이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절름발이는 실천력은 없고 생각만 할 줄 아는 이성을 의미한다. 이는 이성은 욕망의 노예라는 다른 표현이다. 한발 나아가 그는 상대방을 설득하려면 상대방의 이성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익 욕망 의지에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의 인과관계에 따라 종속되는 존재가 아니라 인과관계를 벗어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위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한다. 즉 인간은 자연법칙을 인식하면서도 자연법칙에 종속당하지 않은 존재이며 세계안에서 자신의 의무를 의식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규정한다.
실존주의자인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은 본질이 없기에 자유이며 이 자유로서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경험론자와 현대의 구조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한다. 욕망에 따른 행위는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라 인과관계에 의한 행위이므로 자연법칙에 굴복하는 행위인 것이다. 소쉬르, 라캉, 푸코, 알튀세등은 자아, 주체등은 본래 타고난 것이 아니라 타인이나 언어, 구조에 의해 결정된 것이기에 이러한 구조를 벗어날 수 있는 자유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에서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이다.
1) 합리론적 인간관에 따르면 보바리 부인 역시 이성적 본질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이성으로 욕망을 통제하여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멈출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불행의 책임은 온전히 자신이 져야만 할 것이다.
2) 경험론적 인간관에 따르면 이성은 욕망의 노예일 뿐이며 인간의 자유의지는 부인된다. 보바리 부인은 욕망의 포로이자 언어와 사회와 구조의 포로이다. 그럼 보바리 부인의 책임은 부인되는가? 이론은 그렇지만 현실은 다르다. 이 경우 모든 것을 사회의 책임으로 돌린다면 그야 말로 무책임한 일일 것이다. 현실적이라 자부하는 경험론이 처한 현실의 딜레마인 셈이다.
보바리 그녀는 과연 성공적인 탈주를 하였을까? 절제와 인내라는 이성의 감옥에서 탈주한 그녀. 욕망으로의 도피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새로운 감옥이 있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 아니 안다고 해도 멈추게 할 이성의 힘은 미약하기만 했다.
오메의 꾀임에 빠진 엠마는 수술을 회피하던 남편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기어이 장애를 가진 청년은 수술대에 눕는다. 수술에 성공하면 남편은 프랑스 제일의 외과의사가 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편은 수술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남편은 주저한다. 그는 양심과 싸운다. 자신의 능력으로 청년의 장애를 완치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안다. 명예욕과 양심의 대결에서 그는 양심을 버릴수가 없었다. 아니 수술이 잘못되면 청년은 죽을지도 몰랐다. 남편은 결국 수술을 포기하고야 만다. 기대에 가득차 이를 지켜 보던 사람들은 엠마부부를 비웃고 손가락질한다. 엠마는 깊은 절망에 빠진다. 이렇게 명예의 감옥에 빠져 심한 고통을 당한다.
무능하고 책임감 없는 남편에 절망한 엠마는 백작 로돌프에게 달려간다. 이미 내연관계를 맺은 그에게 파리로 도망가서 결혼하자고 요구한다. 그녀에게 욕망은 이성으로 억압될 수 있는 크기를 이미 넘어서고 있었다. 신이 인간에게 욕망을 부여 한 것은 억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자유로운 행사를 위해서 일 것이다. 유부녀인 주제에 결혼을 요구하는 그녀가 로돌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엠마에게 로돌프라는 인간보다는 그의 신분과 재산이 필요했듯이 로돌프도 그녀 자체보다는 그녀의 몸만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로돌프는 어쩐 일인지 엠마와 야반도주하기로 약속을 한다.
약속한 날, 뢰르에게 다량의 고가 물품을 구입하고 로돌프의 마차를 기다리는 데 결국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로돌프는 엠마를 버려두고 이탈리아로 혼자 도주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성공한 사냥꾼이었지만 그녀는 실패한 사냥꾼이 되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육체를 사냥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녀는 신분을 사냥하는데 실패했다. 그녀는 신분상승의 덫에 치여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장사치 뢰르는 그녀에게 사치를 끝없이 권유했고 그녀는 사치에 취해 사치를 일상의 평범한 일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는 아름다움을 제지하려는 사람들을 이해 할 수 없다. 누가 감히 아름다움에 저주의 잿밥을 뿌리는가? 돈보다는 아름다움이 훨씬 아름다운 법. 어찌 인간이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살 수 있겠는가? 과소비와 사치는 어쩔 수 없는 하찮은 부수물일뿐.
그녀의 소원대로 과소비와 사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법이 문제였다. 그녀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빚을 지고 말았고, 뢰르는 그 금액을 공증인에게 양도했으며, 공증인은 엠마의 재산을 압류하고 경매에 넘겨 버리고야 만다.
자신의 집이 파산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남편은 로돌프와의 실연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엠마를 데리고 루앙의 음악회에 간다. 그야말로 인내와 절제의 화신답다. 거기서 레옹과 재회하고 또 아내에게 소개해 준다. 엠마로 부터 실연의 아픔을 당하고 용빌을 떠나온 레옹은 성공한 듯 보인다. 그녀는 레옹과 육체의 격정에 빠진다. 그리곤 본색을 드러내 그녀는 자신의 부채 상황을 설명하고 도와줄 것을 요구하지만 레옹은 냉정하게 거절한다. 아니 레옹에겐 그녀의 부채를 감당할 재산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부채만큼의 가치로 그녀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낭만이 현실과 만날 때 신은 언제나 현실의 편을 들어 주곤 했고 예외는 없는 듯 하다.
6.
결국 엠마의 4가지 욕망은 모두 좌절되고야 만다. 그녀는 절제와 인내라는 이성의 감옥에 갇혀 권태로 괴롭힘을 당하다 탈주에 나섰지만 다시 감옥에 갇히고야 만다. 그건 탈주의 감옥, 욕망이라는 이름의 감옥이었다. 결국 인생은 이성의 감옥에 갇히느냐? 욕망의 감옥에 갇히느냐?의 문제인 것 처럼 보인다.
그녀는 노마드, 참 자유인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하였기에 엠마는 분수를 모르는 천방치축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 써야만 했다. 탈주의 감옥은 인내와 절제의 감옥보다 더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지울 수 없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그녀는 약제사 오메의 집에서 독약을 훔치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성에 도전한 욕망의 여인, 엠마. 아직 차타레 부인, 그리고 스카라 오하라가 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욕망을 자유롭게 표출한 선구자 여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으리라.
작가 플로베르는 엠마의 욕망에 방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삶에 중점을 두고 있다.그가 고전성을 잃지 않은 작가임을 증명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