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의 외할머니가 어린 밥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고. 그리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고.
-김호연, 불편한 편의점
‘왜 하필 나인가?’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때가 있죠.
건강은 장기들의 침묵 속에서 누리는 삶이라고 합니다. 침묵이 깨지고 온 신경이 그곳으로 집중되어 아픈 곳을 분명하게 느끼는 순간, 그 사람은 자신이 유한한 신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됩니다.
어디 하나 콕 집어서 말할 수 고통이 있는가 하면 그게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고통도 있습니다. 바로 정신 질환이 그렇습니다.
휴대폰 속 SNS 에는 건강하다 못해 갓생을 사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고개를 들어 빌딩숲을 바라보니 대로변 곳곳에 정신건강의학과 병원 간판이 눈에 띄지만 과연 장사가 될까 싶습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유병률이 8퍼센트인 정신 질환은 걸릴 확률이 낮은 편일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마음속에 답을 생각하시고 이야기를 이어 나가겠습니다.
지하철 한 칸의 좌석 수는 54칸인데요. 내가 탄 지하철 칸에 빈자리가 없다면, 대략 50명이 타고 있는 셈이지요. 이런 상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평생 동안 어떤 병에 걸릴 확률이 8퍼센트라면, 이 칸에 있는 사람 중 4명은 그 질환을 앓는다는 말입니다.
8퍼센트는 낮은 확률일까요?
2021년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정신건강실태조사에 따르면 우울증의 평생유병률은 7.7퍼센트입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좀처럼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며 무기력해지고 먹고 자는 패턴이 바뀝니다. 심하면 죽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죠.
생각보다 우울증 유병율이 낮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요,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서 말하는 유병율은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한, 현저한 장애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우울증을 앓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울증에 걸릴 확률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요, 앞에서 제가 드린 질문에 정답은 없습니다.
흔한 일이든 드문 일이든 개인 차원에서는 오직 내가 그 병과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확률은 집단 수준의 문제이고 내가 걸리면 100퍼센트이고 내가 걸리지 않으면 0퍼센트입니다.
만약 내가 정신 질환에 걸렸다면.
‘왜 하필 나인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과거를 현미경 들여다보듯이 샅샅이 뒤집니다.
무엇이 언제부터 어쩌다 잘 못된 거지?
외부에서 원인을 찾다가 나의 과거도 돌이켜보게 됩니다.
그때 건강을 챙기지 않아서? 그때 그 일 때문에?
인터넷으로 의학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놀라게 됩니다. 이렇게 아픈 사람이 많았나?
정보화 시대에 주의해야 할 점은 범람하는 정보의 옥석을 가리는 일도 힘들지만, 병듦을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지침을 몰랐거나 지키지 않은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병에 걸리는 이유는 지식이 부족하거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의사도 병에 걸리고 건강을 위해 운동하다 다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지요.
특히 정신과와 관련된 문제는 개인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는데 네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병에 걸린 것이라고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는 병에 걸린 사람에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은 추운데 춥지 않다고 생각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춥다고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평소 추위를 타지 않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의 온도가 한껏 낮아진다면 버틸 수 있을까요?
두려움, 분노, 절망감이 휘몰아쳐 나를 압도할 때, 왜 하필 나야?라는 질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순간, 이 폭풍을 잠재울 수 있는 주문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은 나를 포함한 누구와도 싸우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화창한 날 베란다에서 빨래를 털다가 낙상하는 불운을 당하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도 치명상을 입는 연약한 인간이 죽음을 피해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에 가깝습니다.
병은 살면서 겪는 작은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죽기 전에 생명의 유한함을 병을 통해 경험합니다. 이전과 다른 삶이 움트는 끝이자 시작, 하나의 분기점인 거죠.
긍정적이기만 할 것 같은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든 배설할 수 있어 편안했던 기저귀와의 이별, 소속된 곳으로부터 졸업, 독립. 이것 모두 상실의 과정을 거칩니다. 다만 비슷한 문화권에서 또래집단과 비슷한 시기에 함께 겪는 성장과는 달리 병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며 특정 시기를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그래서 아픈 사람은 외롭다고 느낍니다. 외로움이 더 큰 고통을 느끼게 하죠.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니체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있지만 왠지 체육관 벽에 걸려 있어야 어울릴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는 아니니까요.
성장하기 위해서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고통이 찾아온다면 마음 한 켠에 모서리를 접어 두었던 페이지를 펼칩니다.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나에게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새로운 지도를 받아 듭니다.
가려던 길을 가지 못하는, 기존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상실감을 충분히 애도하세요. 삶의 유한함을 발견하고 우선순위를 재정비합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죠.
어쩌면 지하철에 탄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누구도 나처럼 불행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질투심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누군갈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감정이에요.
무엇보다도 나를 탓하기 쉽죠. 이때 나를 탓하는 목소리를 타인의 목소리로 바꾸어 보세요. 그런 악마가 없을 겁니다. 다시 아프지 않기 위해서 하는 자기반성이 나를 아프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자신을 탓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면 그건 병적인 반추사고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 볼륨을 줄일 수 있도록 주변의 도움을 받길 바랍니다.
고통은 누구도 원치 않죠. 하지만 언젠가 고통이 찾아온다면 그것을 통과해야 합니다. 눈앞의 사막을 건너는 것이죠.
혼자보다 둘이면 좋고 셋이면 더 좋습니다.
자립적이던 나에게 의존을 허용하고 세상의 선한 의지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당신이 병에 걸린 이유는 그저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내 탓 이라고 끝까지 주장할 수도 있지만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금의 행불행감이 과거를 채색한다는 겁니다. 역사서와 같아요. 현재의 역사가에 의해 과거는 재평가됩니다.
지금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반추하고 자책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만족스럽다면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과거가 변하지 않더라도 말이죠. 고통이 줄어든다면 분명 다른 생각이 들것입니다. 아픈 와중에도 내내 아프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덜 아픈 날이 있어요. 고통에는 시작이 있고 끝도 있습니다.
지금 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자책하고 있다면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를 통과한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나를 더 친절하게 만든다고.
고통이 나를 통과해 지나가는 동안 상처 입었지만 나를 용서할 줄 아는, 타인의 도움에 열려 있는, 한계를 인정하고 타인의 아픔에 연민을 느끼는, 더 친절해진 나를 만나세요.